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 대한 1차 탄핵 표결을 앞둔 현재까지 국힘의 당론은 다음과 같이 읽혀진다.
'탄핵만은 막아서 완전식물 대통령으로 놔두자. 대통령을 국정에서 사실상 배제하더라도 집권당 주도의 정국을 유지하자.'
그런데 개헌없이 이런 체제가 가능한가? 대통령의 부재를 대통령제 국가에서 개헌이나 선거없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 이리저리 헌법을 뜯어봐도 묘안이 있을까? 내란수괴 대통령을 여전히 모시려는 과반미달 당파가 처한 처절한 외통수다.
대통령의 2선 후퇴론은 현대판 상왕놀이에 다름없다. 현재 상황에서 급선무는 대통령이 자초한 비상사태를 정지시키기 위해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켜야 하는 것으로 그 방법은 탄핵이나 긴급체포, 하야 밖에 없다. 위험인자를 그대로 두고서 권력재편 논의가 가능하다고 볼 설득력은 전혀 없다.
이재명을 막기위한 시간끌기용 방탄정부 구상은 비상상황에 직면해 민의라는 국민주권이 발동하는 시점에서 사상누각이고 반헌법적이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이 중앙선관위를 털려고 한 시도 또한 소름끼친다. 그는 군을 이용해 국힘을 과반 이상의 다수당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법률가의 머릿속 정변은 나름 치밀했지만 6시간 3분을 넘어서지 못했다.
아내 앞에만 서면 한없이 약한 이 극악무도한 대통령에게 줄 수 있는 특혜가 무엇이 있을까? 끔찍히 아끼는 그의 아내와 함께 평생 감옥에서 해로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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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선거법 위반으로 야당 대표에 대한 1심 판결을 앞둔 상황에서 여전히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요구는 높아지고 있다. 심리적으로 이미 탄핵처분을 받았지만 그리도 집착하는 법적 명맥으로 정권 수호에 문제가 없다는 대통령의 발상 자체는 얼마나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무시하는지 보여주는 또다른 일례다. 정권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어떤 사고가 터질지 조마조마한 현 정권의 부패와 무능, 파렴치는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런 정권을 갈아치운 후에 어떤 대안이 있느냐는 회의와는 별개로, 오직 퇴진에 온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것은, 아무리 현정권이 그 원인제공자라고 해도 뭔가 석연치 않다. 거리로 쏟아져 나와 탄핵, 퇴진을 외치는 것이 일상화되는 것은 최후 보루로서의 국민적 저항의 무게감을 덜어내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법적 임기말까지 선거도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최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거대야당을 줄곧 무시하고 여당에는 군림하려는 대통령은 가히 이승만 정권 말기 이후 최악의 국정을 유지하고 있다. 탄핵을 외치는 국민적 저항을 역으려 이용해 강압적 모드로 국정을 장악하려는 수상한 기운도 보인다. 누구에게도 충성하지 않던 검찰총장은 이제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자기방식으로 대통령이라는 사실상 최고 권력의 법적 틀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한다. 그야말로 국민과의 전쟁도 불사할 수 있는 기세다.
지난 주 수요일 독일 신호등 연정의 붕괴 후 사회민주당의 총리가 연방선거를 최대한 미뤄서 치루려던 것에 반대해 거대야당이 신속한 조기 총선을 요구하는 상황이 나흘간 이어지다 결국 이 두 정당은 내년 2월 총선으로 합의점을 찾고 이때로 총선일정이 잡혀가는 추세다. 연정의 근거인 과반의석이 깨진 사회민주당의 총리가 무슨 꼼수를 부려 정권을 연장하려고 하는지 따위의 정략적 의심은 견고한 의회민주주의 체제에서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의회로부터의 대통령에 대한 견제가 작동하지 않는 한국에서 거리로 나설 수 밖에 없는 사정이다.
현재의 대통령을 있게 한 것은 물론 현재의 여당이지만, 한때 인연을 맺은 민주당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천운이든 악연이든, 오늘의 그는 없었을 것이다. 통 큰 정치력으로 야당에 손을 내미는 것만이 불행한 대통령으로 남지 않을 유일한 길이다.
광복절 논란이 한창인데 그 중심엔 상해임시정부를 어떻게 보느냐는 시각차가 있다. 식민지배국 일본의 입장에서 이건 테러리스트 집단일 뿐이다. 하지만 여타의 피식민지배 민족들과 같은 입장에서는 식민지배국과 전쟁도 불사하는 자치정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차후 국가로 된다면 이 자치정부는 의미가 없는 것인가? 국가가 헌법을 베껴오듯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가? 헌법은 민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외화되어 나오지 않는 한 선언된 것에 불과하다. 껍데기를 들고 외치는 소리다.
억압받는 민족에게는 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하나의 정당한 명분으로 일어난다. 달리 보면, 이런 억압이 사실상 없더라도 하나의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억압의 가설이 필요하기도 하다. 분명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런 명분론을 벗어난 야만성을 표출하는데, 그 장본인이자 책임자는 이스라엘 정권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명분론을 이 책임 당사자인 이스라엘 정권도 잘 이용한다는 점이고, 사실상 2023년 가을에 있었던 하마스의 도발은 그런 모의에 기폭제이자 확전으로 작용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전쟁명분은 말할 것도 없다.
건국한지 80년이 되어가는 한 국가의 실효적 영토 지배를 부정하는 것은, 더군다나 미국을 선두로 서방의 든든한 지원 하에 있는 국가에 대해서 그러기에는 현실성이 없다. 아무리 폭력적인 방식으로 국가나 정부, 정권의 기초가 놓여져 있다고 해도, 일단 세워진 질서를 인정하고 보는 것은 법적 관점에서의 오랜 관성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력적 방식 없이 국가가 세워진 경우는 희소했으며, 이런 이유로 폭력을 최소화하기 위한 협정과 조약과 같은 법적 제도가 발전되어온 측면도 있다. 물론 이런 법적 포장들은 언제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침탈행위로 찢어 질 수 있는 잠정적인 것에 불과할지라도.
발터 벤야민은 야만의 흔적, 승리자의 흔적이 없는 문화재란 없다라고 말하지만, 문화의 원천 소재인 삶의 지반이 파괴되고 있는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야만성은 삶의 현장 자체다. 고통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에게 그 아픔의 해소와 치유의 호소가 절실할 뿐, 외부자들에게는 알려진다고 해도 망각되기 쉬운 것은 냉정하고 슬픈 현실이기도 하지만, 무력한 개인들로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각자도생의 원칙에 충실할 수 밖에 없는 점도 있다. 오히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이야말로 극단적인 과대망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각자도생이란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개개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제하도록 힘쓴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의 도움에 전적으로 기대서는 안된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즉 도움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변적일 수 있고 우연적인 외부의 손길에 마냥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립적인 삶이란 불가능할 것이고 타인의 선의에 의해서만 삶이 지탱되는 것은 주체성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팔레스타인과 같은 경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지 않다. 자립의 기반이 붕괴된 곳에서 각자도생이란 말처럼 매정하고 냉혹한 말도 드물 것이다.
유럽, 특히 독일에는 아프리카와 근동에서 이주해온 수많은 외국인들이 있으며, 그들 중에는 시리아인들이나 우크라이나인들처럼 전쟁 때문에 피난해온 이들도 상당수다. 동양인 중에는 베트남인들의 독일 정착이 두드러지는데, 70년대 베트남 전쟁의 결과로 월남민들이 대거 이주한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인구의 정체 속에서 산업인력의 결손을 주로 EU 권역의 밖에서 온 이주민들이 채워나가면서 유럽공동체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율배반이다. 인도적 관점에서 이주민을 받아들여 이들의 정착을 돕고, 이후 이들이 유럽에서 세수를 감당하고 지역사회에 동화되어 자립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이것은 국가의 필요와 공동체의 기대에도 부응하는 일이다. 하지만 인도적 수용을 초과하는 이주민들의 유입은 경계할 일로 인식되며 이것은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는 극우정당에 대한 지지율로 나타난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문제는 또 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이스라엘의 이익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UN 결의안이 촉구하는 바처럼 팔레스타인이 국가로 인정되어 안정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가 수립된다면 당장 난민의 문제로 유럽에 부가될 부담을 사전 차단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80년간 지속되어온 근동의 불안을 원천적으로 안정화시킬 수 있는 조치이기도 하다. 사실상 중동의 불안한 정세의 근본 발단은 이스라엘의 영토국가 성립에 있으며, 이로부터 비롯된 문제들이 근동의 다양한 정세와 맞물려 오늘날과 같은 파국과 난민을 양산하는 결과에 이르렀다.
며칠 전 유트브에서 '구르는 수레바퀴'(2020)라는 영화에 관한 소개영상을 봤다. 다소 코믹하긴 하지만, 불교 승려들의 일상사에 관해 이런 정도로 리얼하게 그린 영화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한국불교계에서 수도승들의 전승은 가히 변화무쌍한 역사와 무관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온 면모가 있다. 동아시아에 보편적이면서도 특유한 종교문화일 수 있지만, 일단 한국만 놓고 보면 군대적 질서와 사회주의적 생활구조, 달리말해 무위적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은 승려집단의 생활사는 거의 흐트러짐없이 천오백년 이상 이어져 온 것이다.
종교의 색채만 걷어서 오직 승려의 생활사, 삶 자체를 보면 여러가지 귀감이 있다. 어떤 미래적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할까? 정신의 고도화를 놓치 않으면서 현실의 욕망에 끌려 당하기 보다는 타고 넘어가는 기지는 인도인이 추구하던 명상과 유희의 삶에 근접하지 않을까?
노동의 일부는 기계에 맡기더라도 노동에의 참여가 보장되는 일터에서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는 전인의 삶에 '들어오라'라고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유적 인간, 연대를 놓지 않는 인간의 몫이자 의무, 약속, 새로운 사회계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