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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받는 민족에게는 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 하나의 정당한 명분으로 일어난다. 달리 보면, 이런 억압이 사실상 없더라도 하나의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억압의 가설이 필요하기도 하다. 분명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런 명분론을 벗어난 야만성을 표출하는데, 그 장본인이자 책임자는 이스라엘 정권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명분론을 이 책임 당사자인 이스라엘 정권도 잘 이용한다는 점이고, 사실상 2023년 가을에 있었던 하마스의 도발은 그런 모의에 기폭제이자 확전으로 작용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푸틴의 전쟁명분은 말할 것도 없다.

건국한지 80년이 되어가는 한 국가의 실효적 영토 지배를 부정하는 것은, 더군다나 미국을 선두로 서방의 든든한 지원 하에 있는 국가에 대해서 그러기에는 현실성이 없다. 아무리 폭력적인 방식으로 국가나 정부, 정권의 기초가 놓여져 있다고 해도, 일단 세워진 질서를 인정하고 보는 것은 법적 관점에서의 오랜 관성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력적 방식 없이 국가가 세워진 경우는 희소했으며, 이런 이유로 폭력을 최소화하기 위한 협정과 조약과 같은 법적 제도가 발전되어온 측면도 있다. 물론 이런 법적 포장들은 언제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침탈행위로 찢어 질 수 있는 잠정적인 것에 불과할지라도.

발터 벤야민은 야만의 흔적, 승리자의 흔적이 없는 문화재란 없다라고 말하지만, 문화의 원천 소재인 삶의 지반이 파괴되고 있는 사건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야만성은 삶의 현장 자체다. 고통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에게 그 아픔의 해소와 치유의 호소가 절실할 뿐, 외부자들에게는 알려진다고 해도 망각되기 쉬운 것은 냉정하고 슬픈 현실이기도 하지만, 무력한 개인들로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각자도생의 원칙에 충실할 수 밖에 없는 점도 있다. 오히려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일념이야말로 극단적인 과대망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각자도생이란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개개인들이 알아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구제하도록 힘쓴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타인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의 도움에 전적으로 기대서는 안된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즉 도움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가변적일 수 있고 우연적인 외부의 손길에 마냥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립적인 삶이란 불가능할  것이고 타인의 선의에 의해서만 삶이 지탱되는 것은 주체성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팔레스타인과 같은 경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하지 않다. 자립의 기반이 붕괴된 곳에서 각자도생이란 말처럼 매정하고 냉혹한 말도 드물 것이다.  

유럽, 특히 독일에는 아프리카와 근동에서 이주해온 수많은 외국인들이 있으며, 그들 중에는 시리아인들이나 우크라이나인들처럼 전쟁 때문에 피난해온 이들도 상당수다. 동양인 중에는 베트남인들의 독일 정착이 두드러지는데, 70년대 베트남 전쟁의 결과로 월남민들이 대거 이주한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인구의 정체 속에서 산업인력의 결손을 주로 EU 권역의 밖에서 온 이들이 채워나가면서 유럽공동체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율배반이다. 인도적 관점에서 이주민을 받아들여 이들의 정착을 돕고, 이후 이들이 유럽에서 세수를 감당하고 지역사회에 동화되어 자립적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이것은 국가의 필요와 공동체의 기대에도 부응하는 일이다. 하지만 인도적 수용을 초과하는 이주민들의 유입은 경계할 일로 인식되며 이것은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는 극우정당에 대한 지지율로 나타난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문제는 또 하나의 부담으로 작용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이스라엘의 이익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UN 결의안이 촉구하는 바처럼 팔레스타인이 국가로 인정되어 안정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가 수립된다면 당장 난민의 문제로 유럽에 부가될 부담을 사전 차단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80년간 지속되어온 근동의 불안을 원천적으로 안정화시킬 수 있는 조치이기도 하다. 사실상 중동의 불안한 정세의 근본 발단은 이스라엘의 영토국가 성립에 있으며, 이로부터 비롯된 문제들이 근동의 다양한 정세와 맞물려 오늘날과 같은 파국과 난민을 양산하는 결과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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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 구르거나 그 밑에서

주장 Behauptung 2024. 3. 14. 05:2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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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유트브에서 '구르는 수레바퀴'(2020)라는 영화에 관한 소개영상을 봤다. 다소 코믹하긴 하지만, 불교 승려들의 일상사에 관해 이런 정도로 리얼하게 그린 영화가 있을까 싶을 정도의 느낌을 받았다. 한국불교계에서 수도승들의 전승은 가히 변화무쌍한 역사와 무관할 정도로 잘 보존되어온 면모가 있다. 동아시아에 보편적이면서도 특유한 종교문화일 수 있지만, 일단 한국만 놓고 보면 군대적 질서와 사회주의적 생활구조, 달리말해 무위적 삶의 방식으로 자리잡은 승려집단의 생활사는 거의 흐트러짐없이 천오백년 이상 이어져 온 것이다.

종교의 색채만 걷어서 오직 승려의 생활사, 삶 자체를 보면 여러가지 귀감이 있다. 어떤 미래적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할까? 정신의 고도화를 놓치 않으면서 현실의 욕망에 끌려 당하기 보다는 타고 넘어가는 기지는 인도인이 추구하던 명상과 유희의 삶에 근접하지 않을까?

노동의 일부는 기계에 맡기더라도 노동에의 참여가 보장되는 일터에서 자신의 개성을 잃지 않는 전인의 삶에 '들어오라'라고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유적 인간, 연대를 놓지 않는 인간의 몫이자 의무, 약속, 새로운 사회계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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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비평5 : 헌법 1조 1항

주장 Behauptung 2023. 7. 24. 05:4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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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국이란 무엇인가?

국정농단으로 몰락하던 박근혜 정권에 대한 탄핵시위대의 전면에서 행진하던 방송차가 불빛 탄환으로 퍼부었던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 1조 1항과 2항을 선전하는 노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조항을 탈취하고 전유함으로써 최고권력을 잡은 것은 능수능란한 정치적 사법기관이었다. 마치 4-19혁명의 성과를 정치적 군부가 가져갔듯이 말이다.

공통적으로 그들은 권력에 집중하는 근성에 철저했다. 권력을 향한 비상한 수와 열망은 정치를 업으로 삼는 집단에겐 필수불가결한 동력일지 모르나 권력의 목적, 그러니까 쟁취한 권력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 계획과 비전이 모호한 것은 권력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려는 것으로 의심받기 충분하다. 박정희 군부는 가난에서 벗어나자는 구호적 명분으로 모든 것을 억압할 수 있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가용한 수단은 모두 동원되었다. 계엄령과 위수령 따위의 민간에 대한 숱한 군사조치들은 말할것 없고 파독 광부와 월남파병에서부터 정적 제거와 납치, 나아가 종신 집권을 위한 헌법개정까지. 목적의 정당성이 그 수단의 부당성으로 무너지는데는 18년이 걸렸다. 사업이 잘 되기 위해 사업의 종사자들을 혹독히 착취하는 악덕 업주의 사업논리는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고전적 사업 비법이기도 하다. 일인의  희생이 만인을 구원의 길에 올렸다는 복음서의 기조와 정반대로 만인의 희생 위에 국가와 기업의 번성을 위한 토대가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유신헌법 개정에 대한 압도적 지지율에서 보듯 기꺼이 억압을 수용하는 대중적 기세는 이른바 보수정권의 든든한 기반이기도 하다.  이것은 오늘의 저 기생적인 괴물정권이 태동한 토양이기도 하다.

나선형으로 인류사는 진보하다는 헤겔의 역사관은 방향성은 진보이지만 과거사의 누적과 과거로의 퇴보를 함축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기도 하다. 이래서 헤겔 좌파와 헤겔 우파가 등장했던 것인지 모르지만, 사실 아무리 보수적인 지향을 지닌 사람이라도 변화와 발전을 못마땅하게 여길 지언정 이를 뒤늦게라도 수용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박물관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변화의 속도에 대한 인정의 시점이다. 빠른 인정은 급진적이고 방어적 인정은 중도적이며 폐쇄적 인정은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현정권은 마치 캐비넷에서 자신의 존립과 생존을 위해 적시적절한 서류를 언제든 뽑아내는 검찰의 전능처럼, 권력의 창출을 위해 이른바 진보와 보수 사이의 줄타기에서 성공했다. 국정농단의 혜택을 본 이른 바 진보정권을 등에 업고 있다 가차없이 숙주를 베어버리고 보수로 갈아탔다. 하지만 권력의 유지를 위해 언제까지 보수에만 기댈 수 없다. 적절한 시점에서 숙주를 교체해야 한다. 즉 그들은 진보도 보수도 중도도 아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옷을 갈아입을 뿐이다.

헌법 1조 1항의 의미는 헌법 1조 2항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민주공화국이란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국가라고. 주권이 왕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는 점에서 군주국이 아니라 공화국이지만, 천황의 지위는 일본국민의 총의로부터 나온다는 일본헌법 1조도 주권제민에 근거해 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헌법 1조와 유사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사정은 그렇다 치고, 일본헌법 1조는 권력의 이동방향을, 비록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더라도 천황에게로 명시한 점에서 보다 솔직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권력의 이동방향을 명시하지 않은 채 권력의 근원만을 밝히는 민주공화국은 어느 누구에게로 권력의 총의가 흘러가는지 알 수 없는 카오스에 직면한다. 얼마든지 합법적이고 기술적으로 조작가능한 여론조사의 영향을 받는 투표율은 악마같은 집단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의회 무장침탈을 선동했어도 재선에 당당히 도전하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만 봐도 그렇다. 이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어두운 면일 수도 있지만, 민주공화국의 의미가 아직 제대로 밝혀 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실천적인 의미에서.

끊임없는 실천의 결과로도 헌법의 완성은 요원한 일이라고 하버마스는 말한다. 민주공화국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참고로 루만은 민주주의란 상위의 권력이 하위의 권력에 예속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율배반적인 권력관으로 보이지만, 권력들 간의 견제를 암시한다. 그런데 국민에게 권력과 관련되어 투표권 외에 도대체 무슨 권력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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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비평4 : 부동산 불패의 신화

주장 Behauptung 2021. 8. 25. 21:0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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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이 더이상 주거의 용도가 아니라 투자의 용도로 전락한 상황에서 향후 부동산 시장을 전망한다는 것은 주가를 전망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됐다. 왜 그런가? 우선 너무 많은 투자가 몰려 있다.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투자시장은 보호되어야 할 소지의 것이다. 정상적인 주택은 사실 100년도 갈 수 있다. 저출산만 놓고 봤을 때 100년 후에 한국의 인구는 1500만으로 축소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사이에 집값이 폭락하고 집이 남아 돌까?

수도권 중심으로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교통이 집중된 상황에 더해 역시 수도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전국적 교통망의 발전 만으로도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부동산 상승세는 멈출 수 없는 폭주기관차같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집값이 상승할 것인가의 문제다. 현재로서도 집값은 상식 밖의 수준으로 치솟은 상태인데 미래세대의 경우 한정된 소득으로 집을 산다는 것 자체가 로또 당첨처럼 희귀한 일이 되버릴 가능성마저 보인다.

어쩌면 부동산이 이렇게 흘러 버리고 만 것은 생활권역의 서울 집중화와 아울러 주거라는 인간의 기본적 생활양식이 시장, 그것도 이름난 대기업들이 주도하는 주택시장에 맡겨 버린 결과이기도 하며, 부동산이 세대간 유용한 약탈의 도구로 활용된 귀결이기도 하다. 마치 환율약탈로 저개발 국가를 저값에 관광하던 시절처럼.

정치업자는 물론 국가마저 부동산 시장의 폭등에 수입을 챙기는 마당에 부동산불패의 신화는 견고하다. 어떤 우발적 사건, 즉 폭락의 조짐에 물샐 틈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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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는 책이 한창 회자되는 시절, 이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직장후배가 나에게 삼성이 망하면 한국도 망하지 않냐는 식의 질문을 내게 했다. 그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대답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근거는 없어도 확신 있는 답변이었는데, 왜냐하면 이렇게 구리고 저질인 기업은 망해도 싸다는 분노감 이외의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내 재계 1위이며 세계적인 이 기업은 이미 경제력에서 국가를 압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캠퍼스라고 명명한 반도체 공장들이 들어선 도시들은 삼성의 도시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도시를 변화시키고 있다. 수원, 화성, 평택, 그리고 천안까지 코로나 위기와 겹쳐 산업의 원천 소재로 급상승한 반도체 수요 때문에도 이런 공장들은 국가 기간 산업 시설로 모셔지고 있는 상태이며 삼성전자의 주식은 국민주가 됐다. 

반도체 자체의 필요성에 대해서 뭐라 할 말은 없다. 불가피한 산업의 방향이고 되돌릴 수 없는 기술의 길이다. 하지만 서울의 삼성동이 복제하듯 아래 도시들로 퍼져나가는 현상은 뭔가 이상하다. 이것이 불만이면 삼성의 반도체 공장이 해외로 이전하면 어쩔 것이냐는 엄포가 벌써 들려온다. 글로벌한 기업이 글로벌하게 나가는 것이 맞다면, 그 기업의 운영방식도 글로벌하게 되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재용을 사면하라는 구호들은 전혀 글로벌하지 않다. 첨단의 산업으로 무장한 세계적 기업이지만 그 핵심 가치이자 이익관심은 북조선 정권과 마찬가지로 세습의 정통성이다.

일자리를 찾아 삼성의 도시들로 몰리는 사람들, 세수의 활로를 열어주는 삼성의 입성을 환영하는 지자체들에게 삼성은 구세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돈으로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듯이, 돈이라는 가치 외에 다른 것이 없는 이 기업을 개인들도 지자체들도 일단 이용하고 보자는 현실적인 욕구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어쩌면 삼성공화국이 만들어내는 도시들의 모습은 기술적으로 획일화된 미래사회의 단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상은 왕국인 이 새로운 계급질서 속에서 복종을 내재화시키는 신(新)고전주의적 통제사회의 전형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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