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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793건

  1. 2009.01.23 새해 풍경
  2. 2009.01.01 쥐를 보낸 날
  3. 2008.12.22 집문제
  4. 2008.11.14 수능 이후 한 사회적 상상
  5. 2008.10.25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새해 풍경

단상 Vorstelltung 2009. 1. 23. 09:3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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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구속, 신동아 논란, 용산사태..한 해의 시작이 참으로 가파르다. 신동아는 아무래도 고도의 상술같고, 미네르바로 들끊던 여론에 용산사태는 시너를 부었다. 합법적 정권을 시기하고 질타하는 트랜드는 민주화 이후 하나의 틀처럼 굳어졌지만, 아무래도 이번 조짐은 심상치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MB 정권이 한나라당과 완전히 틀어질 가능성도 있다. 노통이 몸소 외쳤던 권력분점의 분수령이 MB정권에서 정착될 가능성..웹2.0시대에 라디오 방송에서 설교를 하며 벙커에 들어가 작전회의를 하는 모습은 잊혀진 과거를 향수하는 한편의 무성영화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제 이런 영화를 못봐 준다는 거다.

 

                      사진 : 푸른내, 고공농성 중에 있는 울산 미포조선소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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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를 보낸 날

단상 Vorstelltung 2009. 1. 1. 23:2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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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월요일에 갑자기 L형의 문자가 왔다. 내용은 "쥐잡으러 가자". 한창 사무실에서 닥치는 이 일 저 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전화 버튼을 눌렀다. MB때문에 열받아 미치겠다며 31일 촛불집회에 나가자는 것이었다. 사안의 핵심은 방송법인데, 사실 뉴스에서 그렇게 열을 내어 보도를 하는 만큼, 시급한 민생사안은 아니라고 보지만, 안그래도 볼게 별로 없는 방송 중에서 그래도 나은 편인 공중파 방송이 더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지는 않다. 정신없는 일과를 마치고 멍한 정신으로 지하철을 타고 오다가 자리를 잡고 앉자 졸음에 떨어졌다. 자다가 눈을 뜨니 승객이 많이 빠져 나간 전철은 시원한 벌판을 달리고 있다. 편의점에서 술을 사고 집에 들어가면서 K에게 별일 없으면 31일 촛불집회에 가보지 않겠냐고 전화했다. 그리고 어제, K는 그의 선배와 함께 종로에 왔고, 오기로 했던 L형은 끝내 오지 않았다. 종로에 있는 교회에 송구영신예배를 보기 전에 가족과 함께 들르겠다고 했는데, 어린애를 데리고 칼바람 부는 거리에 오기가 쉽지는 않다. 5,6월이라면 모를까. 셋이 만나서 일단 배를 채우기 위해 샤브샤브집에 들어갔다. 간단히 소주를 겸해서 식사를 하고 거리를 나가 봤는데 촛불 행렬은 보이지 않았다. 청계광장을 거쳐 세종로 사거리에서 보신각 건너편에 가서야 풍선을 든 우군을 만날 수 있었지만, 곳곳에 진을 치고 뻗치기를 하고 있던 전경들에 비하면 미미한 수자다. 그래도 전의경 중에서 짬이 있는 편인 수경들과 경찰 간부들은 포장마차에서 꼬치를 먹을 정도로 여유로운 표정들이다. 국세청 앞에서 계속 서 있다가 매서운 추위를 피하기 위해 다시 술집에 들어갔다. 일본식의 자연주의적 인테리어를 그대로 뜯어다 붙이듯한 술집에서 오뎅탕을 시켰는데, 가격에 비해 먹을만 했다. 마치 밖은 물류창고의 냉동고 같아서, 갑자기 따뜻한 데 들어오니 머리가 먹먹하고 입은 무거워 졌다. 소주 몇잔을 걸쳐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방송과 영화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쓴 작품에 관한 얘기도 나왔다. 단편소설은 비교적 최근에, 그리고 오래 전에 시나리오를 쓴 적이 있는데, 공개적으로 발표한 적은 없었다. 시니리오는 부동산업을 하던 선배가 보고 재밌었다는 소감과 한 시나리오 작가에게 보냈다가 편집의 실수로 욕을 바가지로 먹은 정도의 에피소드가 전부이고,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를 보고 흥을 받아 쓴 단편은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았다. 이런걸 같고 업으로 한다면 공개도 해서 주변의 평가를 받는 게 필요한 일이지만, 한때 바람일 뿐이라면 그냥 바람으로 놔둬야 한다. 술집을 나서자 종이 피켓을 든 시위대가 줄을 지어 보도를 지나간다. 10시가 좀 넘은 시간인데, K의 선배는 집으로 가고, K도 그냥 집으로 가려다가 사회당 사람들 얼굴도 보고 갈겸 다시 국세청 쪽으로 갔고, 나는 낙원상가 앞 사거리에서 파고다 공원 쪽으로 길을 건넜다. 종각역은 10시 이후에 전철이 무정차통과한다고 해서 종로 3가 역으로 가기 위해서 길을 건넜는데 전경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파고다 공원쪽에서 모인 시위대의 진출을 막기 위해 전경이 길을 막은 것이다. 날도 춥고, 술도 한잔 했는데, 길까지 막고 있으니 순간 화가 났다. 마구 소리치며 하며 전경들에게 길을 비키라고 하자 한 경찰이 파고다 공원 끝쪽으로 해서 돌아가라고 한다. 이 말에 더 열이 받아 괜한 호기를 부렸지만, 내가 경찰이라고 해도 그런 말 밖에는 못할 것이다. 길을 건너 버스를 타고, 경동시장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 탔다. 쥐를 보낼 시간이 얼마 안 남은 시간에 미리 신년인사를 나누는 문자를 주고 받으며 버스는 막다른 시간의 끝을 향해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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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문제

문학 Literatur 2008. 12. 22. 08:3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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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자 경향신문에 건설-부동산 관리를 하는 데이비스랭드앤씨아의 대표 이문수 씨의 인터뷰가 실렸다. 요지는 현재 건설사가 독점하다시피 도맡은 기획,개발,건축,시공,감리,시행의 전과정을 각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분담해서 맡는 전환이  필요하며, 주택사업은 고급화와 범용화가 병행되야 한다는 것이다. 범용화란 선진국처럼 주택을 이용하는 대다수 계층의 부담을 완화시키도록 공공임대주택사업을 확장하는 것이다. 최소 30%인 선진국의 공공임대주택 비율에 비해 한국은 고작 2%만이 공공임대주택이며, 하물며 이런 미미한 임대주택에 대해선 편협한 시각이 강해 기피대상으로 낙인된다. 고급화란 돈많은 건축주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건축물의 실용도 뿐만 아니라 설계자의 미학적 감각도 활용해 건축물을 그냥 건물이 아니라 작품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건설사업을 더많은 이익을 내는 투기적 목적으로 내달렸던 건설사의 시대를 접고 그야말로 공공성과 실용성, 예술성을 갖춘 사업으로 변모시키자는 얘기인데, 어떻게 보면 극단의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관점으로도 보이지만,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의 바탕인 집문제의 해결없이 고급스러움만을 쫒는 건축은 마치 모래밭에 쌓은 구조물과 마찬가지로 아찔한 것이다.  100만채의 집이 남아도는데 841만명이 무주택자라는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택시장의 왜곡과 과잉 뿐만 아니라 수도권 집중현상도 살펴 봐야 한다.

예전에 어느 대기업 건설사의 광고에 이런 것이 있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값비싼 아파트에서 사는 이들의 자부심을 높여주는 문구지만, 집없는 사람들도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는 문구로 변경은 안되는가? 한쪽에서는 휘황찬란한 주택이 하늘로 솟구치고, 이것을 침흘리며 바라보는 홈리스들이 시궁창같은 주거지로 몰리는 한, 이들에게 한국은 시궁창같은 국가이면서 '너희들의 국가'이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자유란 악마의 선물이며,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범죄다. 어떤 사회의 현재 상태가 소위 이상적인 '문명사회'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알고 싶다면, 사회의 약자들이 어떤 처지인가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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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이후 한 사회적 상상

주장 Behauptung 2008. 11. 14. 11:4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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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초등학교처럼, 중학교 고등학교도 다채로운 심성학습과 더불어 토론식의 자유로운 수업방식을 채택한다면 좋겠다고. 물론 이런 탈바꿈을 위한 전제는 입시제도의 전면적 개혁입니다. 입시제도의 개혁없이는 학교는 졸업장만 발부하는 인증기관이란 기능과 친구들을 사귀기 위한 만남의 장소(고속도로도 아닌데..) 외에 아무것도 아닌 인간 황폐화의 현장일 뿐입니다.

그러나 입시제도의 개혁을 위한 대전제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대학을 본연의 역할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88만원 세대가 보여주는 것은 취업을 위해 대학을 간다는 것이 더이상 의미없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이상 기업과 공공기관, 각종 사회단체는 신규채용과 인사고과에서 학력조항을 무력화시켜야 합니다. 불필요하게 증가한 대학들이 무더기로 문을 닫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감당하며 대학을 나와야만 사람대접 받는다는 인식의 관성을 깨기위한 사회적 합의와 제도가 필요합니다. 

대학은 정말 필요한 사람만 가게 되고,  그 시기도 인생의 특정시기가 아니라 소년에서 노인까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도 대학을 활용할 수 있고, 그에 따른 비용은 개인부담을 최소화 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도서에서도 수감자 교육을 강화시키는데, 납세의 의무까지 지는 시민에게 대학교육 현장을 개방하는 것이 과연 어려운 일일까요? 지옥으로 된 이 땅이 연옥으로 될 한 방안은, 대학이 자유인을 양성한다는 본연의 목적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이런 구도에서 저는 9-3의 학제가 적당하다고 봅니다.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을 결합해 9년제로 운영하고, 나머지 3년은 그야말로 고등교육의 기간으로서 특성화된 교육 내지 직업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모델은 독일과 프랑스와 비슷합니다만,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이 단절된 이곳의 교육풍토에서 그 연속성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도입할 만한 학제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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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서술 Beschreibung 2008. 10. 25. 20:3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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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와 모방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비극이란 위대한 인물의 행위와 삶,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 형식이고, 희극은 우스꽝스러운 인물의 행위를 모방한 형식이다(우스꽝스럽다는 것은 혐오와 재미를 유발하지만 고통은 주지 않는 것이다). 그의 시학은 의도와는 달리 비극만 다루고 있는데, 비극의 구성요소는 그 중요성에 따라 플롯, 성격, 사상, 조사, 노래, 장경(spectacle)으로 이루어진다. 플롯은 사건의 결합으로서 이야기의 구조, 밑바탕을 말하는데 사건의 급격한 전환과 새로운 국면의 대두가 플롯의 매혹적인 부분이다. 성격은 인물의 성질로서 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내적 규정이다. 재미있는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상을 성격 다음으로 배치한 점이다. 사상이란 상황에 따라 내놓을 수 있는 말로써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 조사는 이런 사상을 매끄럽게 표현하기 위한 수사적 기교이며 장경은 무대장치를 의미하나, 고대 그리스에서 무대장치란 배우의 분장과 의상, 가면 등 소품에 한정된다. 

시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비극이라는 드라마에 대한 얘기로 흐르는지 의아할 수 있으나, 고대 그리스에서 시인이란 단지 글만을 짓는 작가가 아니라 현대적으로 말하면 작가주의적 무대 연출가에 해당한다. 공연시간에도 당시와 현대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극의 경우는 하루 단위(12시간~24시간)의 크기를 갖는다(주1). 영화처럼 두세 시간에 내에 이야기를 압축,집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TV의 연속극처럼 장기간의 크기(megethos)를 갖는다. 밤새 지속되는 공연을 1년에 한두차례 보면서 삶의 애환을 정화시키는 방식은 거칠게 보면 몇주에 걸쳐 드라마를 토막내서 시청하는 현대의 시청자와 별반 다름이 없겠지만, 방식과 효과의 면에서는 물론 상이할 것이다. 인터넷의 발전은 TV 드라마 보기를 장시간의 크기로 연속적으로 시청할 수 있게 한 점에서 고대와 같이 연속적 관람에 가까워 졌지만 무대에서 이렇게 공연을 하는 경우는 바이로이트 축제처럼 매우 한정될 것이다. 일상의 삶을 제쳐놓고 하루종일 동일한 공연을 본다는 것은 현대인의 생활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시학에서 눈여겨 볼 것은 모방에 대한 관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플라톤은 <국가> 10장에서 시인이나 화가를 이데아를 본뜬 제작물의 모방자라 보면서, 이런 모방 행위를 진실과는 세 단계 멀어진 수상한 기교로 처리한다. 바로 이런 모방에 대한 관점에서도 고대 그리스 철학의 두 산맥은 현격히 갈라진다.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에서 장년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손끝을 지상으로, 노년의 플라톤은 손끝을 하늘로 향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두 철학자의 지향점을 대비시킨다. 수많은 개별성으로 손을 뻗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자연학은 좋은 본보기이다. 그가 무질서해 보이는 세계를 파고 들어가 질서를 부여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플라톤은 피조물에 대한 단 하나의 이데아, 원본을 설정하고 이 원본의 피조물인 세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자연(physis)에 대한 문제 보다는 논리(logos)와 규범(nomos)의 문제에 천착한 플라톤으로서는 피조물의 세계는 불완전한 소멸의 대상이며, 불완전한 피조물의 세계를 모방한 예술은 하찮은 양식이다.

이렇듯 플라톤에 의해 추궁되어 추방될 예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건져 냈다. 앞서 말한 바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단지 운문으로서의 시가 아니라 비극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종합예술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보다 한결 세련된 논의를 비로서 펼친 것이다.

모방과 유희

계속해서 시학에 대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비교해 보자. 시인은 모방자라고 본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입장을 수용한다.  그런데 시인이 행하는 모방은 과연 특정한 행위를 그대로 모사한 것일까? 플라톤은 모방을 그 개별적인 원리는 물론 사용방법도 모른 채 겉만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장식으로 본다(601b, 601d). 따라서 모방은 진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방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유희'에 불과하다(602b). 플라톤 자신이 쓰고 있는 이 '유희'(form of play)라는 말에는 모방을 장차 그와는 전혀 다르게 이해하게 만든 단초가 숨어 있다. 도대체가 회화는 정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며, 사진은 피사체의 영혼까지 담는 것인가? 사람들은 고흐의 그림을 보고 실물을 묘사했다고 말하기 보다는 가상의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할 것이다.  모방은 플라톤이 은연중에 감지하고 있듯이 인간의 행위나 사물의 외관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플라톤은 동일성의 철학에 따라 모방을 가짜인 모사품, 진리가 없이는 있을 수 없을 뿐더러 진리보다 세 단계 떨어진 기술로 처리하지만, 여기서는 아퀴나스의 유출설처럼 진리에 세가지로 농도 차이가 나는 단계가 보인다.  이런 농도의 차이는 진리라는 동일성이 낳은 산물이다. 즉 복제품은 원본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지만 원본을 원본이게끔 하는 질적 충만감에서는 현저히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토마스 만의 단편 <베니스에서 죽음>을 영화화한 루치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 죽음>을 보고, 이 영화가 원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모사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과연 이 단편에 종속된 재현에 불과할 따름인가? 원작을 바탕으로 한 대부분의 영화가 원작에 못미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장르가 다른 예술형식 사이의 소통을 두고 진위 논란을 부치는 것은 감정가를 매기기 위해 진위를 따지는 진품명품식의 고루한 발상이다. 이것은 시를 모방으로만 보는 관점에서 나올 수 밖에 없는 귀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의 진정한 기능은 단지 원본의 형상과 의미를 그대로 전달하는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시는 은유로 넘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는 천재의 표징"으로 본다(1459a5). 여기서는 은유가 다만 비극을 탁월하게 만드는 수단으로서 잔기술에 해당하는 시어체와 복합어, 방언의 적절한 사용과 비교하여 우월하다고 평가되고, <시학>의 다른 부분에서 은유에 대한 별다른 의미부여는 없지만, 진리를 동일성의 일관성으로 파악하려는 이성중심의 전통 철학에 대해 진리를 은유의 양식으로 해소시키려는 감성중심의 해체 철학의 도발적 교전이 조심스럽게 <시학>에서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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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비극과 서사시의 길이에 관해 청수(lastmarx)님과 짧은 대화가 있었다.

청수 : 서사시의 배경이 몇 주 혹은 몇 년에 걸친 이야기라는 것이지 공연이 며칠간 진행된다는 건 이상하군요. 서사시를 공연했다는 것도 그렇고요. 판소리처럼 몇시간 동안 암송하지 않았을까요.   
  
갈대아 :   글쎄요, 저는 사건의 경과시간을 공연시간으로 이해했습니다. 48페이지 주14번을 보면 "그리스 극은 보통 동틀 녘에 시작하며 또 실제로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모든 작품에서 드라마 내의 사건을 위하여 12시간이며 충분하다'는 역자의 설명을 볼 때 공연시간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좀더 알아봐야 겠군요. 그리고 이 글은 좀더 쓴 후에 카페에 올릴 예정입니다.   
 
청수 : 비극의 경우 하루에 마친다는 거죠. 서사시가 며칠 동안 공연한다는 이야기는 없지 않나요.^^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의 경우 사건의 경과 기간이 무려 16년이나 되지요.   
 
갈대아 : 역자 천병희는 길이의 문제에 관해 3가지 해석을 제기하는데, 두번째 해석이 바로 길이를 비극의 공연 또는 서사시 낭송에 필요한 시간이라고 합니다(47페이지 주 13참조). 또한 법정 변론에는 시간제한이 있으나 드라마 공연에는 시간제한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58페이지 주 4번) 길이에 대한 두번째 해석을 따른다면 장기간의 공연 시간이 있었던 셈이죠. 47-48페이지 본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서술합니다. "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이 일 회전하는 동안이나 이를 과히 초과하지 않는 시간 안에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는 경향이 있는 데 반해 서사시는 시간적으로 제한이 없다. 이것이 양자의 차이점이다." 이 점에서 서사시가 며칠간 지속될 수 있다고 유추를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들의 견해는 길이를 공연 시간이 아닌 사건의 경과시간으로 본다고 하는군요. 47페이지 주석 13번을 보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는 모두 사건의 경과 기간이 수주일 이상씩이다" 라고 되있는데, 수주일 이상에는 16년도 포함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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