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793건

  1. 2009.05.19 파니 핑크와 아도르노
  2. 2009.05.15 하수상한 세월
  3. 2009.04.07 지역살림
  4. 2009.03.27 실정법의 거부
  5. 2009.03.14 형이상학의 처지

파니 핑크와 아도르노

영화 Film 2009. 5. 19. 09:16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영화  <파니 핑크>는 아마도 90년대 중반에 본 걸로 기억하는데, EBS에서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롭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외양은 예전 청계천의 쓰러질듯한 아파트처럼 생긴 아파트의 옥상에서 무당으로 나오는 세입자가 추는 춤이다. 가장 합리적인 체제를 갖춘 곳에서 원시적인 무희가 전혀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듯한 느낌을 일으킨다. 왜 이런 느낌이 들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자연은 이성이다'라는 결론적 명제를 <계몽의 변증법>에서 내렸다. 이때의 이성은 자연의 폭력을 이성이 전유한다는 의미에서 자연이다. 이성은 맹목적인 자연의 질서를 비켜가는 계략으로 자연에서 벗어났지만, 자신이 벗어나고자 했던 자연을 이성은 다시 재현시킨다. 잠자리의 모양과 비행방식을 모사해 전투헬기를 만드는 것은 이런 경우다. 이성은 모사를 통해 탁월하게 자연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성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인간지배를 위한 도구로 전락함으로써 타락한 자연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성(Vernunft)을 협의의 이성, 곧 오성(Verstand)에 축소시켰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감성에서 받아들인 현상의 다양을 범주화시키는 것은 오성의 몫이다. 이성의 기능은, 이러한 범주화를 위한 선험적 법칙을 만드는 것인데, 이 법칙은 결코 자연 혹은 경험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고,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도 이성이 만든 법칙을 자연에 적용시킨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능은 바로 통제적 사용이다. 이성은 법칙을 창안하지만, 이 법칙은 무한한 자연 앞에서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법칙은 언제나 그 변경이 개방되어 있다.

자연에 대해서 인간은 세가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것은 과학, 미학, 윤리의 경로다. 주술은 미학에 가깝다. 물론 이 세 경로는 혼용이 될 수 있지만 혼동이 되서는 곤란하다. 애인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의 유전자가 잘못되어 있다'는 판단은, 아무리 의학적 관찰에 기반했더라도 잘못이다. 그런 면에서 독일은 사물을 대하듯 인간을 대하는 풍조가 있는듯 하다. 이성의 통제적 사용보다는 이성의 통압적 사용이 사회를 질식시키는 듯한 질서를 부여한다. 이런 곳에서 주술의 힘은 바로 인간의 시원적 본성을 선명하게 부곽시킨다.   

반응형

하수상한 세월

단상 Vorstelltung 2009. 5. 15. 22:12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MB 악법 종합 세트처럼,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을 침해하는 하위법의 전형은, 이땅의 지도층들이 그리도 좋아하는 미국의  건국 초기에도 드러난다.  1791년 미국 의회는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침해하는 어떠한 법도 만들지 않는다는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통과시키고 이를 1차 수정헌법에 수용했다. 그러나 7년 후 의회는 이를 침해하는 이른바 선동죄(Sedition Act)를 통과시킴으로써, 정부와 의회 또는 대통령에 대해 허위적, 모함적,악의적인 것을 쓰거나 말하는 행위를 범죄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1차 수정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지만 강행됐다. 

현재 한국에 체류중인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와 한국의 유사점으로 오랜 문화적 전통과 식민지 경험, 전쟁을 들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한국에는 혁명이 없었다. 4-19가 혁명인가? 대통령을 몰아낸다고 혁명인가? 혁명은 사회체제의 뿌리를 갈아 엎어 버리는 근본적 변혁이다. 하워드 진의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도 혁명을 경험한 국가가 아니다. 독립 혁명이 아니라 독립 전쟁이다.  외적으론 영국의 간섭을 몰아내면서 내적으론 '서부개척'이란 수사로 서부의 인디언 영토에 침공해 들어가는 발판이 독립을 기점으로 마련됐다. 외적을 몰아내자 내적을 본격적으로 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독립 전쟁의 전리품으로 자영농과 수공업자들이 혜택을 보게 되지만, 이들은 체제에 불안정한 소요를 일으키는 흑인노예, 인디언, 백인 빈곤층의 공격을 감내하기 위한 완충 장치이자, 영국으로부터 빼앗아 온 세수(稅收)권력의 먹이로 육성된 것이다. 

참고자료 : 하워드 진, <미국민중사>
               인터넷 한겨례(5월9일)

 

                 

                    

반응형

지역살림

단상 Vorstelltung 2009. 4. 7. 14:08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Neo-Commune : 지역 살림에 대한 시론

 사람은 모자간 육아의 단계에서 벗어나면 시원적 생활세계*인 가정을 벗어나 일정한 교육시설에서 사회화의 첫발을 들여 놓는다. 이때의 교육시설은 주로 영영아, 영아, 유아를 돌보는 시설로 지역의 생활세계에 속한다. 아이가 성장해 성년이 되어갈수록 이러한 일차적 생활세계**는 지역 생활세계에서 이차적 생활세계인 광역의 생활세계로 확대되며, 성년은 더 이상 교육만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생산활동을 통해 자기 삶과 후세의 삶을 책임지는 사회인의 단계이다. 물론 이런 얘기는 순전히 모범적인 예에 불과하며, 실제로 일차 생활세계와 이차 생활세계 간에는 간극이 있어서 지역의 생활세계와 광역의 생활세계가 틀어지는 것이 청년백수 현상인데, 광역의 직업시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청년이 동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예이다.

 여기서는 일단 광역의 생활세계를 학교생활이든 직장생활이든 동네의 단위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해 보자. 유아단계부터 동네 단위의 교육시설을 벗어나 광역단위로 나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개 중등교육기간까지 사람들은 동네 단위의 일차적 생활세계에서 있기 마련이다. 지역평준화가 흔들리면서 중고등학생들이 광역의 생활단위로 편입해 가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공교육도 점차 광역화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사교육은 체인점처럼 지역에 거점을 두면서 광역 단위로 확장을 꾀한다.

교통체계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이동이 매우 유동적인 사회에서 생활세계를 지역과 광역으로 나누는 것이 억지로 보인기도 한다. 그런데 예전부터 한창 주창되는 로컬푸드 운동을 볼 때, 먹을거리의 안전성과 에너지 부하 절감에서 지역이 주목된다면, 여기서 삶을 피워나가는 사람들의 생활세계도 간과할 수 없으며, 그렇다면 지역과 광역으로 지역을 분화하는 것이 단지 행정 편의적인 구획만은 아니다. 지역의 먹을거리가 지역에서 순환하는 흐름이 가능하다면, 지역에서 자란 아이들이 지역에서 성년을 맞고 지역에서 생산활동을 하는 모델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오히려 이 둘이 관련되야만 온전한 의미에서 자립적인 지역의 생활세계가 가능할 수 있다. 물론 아미쉬처럼 종교에 기반한 폐쇄적인 자립형 공동체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제기하고 있는 지역의 생활세계는 이렇게 강한 공동체성을 염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농촌사회를 기반으로한 공동체 모델은 분명 패기할 과거의 잔재는 아니지만, 그대로 전승하는 것이 과제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정한 종교나 이념을 구심점으로 삼는 공동체와 상관없는 지역의 생활세계가 가능할까? 물적, 인적 흐름이 지역과 광역의 구분을 의미없게 만드는 체제에서 지역의 자립적 경제란 수치상의 구분에 불과할 뿐이다. 먹을거리의 지역화도 어느 선상에서 한계가 있다. 도심에서 벼가 자라는 토지를 기대하기는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먹을거리를 통해 지역의 살림에서 되먹임 작용이 일어난다면, 살림의 차원 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화에서도 지역에 기반을 둔 모델이 가능하지 않을까?

주)

*‘생활세계’라는 표현은 하버마스의 체계와 생활세계의 구분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 영역은 밀접히 맞물려 돌아가는데, 정치와 행정, 경제 영역을 포괄하는 체계는 생활세계에 일정한 영향을 끼치지만 반대로 생활세계가 체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론이라는 수동적 반사 외에는 극히 미미하다.

**가족 중심의 시원적 생활세계와 마을, 지역 중심의 생활세계를 통틀어 일차적 생활세계라고 규정해 본다.

반응형

실정법의 거부

문학 Literatur 2009. 3. 27. 14:16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만약 우리가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면...어떻게 저항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정말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 봅시다...우리의 저항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국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물질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군인은 전투를 거부해야 하고, 예비군은 복무하기를 거부해야 하고, 노동자는 무기를 배나 항공기에 선적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룬다티 로이, <9월이여,오라> 중

로이가 제시한 이러한 행동지침은 작년 촛불집회 때 나온 여러 행동강령을 연상시킨다.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는 광고주 불매운동, 미쇠고기 운송 차량 저지, 한 의경의 양심고백..결국 보잘것 없는 초라한 패분만 남았지만, 도대체 이렇게도 하지 않고 어떻게 이 반이성적인 정권과 세계화의 패권에 맞설 수 있나? 실정법은 인민의 의사가 주체적으로 반영되어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특수 맥락에서 정초되어 인민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진 법이다. 이것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과정에 대해  정작 그 법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 이들은 소외되어 있다. 한 개인의 거친 양심과, 이에 대한 공감과 집단적 실천이 반란을 혁명으로 이끌어 올린다. 부당한 법의 행사를 거부한 이들을 종국적으로 철창에 보내려 한다면, 집단적으로 10만의 인민이 동시에 이 법의 행사를 거부해 버리면 법은 무력화된다. 연 30만명에 이르는 입대자 중의 1/3이 집총거부를 한다면, 이들을 과연 영창으로 보낼수 있을까? 법이 바뀔 것이다.    



반응형

형이상학의 처지

문학 Literatur 2009. 3. 14. 23:41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현재 진행중에 있는 <순수이성비판> 독해를 이중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2/3정도 나간 독해를 그대로 진행하면서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것이다. 번역본으로만 본다면 순서대로 죽 나가는게 좋지만 원서를 중심으로 읽으려 하다보니 속도가 더뎌 이런 방법을 쓴다.  서론, 선험적 분석론(요소론과 변증론), 선험적 방법론의 논의가 너무도 복잡스러워서 삼중 사중의 독해로 파고 들어가는 방법도 괜찮을 것 같다. 마치 철벽의 요새를 사방에서 공격하는 것처럼.

머릿말에서 당대 형이상학의 격추된 위상을 말하면서 칸트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중 트로이왕의 아내 헤쿠바(Hecuba)를 인용한다. 그러고 보면 <순수이성비판>도 마르크스의 <자본 : 정치경제학비판>처럼 건조한 서술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modo maxima rerum, tot generis natisque potens-nunc trahor exul, inops. - Ovid. Metam.

eben noch die Allerhöchste, mächtig durch so viel Schwiegersöhne und Kinder...werde ich jetzt, verstoßen und hilflos, hinweggeführt. - Übersetzung des Herausgebers.

그래도 한때는 많은 사위들과 손주들 덕에 최고의 지위에서 권력을 누렸는데, 이제 버림받고 의지할 데 없이 이리 저리 끌려다니는구나.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