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이라고?
그런데 그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그 나라를 찾을 수 없다.
독일인들이여,
그대들은 차라리 민족으로 결집되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헛된 일이라네.
그대들은 차라리 더 자유로운 인간으로 발전하기를....
(괴테와 실러의 풍자시 Xenien 중)
"만약 우리가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면...어떻게 저항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정말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 봅시다...우리의 저항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국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물질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군인은 전투를 거부해야 하고, 예비군은 복무하기를 거부해야 하고, 노동자는 무기를 배나 항공기에 선적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룬다티 로이, <9월이여,오라> 중
로이가 제시한 이러한 행동지침은 작년 촛불집회 때 나온 여러 행동강령을 연상시킨다. 조선일보에 광고를 내는 광고주 불매운동, 미쇠고기 운송 차량 저지, 한 의경의 양심고백..결국 보잘것 없는 초라한 패분만 남았지만, 도대체 이렇게도 하지 않고 어떻게 이 반이성적인 정권과 세계화의 패권에 맞설 수 있나? 실정법은 인민의 의사가 주체적으로 반영되어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특수 맥락에서 정초되어 인민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진 법이다. 이것이 만들어지고 집행되는 과정에 대해 정작 그 법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 이들은 소외되어 있다. 한 개인의 거친 양심과, 이에 대한 공감과 집단적 실천이 반란을 혁명으로 이끌어 올린다. 부당한 법의 행사를 거부한 이들을 종국적으로 철창에 보내려 한다면, 집단적으로 10만의 인민이 동시에 이 법의 행사를 거부해 버리면 법은 무력화된다. 연 30만명에 이르는 입대자 중의 1/3이 집총거부를 한다면, 이들을 과연 영창으로 보낼수 있을까? 법이 바뀔 것이다.
현재 진행중에 있는 <순수이성비판> 독해를 이중으로 다시 시작하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2/3정도 나간 독해를 그대로 진행하면서 처음부터 다시 읽는 것이다. 번역본으로만 본다면 순서대로 죽 나가는게 좋지만 원서를 중심으로 읽으려 하다보니 속도가 더뎌 이런 방법을 쓴다. 서론, 선험적 분석론(요소론과 변증론), 선험적 방법론의 논의가 너무도 복잡스러워서 삼중 사중의 독해로 파고 들어가는 방법도 괜찮을 것 같다. 마치 철벽의 요새를 사방에서 공격하는 것처럼.
머릿말에서 당대 형이상학의 격추된 위상을 말하면서 칸트는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중 트로이왕의 아내 헤쿠바(Hecuba)를 인용한다. 그러고 보면 <순수이성비판>도 마르크스의 <자본 : 정치경제학비판>처럼 건조한 서술로만 진행되지 않는다.
modo maxima rerum, tot generis natisque potens-nunc trahor exul, inops. - Ovid. Metam.
eben noch die Allerhöchste, mächtig durch so viel Schwiegersöhne und Kinder...werde ich jetzt, verstoßen und hilflos, hinweggeführt. - Übersetzung des Herausgebers.
그래도 한때는 많은 사위들과 손주들 덕에 최고의 지위에서 권력을 누렸는데, 이제 버림받고 의지할 데 없이 이리 저리 끌려다니는구나.
아고라에 전여옥 의원의 증상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사의 진단이 있었다고 하는데...
"전 의원은 폭행으로 인해 경추염좌(목이 삔거고)
몸 전체 다발성 찰과상,(몸 전체가 긁혔다는거고)
두뇌타박상, 뇌진탕(이건 의사소견상 나타나는 증상일 수 있지만 이 사람의 평상시
행동을 참고해 보면 선천적인 질병일 수도 있지 않은가 보고요)
왼쪽 눈 각막 손상(눈 비비다가도 각막손상은 흔히 됩니다)..."
다른 건 몰라도 경추염좌는 유독 기억납니다. 경추염좌..교통사고 중 뒤차로부터 추돌당했을 때 흔히 나오는 진단..나도 이거 2번 받았는데 피곤하면 가끔 목이 뻐근해 지는게 그때의 충격이 되돌아오는 느낌..나이들어 그런 것일 수도 있겠고..업무의 피로와 짜증이 머리를 압박하는데서 오는 현상일 수도 있고..생각의 무게를 떠받치는 목뼈의 노고일 수도 있겠고,,그런데 전여사는 가벼운 몸싸움을 몸소 하고서 온갖 합병증세를 보이니..오버 구라 캡숑 우리 전여사!!
11월 27일자 경향신문에 건설-부동산 관리를 하는 데이비스랭드앤씨아의 대표 이문수 씨의 인터뷰가 실렸다. 요지는 현재 건설사가 독점하다시피 도맡은 기획,개발,건축,시공,감리,시행의 전과정을 각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분담해서 맡는 전환이 필요하며, 주택사업은 고급화와 범용화가 병행되야 한다는 것이다. 범용화란 선진국처럼 주택을 이용하는 대다수 계층의 부담을 완화시키도록 공공임대주택사업을 확장하는 것이다. 최소 30%인 선진국의 공공임대주택 비율에 비해 한국은 고작 2%만이 공공임대주택이며, 하물며 이런 미미한 임대주택에 대해선 편협한 시각이 강해 기피대상으로 낙인된다. 고급화란 돈많은 건축주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건축물의 실용도 뿐만 아니라 설계자의 미학적 감각도 활용해 건축물을 그냥 건물이 아니라 작품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건설사업을 더많은 이익을 내는 투기적 목적으로 내달렸던 건설사의 시대를 접고 그야말로 공공성과 실용성, 예술성을 갖춘 사업으로 변모시키자는 얘기인데, 어떻게 보면 극단의 두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관점으로도 보이지만,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의 바탕인 집문제의 해결없이 고급스러움만을 쫒는 건축은 마치 모래밭에 쌓은 구조물과 마찬가지로 아찔한 것이다. 100만채의 집이 남아도는데 841만명이 무주택자라는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택시장의 왜곡과 과잉 뿐만 아니라 수도권 집중현상도 살펴 봐야 한다.
예전에 어느 대기업 건설사의 광고에 이런 것이 있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값비싼 아파트에서 사는 이들의 자부심을 높여주는 문구지만, 집없는 사람들도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는 문구로 변경은 안되는가? 한쪽에서는 휘황찬란한 주택이 하늘로 솟구치고, 이것을 침흘리며 바라보는 홈리스들이 시궁창같은 주거지로 몰리는 한, 이들에게 한국은 시궁창같은 국가이면서 '너희들의 국가'이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자유란 악마의 선물이며, 그런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범죄다. 어떤 사회의 현재 상태가 소위 이상적인 '문명사회'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알고 싶다면, 사회의 약자들이 어떤 처지인가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