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 도스또예프스키,『노름꾼』, 이재필 옮김
(국지성 호우를 뚫고 나오며 2004/08/05 17:06)
오랜만에 다른 작품으로 읽어보는 도스또예프스키는 역시 정신없이 말을 쏟아붇는 열정의 반복이다. 같은 사람이 연출한 영화들 사이에도 어떤 공통된 분위기가 있는 것처럼 소설도 그런 느낌이 든다. 거진 10년만에 보는데도 그렇다. 고2 겨울방학에 읽은 까라마조프의 기억이 너무도 강렬했지만 대학에 들어가 읽은 『죄와 벌』, 『악령』에 대해선 별 기억이 없다. 전자에선 고리 대부업으로 살인적으로 기생하는 노파 살인의 정당화 대목이, 후자에선 주인공의 간질발작만이 기억난다. 그래도 내가 읽은 이 작품들에서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분위기를 짚어 본다면 그것은 병적이라고 할만한 열정과 의욕, 자괴감, 그리고 러시아 민족에 대한 애증의 감정이다.
분명 도스또예프스키는 러시아 민족 특유의 낙후성과 허술함,게으름을 비난하지만 그 비난의 근저에는 가히 폭발할 정도의 자긍심이 잠재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프랑스인과 독일인, 그리고 영국인은 하나의 민족을 대표하는 주자로 도스또예프스키에게 난도질당한다. 프랑스인은 빈틈없는 매너와 형식미로 러시아 여인네를 홀리는 우상으로 과시되지만 이런 우아함은 혁명의 유산으로 넘겨받은 빈껍데기일 뿐이다. 독일인은 후손을 위해 부의 축재만을 일삼을 뿐인 지루하고 단조로운 족속이다. 그나마 영국인은 침착하고 성실하긴 하지만 그렇게 먹통만은 아니다. 폴란드인은 하이에나적 근성으로 노름판의 푼돈이나 집어넣으려 서성대는 민족이다. 그렇다면 러시아 민족은? 러시아 민족만이 소유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적 문화를 그야말로 거침없이 즐길 수 있는 근성을 가졌다. 그 문화란 룰렛이다.
귀족의 신분으로서 외국을 오가며 방탕한 청춘을 보낸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작품이 눈요기나 헛소리에 그치지 않고 가치있는 기록으로 남을 만한 근거는 너무도 급작스러운 국면전환 때 일어나는 감정과 사고의 파고를 다분히 관조에 머물지 열광적으로 재현하는 작법에 있다. 늙으막에 대령으로 진급한 후 바로 예편한 장군과 장군 재산을 저당잡은 프랑스인, 장군의 상속여부을 보고 결혼을 하려는 블랑슈,,이들이 유산상속을 기대하며 병상에서 죽기만 고대했던 장군의 할머니가 건장하고 위풍당당하게 러시아로부터 이들이 있는 독일의 롤레텐부르크에 와서 도박판에 많은 재산을 걸어 이들을 갈팡지팡하게 만드는 사건, 주인공 알렉세이가 온몸을 던져 사랑했지만 콧방뀌만 뀌던 장군의 양녀 뽈리나가 집안의 혼란스러운 상항에서 알렉세이에게 마음을 열려고 하지만 그녀를 도와준답시고 도박판으로 직행한 채 그녀의 존재자체도 잊어버리고 도박에 함몰해 가는 주인공,,뭔가 다들 전염병이라고 할 만한 격정적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 거릴 때 영국인 미스터 에이슬리만이 냉정을 유지한 채 이 휘청대는 함선을 조정한다.
구경하러 모여드는 인파의 벽이 겹겹히 쌓여가고 계산은 잊어 버린채 무모하게 배팅을 하며 우연을 자신의 편으로 당겨가는 행운아에게 찬사가 쏟아지지만 판이 없이는 존재가치가 없는 돈은 그의 돈이 아니다. 짜릿한 전율로 위에서 아래로 몸을 찍는 승전의 환희를 잠시 그에게 안겨줬다가 썰물처럼 무참히 쓸려 가는 것이다.
(2004.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