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글을 시작하기 전에 양해를 구한다. 전달에 나는 Pre-Capital이라는 구도로 경제사에서 『자본론』이전의 주요 문헌을 검토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때 글을 쓰면서 나는 아직 로버트 하일브로너의 『세속의 철학자들 : 위대한 경제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읽지 않은 상태였다. 현재 이 책을 다 읽은 상태에서 예전에 밝힌 대로, 이 책에 근거해『자본론』이전의 주요 경제사상의 흐름만을 파악하려 한다면-물론 이 작업만도 어마어마한 작업이지만-11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단 3개 장만 다루는 결과가 되고 만다. 이 글의 성격이 논문이 아니라 책에 대한 소개와 비평을 담는 서평이라는 엄밀한 규정이 유효하다면, 단 3개 장만 다루는 것은 스스로 불충분한 서평을 만드는 꼴이 된다. 이런 일은 미리 책을 읽지 않은 불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전달에 밝힌 데로 일종의 동시진행형 서평의 취지에서는 크게 위배되지는 않은 셈이다(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당신’의 답신이 없는 상태에서 동시진행이 되고 있는지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일단 이 책 전체를 서평으로 다룬다는 방침을 세우고 글을 전개할 것이고, 이런 전개로 당초 의도한 Pre-Capital을 넘어서 Post-Capital로까지 치닫는 모험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서평에 충실하고 싶은 필자의 바람임을 인지해 주시고, 너른 양해와 혜량을 부탁드린다.
2.낙원의 붕괴
아담 스미스를 다룬 전 달의 글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경제학의 아버지인 스미스를 애증의 관계로 몰고가는 후예들을 이번 달에 만나보자고 했었다. 왜 애증인가? 한편으로 스미스는 물질적 생활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경제학을 역사의 궤도에 올린 점에서 그 후예들에게 강력한 귀감의 원천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미스가 낙관적으로 그렸던 장미빛 시장질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후예들의 예리한 비판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맬서스는 식량생산을 초과하는 과도한 인구문제로, 리카도는 지주계급만 배불리는 왜곡된 경제성장의 문제로, 밀을 비롯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증대하는 인민의 빈곤과 무지의 문제로, 마르크스는 인민의 빈곤에 더해 자본주의의 붕괴가능성의 예측으로, 베블린은 경제 과정을 일종의 약탈적 투기로 그리는 외계인적 관찰로, 스미스가 찬란하게 그렸던 자연적 성장의 시장 질서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분업의 방식으로 인류가 전에 없던 풍요를 골고루 누리는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국부론』의 아름다운 소묘를 살펴 보자.
“잘 다스려진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부유가 민중의 최하층계급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은 분업의 결과로서 생긴 여러 가지의 기술에 의해서 생산물이 매우 증진하였기 때문이다...우리들은 수천 명의 인간의 조력과 협업이 없이는 문명국에 있어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가 단순 용이하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보통의 가재도구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우리들이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것은 푸주, 술집 또는 빵집의 박애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인 것이다.”1)
이러한 분업에 대한 예찬은 유명한 핀 제조의 예에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나사만을 돌리는데 미쳐버리는 찰리 채플린을 볼 때, 유사한 이 장면들은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공장에서 나사만을 조이는 일에는 인간의 기계화와 노동의 소외 외에도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다. 그것은 생산의 과잉이다. 즉, 분업에 의한 생산력 증대로 풍요로워진 상품들이 팔리지 않는다면, 분업의 효과는 제로인 셈이다. 이것을 마르크스 식으로 표현하면, 상품이 화폐와 교환될 수 없다면, 이 상품은 교화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용가치 마저도 상실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이렇듯 상품이 화폐와 교환되지 않을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신용으로서, 이는 정해진 미래의 어떤 시기에 완료시킬 것이라고 인정된 결제의 지연이다.2) 신용거래계약은 미래완료형태의 보증서로서 자본주의 상품관계의 성장과 몰락을 설명하는 양면의 동전이다. 현재 미국발 증시악재의 원인으로 지목된 비우량주택담보대출(Sub Prime Mortgage)은 이러한 신용의 위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집값 하락과 금리 상승으로 비우량 고객들의 주택담보대출이 제대로 회수되지 않자 대부업체의 파산으로 악재의 시공 테이프가 끊어졌다. 이 부동산을 매각하려 해도, 매각대금이 대출금과 이자에 밑돈다면 이 채권은 부실채권이 된다. 이것은 과열된 한국의 부동산 시장에 대한 반면교사다. 고액 대출로 사들인 집들이 높은 대출 이자율을 상쇄하고 남을 차액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미래에 완료되기로 약정된 결제는 완료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용의 위기가 초래하는 처참한 도미노 붕괴를 막기위한 처방은 무엇인가? 여기서 예외 없이 웃통을 벗고 국가가 등장한다.
3.국가의 개입
경제의 조정자로서 국가의 개입을 본격적으로 인식한 경제학자로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조지프 알로이스 슘페터가 두드러진다. 경제학자이자 금융인, 통상 외교관으로도 활약했던 케인스는 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승전국인 영국의 경제 참모로 평화회담에 참여했다. 이는 말이 평화회담이지 독일을 철저하게 붕괴시키려는 카르타고식 평화3)일 뿐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독일민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 가져오는 역효과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한 지배 국가가 다른 피지배 국가를, 또는 국가가 인민을 약탈만 한다면 이 국가는 존속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국가는 인민에게 재분배를 해주어야 인민으로부터 수탈할 꺼리가 생기며, 이런 교환관계가 구축되어야 국가는 안정적으로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수탈과 피수탈의 지속적 관계는 약탈-재분배가 호수적 교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4) 물론, 케인스가 국가를 가라타니 고진처럼 이런 식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굶주린 인민의 ‘광기’를 두려워했을 뿐이다.
“인간이 항상 조용히 죽는 것만은 아니다. 굶주림을 당하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과 절망에 빠지지만 어떤 사람들은 신경불안의 히스테리와 광적인 절망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곤궁에 처한 사람들은 현재 남아 있는 사회조직을 전복시키고, 각자의 거스를 수 없는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문명 자체를 수장시킬 수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과 용기와 이상주의를 모아 대항해야 하는 위험이다.”5)
그러나 케인스를 근본적으로 괴롭힌 것은 단지 굶주림의 문제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맬서스가 어렴풋이 인식했듯이, 저축이 전반적 과잉을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에 케인스는 정면으로 다가섰다. 임금, 지대, 이자 등 모든 소득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소득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경제의 끊임없는 재생산은 화폐가 주머니에서 주머니로 끊임없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저축이나 투자로 화폐의 진행이 동결되면 화폐소득의 감소가 일어난다. 물론 저축이나 투자는 더 많은 소득의 발생을 목적으로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투자의 목적이 자동적으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즉 저축과 투자는 정확히 투입-산출을 맞출 수 없어 언제든 서로 어긋날 수 있는 시소게임을 하는 것이다. 늘어나는 저축에 비해 투자가 적을 수 있고 늘어날 투자에 보태기에 저축이 적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저축과 투자에도 수요공급의 원리를 적용한 금융시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저축이 넘칠 때는 금리가 폭락해 투자유인을 낮추고, 저축이 모자랄 때는 금리가 상승해 투자유인을 높일 수 있는 경기순환의 자동안정장치를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이런 자동안정장치는 1929년 대공황 때 작동하지 않았다. 금리의 계속적 하락에도 불구하고 회복불가능했다. 구매력은 떨어지는데 실업마저 늘어나 저축은 바닥나고 투자는 위축됐다. 투자가 있더라도 투자는 쉽게 포만감을 느낄 수 있어, 중단 없이 대체 투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경제활동은 수축된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국가의 전반적 구매력을 높여서 경기활성화를 자극하는 ‘펌프에 마중물 붓기’(priming the pump)이다. 이것은 취로사업을 시작으로 대규모 건설사업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케인스가 제안해 시행된 대안은 아니고 루스벨트에 의해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정책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기업이 확장할 수 없다면 대규모 정부지출을 감행해서라도 국가가 불황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처방은 적어도, 실업자들을 구제함으로써 불황의 더미에서 구매력을 끌어내 소비를 자극한 점에서 성공적이었다.6)이런 설명은, 신자유주의의 주도적 이념인 시장의 자생적 질서라는 생각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보여준다.
슘페터 역시 불황이 발생했을 때 사회적 긴장완화로 정부지출이 필요할 수 있다는데 동의했지만, 호경기와 불경기의 교차 속에서도 자본주의의 꾸준한 성장이라는 견인차를 놓지 않았던 케인스와 달리 장기적 전망에서 슘페터는 정반대의 의견을 끌어냈다. 슘페터는 혁신적 기업가가 없다면 자본주의가 정체에 빠져, 변화 없는 반복으로 생산에 기여한 비용 이상의 모든 수입이 사라진다고 봤다. 스미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윤의 원천은 노동이나 노동의 착취, 자본의 절제로 설명되어 왔으나 슘페터는 이윤을 정태적 경제라는 순환적 흐름에서 벗어날 때 성립하는 것으로 봤다.7)그렇다면 정태적 흐름의 경제에서 왜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것인가?
“처음의 개선은 전 산업으로 퍼져 나가고 분별없는 은행대출과 투자지출의 홍수가 호경기를 가져온다. 그러나 바로 이 일반화의 결과, 격차의 우위가 없어지게 된다. 경쟁으로 인해 가격은 새로운 생산비 수준으로 내려가도록 강요당한다. 이윤이 감소함에 따라 투자도 감퇴한다.”8)
따라서 끊임없이 생산요소를 창조적 방식으로 결합시켜서 잉여를 창출하는 혁신가 없이는 자본주의는 연명할 수 없다. 즉, ‘그럴듯한 자본주의’라도 가능하려면 혁신가의 지혜가 필요하지만, 슘페터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에 어둠의 그림자를 던진다. 혁신은 결국 관행화되고 자본이 구사했던 이성의 칼날은 이제 자신에게 겨눠진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지성의 힘이 결국 이 체제의 한계를 넘어 온화한 관료적 계획경제로 나아감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다른 수많은 기관의 도덕적 권위를 파괴한 후에 결국에는 자신을 겨냥하는 비판적 정신구조를 창조한다. 부르주아는 합리주의적 태도가 교황과 왕의 신임장 앞에서 멈추지 않고 사유재산과 부르주아적 가치의 전체 일람표 체계를 공격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보고 놀란다.”9)
4.다시 고전파에로
다시 우리가 이번 달에 만나려 했던 고전파의 두 계승자에게로 가보자. 앞서서 말했듯이 동시대인이자 친구인 맬서스와 리카도는 스미스의 경제학을 계승하면서도 그를 비판해 새로운 경제이론을 제시했다. 그런데 맬서스의 경우는 다소 곤혹스러운 위치에 있다. 역사상 그의 『인구론』만큼 파괴적 영향력을 미치면서도 가장 혹독하게 비판받은 작품도 드물겠지만, 이런 논란의 와중에도 불구하고 경제사에서 맬서스의 업적은 리카도가 그의 인구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했다는 사실과 저축이 전반적 과잉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의혹을 맬서스가 던진 점 외에는 별로 없다. 오늘날 인구학의 분야에서 분명히 맬서스의 『인구론』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현재 중국이 시행하고 있는 강력한 인구통제 정책에 분명히 기여한 점은 있지만, 현재의 인구학은 장기적으로 세계의 인구가 증대 보다는 정체상태로 접어들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10) 더군다나 맬서스의 인구론이 가진 치명적 한계는 이미 당대에 제기됐다. 그의 인구통계 자료가 당시 대규모 이민으로 인구가 25년마다 증가세를 보인 미국을 대상으로 한 점, 영국에서 곡물법의 폐지 이후 인구가 국가의 자원을 고갈시킬 정도로 증가하지 않은 점을 들 수 있다.
이제 눈을 돌려, 맬서스의 인구론을 수용해 지대이론을 펼친 리카도를 주목하자. 리카도가 지대이론을 펼친 사회적 배경에는 19세기 초 산업화에 따라 급격한 변화를 겪은 영국의 국내상황이 있다. 당시 곡물법의 영향으로 외국산 농산물의 수입이 금지되자 영국 내 곡물가격이 치솟았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늘어난 생계비로 인해 임금상승의 압박을 받게된 자본가들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맬서스의 저주어린 예고대로-사실 예고라기 보다는 현상의 관찰이었다-산업화에 따라 영국 인구는 증가했고, 당연히 곡물수요가 공급을 앞지르자 부셀당 소맥 가격이 4배로 치솟았고, 가격 인상에 따른 이윤은 지주에게 돌아갔다. 1846년 마침내 30년 만에 곡물법이 폐지되고 값싼 외국산 농산물이 들여오기까지 자본가 편에 가담한 리카도는 지주에 대한 전면전을 펼치기 위한 교범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였다. 제 2장의 지대론을 보는 것으로 그의 지대이론을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
“지대의 상승은 언제나 그 나라의 체증하는 부의 결과이며 그 증가한 인구에 대해 양식을 제공하는 어려움의 결과이다...지대는 이용할 수 있는 토지의 생산력이 감소함에 따라 가장 급속히 증가한다...(이하는 리카도의 각주) 스미스 박사는 지대의 재생산이 사회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길게 설명하느라고, 지대가 높은 가격의 결과이며, 지주가 이 방식으로 취득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희생 위에서 얻는 것임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지대의 재생산에 의해서 사회에 절대적 이득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희생 위에서 이익을 보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11)
여기서 희생되는 계급은 노동자와 자본가이고 득을 보는 계급은 지주이다. 지대를 구성하는 것은 생산적인 자본과 비생산적인 자본 사이의 차이에 의존한다. 여기서 자본이란 그 비옥도가 상이한 고정자본으로서 토지를 지시한다. 따라서 토지의 불균등 상태에 따라 초래되는 차액이 지대를 인상시키는 요인이 된다. 즉 지대는, 모든 토지의 생산성이 동일하지 않다는 근거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이 생산성의 현격한 격차가 지대의 상승을 유발한다. 그런데, 지대로 발생하는 소득은 토지의 힘에서 나오는 불로소득인데 반해, 노동자는 혹독하게 일을 해야 임금을 받고, 자본가는 사업이라는 ‘쇼’를 해야 이윤을 얻는다12)는 사실에 리카도를 포함한 자본가 진영은 분노했다.
이상과 같은 리카도의 지대론은 헨리 조지의 지대론에 대한 이론적 토대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제학에서 부각시켜야 할 리카도의 기여는 이것만은 아니다. 맬서스와 더불어 그는 엄습하는 시대의 먹구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산업의 전반적 과잉의 조짐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처하기 위해 리카도가 경제학에 도입한 무기는 강력한 추상이라는 수학적 모형이었다. 그러나 이런 무기는 그의 사후 100년이 지나서야 프랜시스 이시드로 에지워스와 앨프레드 마셜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지게 된다. 그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리카도 역시 자본가에 의해 불가피하게 억눌린 존재로 간주했던 노동자들의 분노가 표층을 뚫고 분출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5.책을 덮기 전에
밤새 마신 술로 흐릿한 정신을 흐릿한 주말의 열차에 태우고 가면서 『세속의 철학자들』의 마지막 장을 넘긴다. 슘페터에게서 경제학을 배운 이 책의 저자인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점점 수식과 그래프로 모형화됨에 따라 강력한 분석의 기능을 갖추었지만 비전을 잃어버린 현대의 경제학에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스미스와 마르크스 이후 목적을 상실한 경제학에게 다시금 비전을 심으려는 하일브로드는 조심스럽게 자본주의의 미래를 긍정하면서 그 방법으로 국가의 개입에 무게를 둔다. 스미스부터 슘페터까지 너무도 중요한 세속의 철학자들을 약올리다시피 다루면서도 그 핵심개념을 놓치지 않고 설명해 주는 이 탁월한 경제학자의 머리와 가슴엔 케인스와 슘페터의 세속철학이 강하게 운동하고 있다. 그것은 소련식 국가사회주가 아닌,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 체제에 가깝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절망적이지는 않은 상태가 북유럽에 현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있는 것인가? 다음달에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을 접하면서 이 물음을 이어가 보자.
1) 아담 스미스, 최호진⁃정해동 역『국부론』상권(범우사, 2000), 27-32면.
2)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세계공화국』(도서출판b, 2007), 90-91면.
3) 카르타고식 평화란, 로마가 포에니 전쟁 후 처음에는 배상금과 영토 포기로 카르타고를 옥죄다가 종국에는 전쟁의 싹을 자르고자 카르타고의 전체 시민을 학살 및 노예화시키고 카르타고를 불태우는 로마식 평화였다. 로버트 하일브로너, 장상환 역 『세속의 철학자들』(이마고, 2006), 341-340면 참조.
4) 가라타니 고진, 앞의책, 62면.
5) John Maynard Keynes, The Econoinic Consequences of the Peace (New.York: Harcourt, Brace, 1920), p.32.(하일브로너, 앞의책, 343면에서 재인용) 이러한 경고는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생한 이유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6) 로버트 하일브로너, 앞의책, 349-363면 참조.
7) 로버트 하일브로너, 앞의책, 383-390면.
8) 로버트 하일브로너, 앞의책, 392면.
9)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p.126.(하일브로너, 앞의책, 400면에서 재인용)
10)이런 분석은 다음 책을 참고 바람. 헤르빅 비르크, 조희진 역 『사라져가는 세대』 Die Ausgefallene Generation(북코스모, 2006).
업무용 노트북이 생겨 집에서 예전 글을 들춰봤다. 일부 파일은 꺠져서 열리지 않는다. 아래글은 동양철학 수업 후 제출한 소논문이다. 주석은 생략.
주역의 자연관과 오늘의 자연관의 문제 1999.1.4
지난 여름 전국적인 수해는 중랑천을 끼고 있는 서울의 동북부에서도 일어났다. 다행히 피해에서 벗어난 지역에 속한 아파트에서 나는 동부간선도를 덮어 버리고 흘러 넘쳐나가는 무시무시한 황색 강물을 보면서 자연의 재해에 처한 태고적 인간의 공포가 온몸에서 살아나는 듯 했다. 같은 해 TV나 신문의 사진에서 황하의 범람을 보았을 때와는 다른 충격이었다. 중랑천의 범람을 대비해 지하 주자창에 있던 차들이 아파트를 빠져 나와 동일로의 가변도로에 일렬로 주차하는 긴 행렬이나 범람에 대비해 방송매체에 귀기울이라는 경고방송의 반복은 마치 북한의 무력도발이 일어나기라도 한듯한 전운(戰雲)을 감돌게 했다. 일시적으로 일어난 나의 이런 반응은 자연을 외경의 대상으로 간주해 그로부터 가치나 당위의 기획까지 이끌어내는 역학의 자연관과 부합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돌발적 반응과는 달리 나의 생활을 유지시켜 주는 물질적 심리적 조건은 서구적 자연관의 제약을 강하게 받는다.
역학을 포함한 동양의 순응적이고 순환적 자연관과 첨예하게 대립되는 서양의 그것은 부정적으로는 자연(physis)을 정복의 대상으로, 적극적으로는 자연을 인간의 영원한 가공 대상으로 본다. 여기서 사용되는 방법이 기술인데, 기술은 하나의 자연물이나 원형을 전형으로 삼아 이것을 끊임없이 모방․변경․응용하는 것으로서 그 대상은 비단 과학적 장치 뿐만이 아니라 삶의 조직화로서의 법제에도 미친다. 한가지 거친 예를 든다면 동양인은 자연 그 자체의 미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서양인은 자연을 질료로 삼아 이것을 재현, 재창조하는 데 관심이 있다. 세계관적 관점에서 볼 때, 서구인의 이런 태도는 인간종의 역사를 직선적 발전의 선상에서 보는 히브리적 사관이나 헤겔의 이성적 사관의 영향, 자연을 그 자체로 긍정하지 않고 자연 너머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현상계와 본질계를 구분할려는 플라톤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동양인, 특히 중국인에게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들은 소박한 실재관으로 자연을 긍정하는 전통을 갖는다. 자연 너머의 인격신의 존재 따위를 인정하는 태도는 주(周)나라 시절에 해체되고 신성(神性)은 예(禮)라는 전형적 행위의 형태로만 희석화된 채 남아 있다. 무엇보다 중국인의 이러한 현실주의적 자연관에 영향을 준 것은 농경문화이다. 농경사회는 사계절의 뚜렷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함으로써 파종과 수확을 한다. 자연의 반복적 운행에 삶의 노동이 맞춰지는 사회에서 문화적 상상 또한 이러한 자연에 속박된다. 그러면 이 상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이것은 하늘(天)을 체(體)로 땅(地)을 용(用)으로 간주해 전반적 삶의 기획은 하늘의 작용(乾)으로, 구체적 삶의 작동(만물의 생성과 유지)은 땅의 작용(坤)으로 본다. 건과 곤은 팔괘에 해당하는 것으로 팔괘의 나머지는 번개(雷), 바람(風), 물(水), 불(火), 산(山), 연못(澤)을 물상(物象)으로 한다. 팔괘의 발생을 수리적 계산의 측면에서 보면 효(양효와 음효로 나누어 지므로 경우의 수는 2가지)가 3개로 묶어지므로 ‘23=8’이 된다. 그리고 이 8괘가 8괘와 겹쳐져(예를 들어 팔괘중 양효가 3개 겹쳐진 건이 두배로 늘어나 더욱 강해진 범주인 건괘가 된다)중괘가 됨으로써 ‘82=64’괘가 되고 효는 ‘64×6=384’개가 된다. 이렇듯 역경 그리고 역전은 태극에서 비롯된 음양의 조화인 64괘 384효에 자연의 사태를 대응시킬 뿐만 아니라 대응된 괘와 효의 해석을 근거로 미정의 인사(人事)까지도 점친다. 여기서 제시되는 역의 뚜렷한 특징은 자연의 단순한 모상과 역의 기능으로서의 점이다. 팔괘는 자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추적인 8가지 물상을 모사한 것으로 본래는 은나라 때 거북의 등껍데기를 태울 때 갈라져 가는 껍질의 형태를 본 뜬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런 형상을 보고 복관(卜官)이 점을 치던 시절에서 더욱 발전된 것이 연시법인데, 이것은 산가지를 사용한 복잡한 수조작과 반복적 절차를 거친다. 천지와 만물, 그리고 인위적 사태를 64가지 라는 범주에 무작위적으로 자리매김한다는 발상은 단순한 체계에 우연적으로 함몰되고 마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64개의 괘사(卦辭)에 따라붙는 384가지의 효사(爻辭)가 상세하고 역동적인 설명을 덧붙여 줄 뿐만 아니라 사실과 가치를 망라하는 역사적 유물인 역경에 대한 텍스트 크리티시즘으로서의 방대한 주석서들은 시대를 달리하는 고고학적 지층처럼 누적되고 변화된 해석을 제시한다.
주역을 포함한 동양의 자연관에 따르면 우주는 유한한 공간(體)이라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지만 무한한 시간(用)에 의해서 생명이 끊임없이 새로이 전개되는 장이다. 즉 한정된 공간/물질 안에서의 무한한 변화가 역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관은 엔트로피 법칙에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공간의 유한성을 말하는 주역의 우주관이 현대의 우주관에 접목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이다. 간접적인 관찰도구로 행해지는 물리적 우주에 대한 탐사 결과는 인간이 만들어온 가정들을 무너뜨리거나 수정시킨다. 우주의 중심으로 오직 지구와 달, 태양만을 상정한 주역의 우주관과는 달리 태양계는 우리 은하라는 거대 항성군의 외딴 점일 뿐이다. 주역에서 보이는 인간 본위의 화려한 신화적 자연관에 무색하게도, 94년 7월 목성과 충돌한 슈메이커-레비 혜성 처럼 누군가가 이름 붙일 미지의 혜성들이 무법자처럼 위협적인 궤도를 그리며 지구를 향해 달려올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은 언뜻 보면 노장의 무위적 자연관과 비슷하다. 이들에게 인위적인 문물이나 仁과 같은 정서는 자연의 맹목성에서 볼 때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잡념일 뿐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을 알지만 인간에게는 냉혹하리만큼 무지한 과학자의 사물화된 시각과 다를바 없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사가 돌아가는 것에 비해 미래에 대한 과학적 담론들이 오히려 신화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러한 담론들이 겪을 사회적 역사적 과정의 지리함과 수고가 결여된 채 금방 그러한 담론이 실현되기라도 할 듯한 현혹감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장미빛 청사진의 이면에는 무수한 희생물이 요구된다. 이 상식적인 등가성을 무시하는 태도는 불가피하게 만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신약이나 새로운 치료술의 시행 전에 치러지는 임상 실험은 모르모트를 포함한 엄청난 쓰레기의 양산에도 불구하고 결과의 보상 때문에 정당화된다. 여기서 고약한 의미의 공리주의가 가장 많이 번식된다. 공공영역 내에서 발전되어온 민주적 절차가 약학, 의학, 유전 공학 등의 신기술 분야 내에서는 저지된다. 후자의 영역에서는 기술적 진화가 사회적 진화를 덮어 버린다. 따라서 이들 영역 내에서는 ‘밀어부쳐식’ 개발이 시행될 소지가 다른 사회 기관보다 높다. 이런 개발이 지지되는 이유는 기술경제체제라는 자본주의 체계의 근본적 특성 때문이다. 기업의 후원과 국가의 보호아래 진행되는 과학 기술의 시판(市販)이 시민사회의 공론영역을 거칠 때 화려한 외양 뒤에 숨겨진 참담한 폭력의 전체가 노출된다.
지구환경의 변화가 초래하는 위험 수위에 대한 논란 중에서 순환적인 동양적 자연관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구체적 움직임의 하나는 농경문명의 복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논리적 헛점이 있다. 간략히 말해 선결문제의 오류에서 오는 성급한 판단이라는 것이다. 지구를 자기 생명력과 자기 자정력을 갖춘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 러브록은 인간종이 만드는 온갖 오염물을 지구의 여드름 정도로 본다. 그런데 환경의 위기에 대한 자연과학적 입장의 상이성에서 위기의 현상을 찾는 길보다는 오히려 사회적 접근이 보다 구체적이다. 이에 따르면 이제는 인간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지위 차이가 환경 위기에 봉착하는 서열에 따른 위험의 지위 차이로 변모한다. 즉 재화 분배의 불평등이 위험 분배의 불평등으로 넘어간다. 예를 들어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방사선 오염이 근처의 셀라필드(Sellafield) 핵발전소에 확장되었는지에 대한 과학적 조사에서 셀라필드의 주민은 심각한 모순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목양농들의 실질적인 방사선 피해보고에도 불구하고 셀라필드 지역 주민을 둘러싼 친족망과 사회망의 일터는 셀라필드 핵발전소에 종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는 울산 공단의 오염 지역을 떠났던 주민들이 되돌아오는 현상이 일어났다. 중금속 오염 때문에 오염 지역의 집을 버리고 떠났던 사람들이 경제한파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듯 환경문제에 대한 위기의 징후는 과학적 데이타의 해석 보다는 실제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위험 배분의 불평등 속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바로 여기서 과학 기술의 숨겨진 폭력이 가장 적나라하게 목격된다.
유럽발 경제위기로 촉발된 세계경제가 불안하다고 난리다. 그런데 언제 세계경제가 안정기라고 들어본 일은 드물다. 영국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양치기 소년같은 이런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시름소리를 결국 이익은 사유화시키고 위험은 사회화시키려는 금융자본주의의 헛소동 쯤으로 본다. 지난달 이명박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에서 유럽 재정위기의 극복을 위해 한국이 IMF 때 보여줬던 구조개혁과 같은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고 충고했다. 국민세수 수십조를 망해가는 부실금융기관에 퍼부으며 이익은 사유화시켜 주면서 대량해고와 노동유연화로 위험을 사회화시키는 일이 합당한 경제해법이라는 것이다. 국가의 재분배가 사회안정망보다는 부실금융기관에 집중되는 사회구조에서 정치권이 연루되어 복마전을 치루는 상호저축은행의 비리는 사소한 이벤트일 뿐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자본주의의 체계통합*이 한층 더 강화되고 확장되는 기폭제로 경제위기가 이용되고 있다. 자본이 시민의 탄식과 항의를 묵살하고 진행하는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통합의 전략이 요구되는데, 산업혁명 이후 전개된 자본주의의 시발적 폭압에 대항해 고안되고 실천된 사회적 형식인 협동조합은 바로 그러한 사회통합을 위한 노력의 하나다.
협동조합이라는 사회적 형식은 19세기 서유럽의 산물이지만, 협동을 통한 호혜관계로 조직된 사회의 흔적은 인류 보편의 공동 유산이라 할 정도로 그 사례가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이런 지역적인 호혜망을 뒤흔들고 찢고 불태운다. 특히 20세기 전반기 까지 농경사회였던 한반도에서는 전통적으로 '두레'라는 협동의 모델이 '향도'라는 명칭으로 이미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두레는 단지 계(契)와 같이 순번에 따라 농사에 동원되고 도움을 받는 타산적 교환관계에 그친 것이 아니라, 타산성 없이도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등, 마을단위의 재분배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1995년 ICA의 원칙에 새로이 추가된 제 7원칙(지역사회에 대한 관심 :'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동의하는 정책을 통해 그들 지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보다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살림 선언의 사상적 기초가 된 동학은 바로 이러한 우리 농경 민족의 유수한 협력의 전통을 사회적 바탕으로 한다. 비록 동학은 일본군의 참전에 따른 갑오농민전쟁의 패배 이후 일제 식민지 현실을 거치면서 제도 종교로 안착됐지만, 조선사회의 모순을 응축시켜 폭발시킨 농민전쟁과 혼연일체가 되었던 동학운동에는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투철한 실천의 정신이, 오히려 저 서양 협동조합운동의 위대한 선구자들 못지 않게 짙게 베어 있다. 바로 여기에 한살림의 모태가 있다.
소비와 생산의 동시 조직화
두레라는 한반도 농경사회의 호혜적 관계망의 전통 속에서 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형식이 그대로 이식되기에는 경제양식의 차이가 있었다. 어디까지나 협동조합 태동의 사회경제적 배경은 높이 치솟는 굴뚝으로 상징된 산업사회였다. 구성된 조합원의 주권 실현을 지향하는 조합주의는 노동자, 생산자, 장인, 상인 등 직업의 분화를 전제한다. 그러나 한반도에 협동조합이 소개되던 일제시기에만 해도, 식민지 조선은 민중 대다수가 농민인 농경사회였다. 이렇듯 협동조합을 촉발시킨 (서양)근대 시민사회의 유산과 미분화된 전근대적인 농경 사회 사이에 갈라서 있는 단층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고 80년대에 태동한 역사적 운동이 한살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한살림선언'에는 서구의 기계적 문명으로 죽어가는 자연과 사회를 다시 되돌려 놓으려는 주장이 있다. 기계적 문명관으로는 단지 열량과 영양가라는 효용의 값어치로 매겨지는 밥 한 그릇이 생명의 세계관에서 온생명의 우주로 가득 차 있다. 생명의 세계관은 온 생명을 유기적 연관의 전체로 파악하는 시적 통찰이며, 과학은 이런 시적 통찰 이후에 분기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은 이런 시적 직관을 미개하고 신비적인 것으로 처리한다. 미국 초기 서부 정복 시대, 동부에서 쫏겨난 백인들에게 땅을 강매당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인디언들이 과연 백치라서 그랬을까? 그들에게 '대지는 지나가는 곳, 말뚝 박아놓고 문서작성하는 토지는 아니었다.'(『토지』16권, 288) 인간이 땅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가장 숭고한 가치를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땅은 물적 토대 이상이 아니며, 이러한 자연관은 그대로 물화된 인간관계로 전이된다. 땅과 자신을 분리할 수 없는 이러한 미분리는 한국전쟁 이전까지, 절대 다수가 농민이었던 한반도의 인민에게도 미친다. 소비와 생산이 별개 일 수 없는 것이 한반도의 전통적인 살림 양식이었다. 생산을 통해 자가 수급되는 소비물 외에 예외적으로 필요한 소비는 5일장이나 10일장 같은 제한된 시장에서나 해소되는 정도였다. 오늘날처럼 365일 심야까지 주구장창 문을 여는 할인점이 필요없었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가 애잔하면서 잔혹하게 표현한 빵장수의 이기심이 식민지에 침투하면서 분업과 함께 시장이 활성화됐다. 소비와 생산의 분리가 급격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60년대 군사정권의 경제 근대화로 산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농이 가속화됐고, 당연히 경제인구의 주요 인적 구성이 농업에서 산업으로 급변했으며, 더 이상 소비와 생산은 하나가 아니라 교환의 관계로 변화됐다. 한살림은 이렇게 갈라서 있는 소비와 생산이 만나야 한다는 선언으로 20여 년간 몰아치던 한국사회의 숨가뿐 산업화에 쉼표를 찍으며 나았다. 앞으로 에너지와 식량의 위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의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세수감소가 예상되는 미래와, 각종 협정으로 농업기반이 갈수록 위축되는 상황에서 생명,물질순환에 맞는 지역순환의 농업으로 지역자급기반을 준비하는 생산의 조직화는 소비의 조직화와 별개일 수 없다.
한살림도 지역한살림이 생협의 틀을 갖추고 생협연합회가 구성되는 등, 생활협동조합이라는 법적 형식을 입었지만, 한살림의 독특성이자 위대성은 생산과 소비를 별개로 보지 않으려는 점이다. 그렇다면 소비와 생산을 별개로 보지 않는 것, 곧 소비와 생산의 동시 조직화가 왜 중요할까? 여기에는 사회의 물적 토대를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숨어 있다. 미국의 경제사가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분업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장밋빛 미래에 불안한 의혹을 던진 맬서스가 생산의 과잉을 간파했음을 말한다. 즉, 분업에 의한 생산력 증대로 풍요로워진 상품들이 팔리지 않는다면, 분업의 효과는 없다는 것이다. 문예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 지점에서 맑스를 통해 생산의 과잉이 아닌, 생산의 무정부성을 본다.
C→M→C' 식1)
식1)은 자본(C)으로 상품(M)을 구입해서 판매함으로써 잉여 자본(C')이 생기는 정식이다. 그런데 이 정식이 다음과 같이 되면 곤란해 진다.
C→M-/→ C' 식2)
상품이 판매되지 않으면 잉여자본(C')이 생길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고안해낸 것이 신용거래인데, 이것은 상품이 화폐와 교환되지 않을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미래의 특정 시기로 결제를 지연시키는 것이다. 신용거래계약은 미래완료형태의 보증서로서 자본주의 상품관계의 성장과 몰락을 설명하는 양면의 동전이다. 미국발 증시악재의 원인이었던 비우량주택담보대출(Sub Prime Mortgage)이나, 억대의 아파트 담보 대출로 미래는 물론 생활이 저당잡힌 한국의 하우스푸어들, 신용카드업계의 영업이익 증대에 비례한 신용불량자의 증가는 이러한 신용의 위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상황은 현재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돈이 돈을 놓고 돈을 벌지 못할 때, 곧 자본이 자본으로서의 기력을 잃어 잉여자본이 되지 못할 때, 자본은 채무자의 무덤까지 파헤쳐 지옥까지 쫓아갈 정도로 이윤을 짜낸다. 이에 반해 대안사회를 향한 결사체인 한살림과 생협이 직거래라는 사업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자본의 잉여가 아니라 결사체로서 추구하는 사명의 실현에 있다. 다만 한살림은, 하늘이 하늘을 먹인다는 농경사회의 가치를 재발견한 동학운동의 전통을 이어 받아, 생태적으로 위협받는 지구 환경과 소외되고 단절한 지역사회에 과거 협동의 유산을 시대에 맞게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협동조합운동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소비자 조합원의 소비를 통해 생산을 안정화시킬 뿐만 아니라, 생산자 회원의 생산을 통해 믿을 수 있는 물품을 소비자에게 공급할 수 있다는 이 생산과 소비의 동시 조직화는 한살림운동을 이끄는 쌍두마차인 것이다.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의 과제
고대 그리스의 시치프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줄다기기를 하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러한 줄다리기의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두드러진 사건은, 20세기 초반 교환양식을 둘러싼 전세계적인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1919년 러시아를 시작으로 전세계 절반의 국가가 공산화로 나아간 것은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구소련의 몰락 이후 전세계가 자본주의의 촘촘한 그믈망에 흡수되는 일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세계적인 공산화와 세계적인 자본주의화에 대해서 그 해명의 준거를 맑스에게 여전히 기댈 수 있지만, 대안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비록 맑스가 가능한 코뮤니즘으로서 협동조합 운동을 미래의 청사진으로 들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희미한 전망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자본의 자기 파국적인 전개(대공황과 같은 규모적 경기 순환에 따라 프로레타리아의 희생을 전제한 자본의 자기 갱신)를 냉정하게 분석하는 맑스에게 어떻게 인간과 인간의 윤리적 관계가 필수적인 협동조합 운동이 가능성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여전히 『자본론』에 청년 맑스의 정열이 살아 숨쉬고 있지만, 이런 전복적 자세는 자본의 분석에 가려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굴욕당하고 압박당하며 경멸받는 존재가 되는 모든 관계를 전복하라”는 맑스의 칸트적인 정언 명령은 이미 맑스에게 청년 시절부터 소진되지 않는 과제였던 것이다.
이렇듯 맑스에게서 칸트적 윤리학의 윤곽을 발견함으로써, 즉 맑스와 칸트의 결합으로 윤리적 경제학을 발굴하며, 그 현실적 실행으로는 한살림이나 생협운동과 같은 결사체의 형태에 주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랜 역사와 파급력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생협은 진정한 사회적 대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협동조합 모델을 차용했지만 국가의 규제를 받으며, 농민을 수탈하는 기관이라는 평가를 받는 농협과 같은 대규모 조직은 반면교사의 대상이다. 소비자 주권이라는 시대의 유행을 쫓아 농촌 생산자를 마치 대형할인점의 납품업체와도 같이 처분하며 공격적 시장경쟁에 뛰어드는 일부 생협은 수치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경제는 중시하지만 윤리에 대해선 의례적 관심만 보이는 생협운동이 영업활동에 매몰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한살림 생활협동조합이라는, 두 시대를 아우르는 복합적 결사체의 사명을 사업체라는 수단을 통해 실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지도 모른다. 구한말과 식민시대, 시대의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벌판과 광야로 나간 이들은 그래서 선구자인 것이다.
*이 용어와, 사회통합이라는 용어는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시민정치론에서 가져옴.
*이 글은 1999년도에 석사학위청구용으로 작성한 것으로, 미완성한 글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I.서론
본 연구는 크게 두가지로 나눠진다. II장에서는 환경보전에 관한 경제적 접근 방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주력하는데, 환경의 가치에 대한 가상가치평가법이 주된 비판 대상이다. III장에서는 환경론의 민주적 공론화를 위한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 다룬다.
이 논문은 생태학과 관련된 다양한 철학적 논쟁을 다루는 영국의 계간 학술지 Environmental Ethics에서 몇년간의 시차를 두고 진행되던 논자들의 논의에 의존해 있지만, 이들의 논의들을 새롭게 재구성해 문제를 명확히 드러내는데 주력한다.
II.환경의 가치에 대한 경제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
이 장에서 필자는 환경에 관한 경제적 가치 평가의 한계를 지적하는데 주력하고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시민들의 공공선이자 사회적 가치로서 환경론을 제시한다. 환경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비판은 환경 경제학의 가상가치평가법과 효용의 무차별성에 국한되어 진행된다. 공공선이자 사회적 가치로서의 환경론은 이러한 비판의 근거로서 제시되지만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논의는 III장에서 다뤄진다.
1.문제제기 : 환경위기에 대한 윤리적 접근과 실질-이론적 접근
전 지구적이자 지역적인 환경 위기에 접근하는 철학적 논의들은 다양한 방식1)으로 분류되는데, 도덕적 고려의 문제와 관련해서 상반된 두 주제로 나눠보면 인간중심적 환경론과 생태중심적(비인간중심적) 환경론으로 분류된다. 인간중심적 환경론에서 자연의 가치는 두가지 방식으로 평가된다. 첫째, 자연의 가치는 인간의 편의와 사용을 위해서만 유용한 도구적 가치로서 가치 평가자인 인간의 이해관심(interest)으로부터 독립되지 않는다. 둘째, 자연의 가치는 인간의 편의와 사용과는 별개인 본래적(inherent)가치로 가치 평가자인 인간의 이해관심으로부터 독립해 있지만, 자연 스스로 자신의 본래적 가치를 의식할 수는 없으므로 가치 평가자인 인간이 의식이 없다면 자연의 본래적 가치가 알려질 수 없다. 따라서 첫번째의 경우 자연은 이성적 인간과 같은 도덕적 주체와 객체의 지위를 가질 수 없고, 두 번째의 경우 자연은 비록 가치 평가자로서의 도덕적 주체와 도덕적 존중의 대상으로서의 도덕적 객체의 지위를 가질 수 없지만 그것의 본래적 가치 때문에 도덕적 배려를 인간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약한 의미의 도덕적 대상이 된다. 한편 생태중심적 환경론에서 자연은 가치 평가지안 인간의 이해관심은 물론, 가치를 표출시키는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내재적(intrinsic) 가치를 갖는다. 이 경우 자연은 자신의 이해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의식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므로 인간과 동일한(또는 하나의 종인 인간을 넘어선 전체로서의) 도덕적 주체와 객체의 지위를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2)
이러한 분류는 인간의 도덕적 고려와 관련된 것으로, 서양 전통 철학의 윤리적 가치론과 연장선에 있거나(인간중심적 환경론의 경우) 이것의 한계선을 넘어선다(생태중심적 환경론의 경우). 즉 이 분류는 윤리적 가치론을 배경으로 한 도덕적 고려의 귀속과 근거에 관한 것으로, 이 분류에 따른 환경론은 인간과 자연 간에 일정한 관계를 설정하고 이에 근거해 인간의 자연에 대한 도구적 혹은 약한/강한 의미의 도덕적 태도를 사유능력을 갖춘 인간에게 호소함으로써 환경에 대한 인간 의식 차원의 인식작용과 각성을 유발시킬 수 있다. 이러한 윤리적 사유와 호소로 진행되는 환경론의 역할을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회적 행위에 수반되는 윤리적 태도에 비인간적 존재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가능성은 서구 윤리에서 인간에게만 한정되어온 윤리적 태도를 넘어서는 큰 변화3)를 암시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의식 차원과 윤리적 태도에서 환경론을 접근・인식・수용(혹은 거부)・실천하는 것은 한계적 범위 내에서 만큼은 매우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내면적 힘과 외면적 영향력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의식 차원의 사유나 의사소통에서 다루어지는 환경론과는 별개로 진행되는 환경의 조직적이고 비인지적인 대규모 황폐화로 인해 환경 파괴의 근원에 대한 다양한 방향의 성찰은 둘째치고, 긴급한 체계적 대응과 이에 따른 방법론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환경에 대한 나의 의식과 태도를 숙고하는 순간에도 환경 파괴를 정당하고 불가피한 인간의 타산적 사업으로 보는 도구적 세계관(인간중심적 현실론4))에 기초한 조직적 행위가 얼마 남지 않은 야생지를 잠식해 가고 있다.5)
이와 같은 자연에 대한 인간중심적 현실론은 비단 물리적으로 환경을 파괴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력한 이론적 정당화를 병행시키려 한다. 환경파괴를 지지하는 이 현실론은 환경론에서 제기되는 위기론이 과학적 근거가 증명되지 않은 음모론이라고 폄하한다.6) 예를 들어 이 현실론은 열대 우림이 산소 공급자로서 지구의 허파 역할을 한다는 통념에 대해 생태학에 근거해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우림 파괴의 과학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이에 따르면 열대 우림과 같은 극상의 생태계가 오랜 부패의 결과로 산소를 소비하는 것 보다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하지 않는다.7) 달리 말하면 열대 우림의 산소 소비(이산화탄소 배출)와 공급에 의한 잔여 산소량이 열대 우림의 파괴와 무관하게 일정하다는 것이다.
이 사례에서와 같이 통념으로 간주되었던 환경 위기의 여러 징후가 생태학에서 증명되지 않은 미완의 가설로 남겨짐에 따라 환경 위기론의 ‘위기’는 사실이 아닌 허위적 신념의 소산으로 몰리게 된다. 그러나 환경 위기론이 허위적 신념체계라면 환경 파괴의 현실론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전자 뿐만 아니라 후자도 충분히 증명되지 않은 생태학적 지식에 근거해 환경 파괴를 정당화하는 불완전한 근거 설정의 오류를 범하기 때문이다.8) 심지어 과학기술의 발달로 생태학적 지식이 더욱 완벽해져서 생태계의 현상을 정확히 포착・예측・통제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이 자연을 지금과 같이 파괴하는 것을 정당화시켜준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생태학과 인접 과학의 기술적 발전이 생태 친화적인 자연관을 심화시킬 수도 있다.9) 그렇다면 이런 낙관적 기대에도 불구하고 환경 위기론(보전론)과 함께 불완전한 근거 설정이라는 부담을 안은 인간중심적 현실론(환경 파괴론)이 실질적으로 우세한 지점을 점유하는 상황에서, 어떠한 실질-이론적 대응이 모색되야 하며, 이 대응을 파생시킬 근거로서 증명 부담을 안은 환경 파괴가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2.공공선으로서의 환경 보전
환경 파괴를 억제하려는 환경 보전론을 사적 이해관심(시장에 의해 보편적으로 가격화되는 개인적 선호)과 구별되는 공공선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Sagoff의 과점10)은 실질-이론적 대응의 출발선으로 적합한 이론적·제도적 방향을 제시한다. 사고프에게 좋은 사회를 위한 환경 보전은 다른 공공선(공중 건강, 작업 환경의 개선 등)과 마찬가지로 시장의 질서에만 맡길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장을 중심으로한 경제주의적 관점은 오염과 같은 일례적 환경문제가 환경자원(자유재)의 비효율적 사용에서 발생한다고 보는데11), 여기서 자원의 사용 주체로서 경제학에서 가정되는 생산자와 소비자는 자신의 생산자 잉여와 소비자 잉여를 극대화하려는 이기적 개인이지 공공선을 구성하는 시민12)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환경 보전에 있어서 경제학에서 가정되는 이기적 개인이 문제시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현대 경제학의 새로운 조류가 언급될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90년대 들어 미국의 자원·환경 경제학이 소개되기 시작했으나, 미국에서는 1950년대부터 외부효과(externality)로 간주된 환경문제를 좁은 의미의 효율성의 차원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이것은 제 3자에게 실제적 피해를 끼치는 오염과 같은 산업의 부수효과를 비용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구 경향은 1960년과 1970년대 사이에 일어난 인종차별철폐와 공공 안전 개선, 삶의 질 향상을 위한 환경 운동을 거치면서 기존에 효율적 시장을 통한 가격에 포섭되지 않던 환경에 관한 사람들의 문화적, 미학적, 윤리적 관심을 기존의 외부효과-예를 들어 오염-와 함께 비용(bargaining cost)에 포함시키도록 진행되었다.13)즉 시장의 방법이 정치적 과정을 통해서 해결이 모색되던 가치와 목적, 심의에 개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앞에서 제기된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경제학의 엄정한 인간관에 따르면, 경제적 가치로 평가된 어떠한 재화(이것이 환경 자원이라 불리는 자유재나 상품, 타자나 미래 세대에 대한 동정이든)에 대해서도 경제적 인간은 무차별(indifference)적이다.14)왜냐하면 경제적 인간의 선호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화의 특유한 사용가치가 아니라 교환가치에 따른 효용의 항상성(극대화로 나아가는 효용이 극대점에서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종결점으로 한 포화saturation)과 관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발업자에 의해 야생의 산이 깍여서 골프장으로 개발된 위락 공간의 개발 및 소비가 경제적 인간에게 효용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일용 재화의 생산·소비와 질적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효용의 양(지불용의액 혹은 교화가치)에서나 있을 뿐이다.15)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문제점은 두 가지다. 첫째, 환경의 가치는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는가? 둘째, 경제적 인간의 선호가 인간의 가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가치’라는 말 자체가 인간의 의식에서 기원하는 것이므로16) 두 가지 문제는 환경론에 관한한 하나로 축약된다. 환경에 관해서 인간이 부여하는 가치가 경제적 가치로 환원되는 것이 정당한가?17)
1)환경에 관한 경제적 가치 평가의 문제점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의 논의 구조는 계간 학술지 Environmental Ethics에 실렸던 환경 경제학에 관한 논쟁적 논문들에서 볼 수 있다. 환경 경제학에 관한 비판적 논의는 H. Rolston의 “Valuing Wildland"라는 논문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진행되는 지속적인 논쟁의 발판은, Rolston의 이 논문에 대한 반론인 ”In Defense of Environmental Economy"을 발표한 S. Edwards가 제공한다.18)
자원·환경 경제학자인 S. Edwards에 따르면 지불용의19)(willingness-to-pay)에 근거한 경제적 가치는 자연 환경에 관해서는 4가지로 분화된다. 이 분화는 자연환경에 관한 이른바 비시장접근법(가상가치평가법 혹은 가상상황평가법20))에 적용된 것으로 첫째, 사냥처럼 자연으로부터 직접 개인적 만족이 도출되는 소비적 사용가치, 둘째, 야생의 관찰과 산책처럼 자연에 대한 소비가 아닌 사용으로부터 도출되는 비소비적(직접적) 사용가치, 셋째, 야생을 다룬 비주얼 프로그램이나 책을 매개로 향유되는 간접적 사용가치, 넷째, 개인적 만족을 위한 사용과 무관한 환경보전으로부터 도출되는 비사용가치로 경제적 가치는 나눠진다.21) 자연환경의 비사용가치에 관한 경제학자들의 분류로는 존재가치, 선택가치, 유증가치가 있다.22) 그렇다면 롤스톤의 비판(“Valuing Wildlands")을 반박하며 이러한 환경 경제학을 옹호하는 Edwards의 논문("In Defense of Environmental Economy")을 비판점으로 삼아 전개되는 Sagoff의 논점을 살펴 보자.
Sagoff는 환경 가치의 평가에 있어서 경제학이 사용하는 추상적인 일방 규준적 선호를 비판하고 심의(deliberative)절차를 통한 시민 주체의 숙고된 판단을 중요시한다. 일방 규준적 선호란 시민이 공동의 자발적 공론 절차를 통해 발생시키는 가치가 아니라 통제된 규준에 의한 실험적 상황에서 실험자(경제학자)에 의해 조작된 선호(예를 들어 지불용의로 나타나는 가격)를 말하며, 이 선호에 대해 피실험자인 시민의 입장은 수동적이다. ‘경관의 경제적 가치에 관한 실험’이란 논문에서 제시된 와이오밍 대학 경제학자들의 시도에서 선호 조작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이들은 “물리적 측량이 인간의 감각(sense)을 인식하는데 유용하다는 조건에서 아름다움 또는 미학적 현상이 경제적 가치[지불용의]로 측량되어야 한다”23)고 말한다. 이러한 경제학자들의 실험-과학적 방법론은 피실험자에게 ‘응분’24)의 협조를 요청한다. 사고프는 이때 경제학자들이 환경의 가치에 관한 지불용의 설문조사(가상가치평가의 입찰게임)에서 무리한 가격을 제시하는 반 이상의 응답자를 비타협적 방해자로 보는 점을 비판한다. 이 비판의 근거로 사고프는 소유권(약하게는 사용권)의 양도 거부권과 시민 저항의 정당성을 든다.
2)환경의 경제적 가치 평가에 대한 사고프의 비판 근거
①-A. 소유권(사용권)의 양도 거부의 권리
여기서 사고프가 옹호하는 소유권(property rights)에 대한 양도 거부권은 전통적 자유주의의 절대적 소유권에 대한 방어 보다는 환경과 관련된 상대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은 사적으로 대지를 소유한 소유자[공적으로는 공유지를 사용하는 공중]가 자신의 소유권[공중의 사용권]을 오염을 일으킬 개발업자의 어떠한 규모의 지불용의액을 통한 계약 요청에 대해서도 자신[공중]의 대지를 양도하지 않을 수 있는 배타적 권리, 그리고 이를 위한 법적 보호25)이다. 사고프는 이러한 소유권이 행사되는 것이 전통적인 실제 시장으로 보고, Edwards가 제시하는 경제적 분석은 이런 시장에 부적합하다고 말한다.26) 왜냐하면 경제적 가치를 결정짓는 지불용의에 의한 분석이 사적 소유권[공적 사용권]을 가격화시켜 자연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한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은 경제적 가치 외의 가치들과 사실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런 입장을 지지하는 경제학자는 한강물의 재산권[소유권]이 오염자에게도 있다고 본다.27) 이것은 종래까지 비용으로 간주되지 않았던 오염이 기업의 비용에 포함됨에 따라 제 3자에게 끼치는 오염의 피해에 대해서도 실질적으로 보상할 책임이 기업에 전가되었기 때문에 오염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만한 비용을 치루겠다는 의미로 기업의 ‘재산권 행사’28)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을 보전하기 보다는 우선 오염시킨 다음에 비용만 치루면 된다는 식의 무책임한 사후대책이지 예방적인 대책은 아니다.29) 또한 이런 방법은 사실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환경 보전에 대한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고려가 아니다. 왜냐하면 역동적 체계의 과정에 의해서 개시되는 생태적 합리성에 맞는 시간 지평은 경제적 시간을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법적, 정치적 합리성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장기적(몇십년에서 100년, 1000년 이상까지)이기 때문이다.30) 이런 맥락없이 자연에 대한 무차별 개발을 단시안적 보상체계로 정당화시키는 것은 환경 자체의 선(good, 비사용가치)과 여기서 혜택을 보는 사람들의 선을 희생시켜서라도 단기적 이해관심을 채우려는 것이다.
①-B 신고전파의 순수교환모형의 가정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나온 소유권(사용권)옹호
사적 소유권(공적 사용권)의 배타성을 이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동일한 기획의 연장선상에서 옹호할 수 있는 논점은 경제학자인 J. M. Gowdy와 P. R. Olsen의 논문에서 볼 수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31)의 근본가정에 대한 이들의 비판에 근거하고 있는 ‘거래하지 않을 용의’라는 관점은 사적 소유권(공적 사용권)을 지지할 수 있다.우선 신고전파 경제학의 근본가정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거래하지 않을 용의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살펴본다.
신고전파 경제학의 근본가정이란 소비자의 선택에 관한 순수교환모형(혹은 효용의 무차별성)을 근거짓는 세 가지의 강한 가정으로서 불포화성(non-satiation: 한 재화에 대한 많음이 적음보다 더 선호되는), 강볼록성(strict convexity: 동일한 효용을 창출하는 유한 수의 재화들간의 무한에 가까운 조합), 이행성(transitivity: 상품 선택의 만족 크기에 있어 A란 상품이 B보다 선호되고 B가 C보다 선호될 때 A가 C보다 선호되는 관계)을 말한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비록 물리학자처럼 이런 모델이 의존하는 가정의 실재성보다는 예측력에 가치를 두지만 소비자의 선호를 구성하는 정서, 상황, 다양한 모든 종류의 대상에 부여되는 공통분모로서의 효용에 대한 믿음-따라서 이로인해 모든 종류에 대한 거래용의(willingness-to-trade)가 성립하는-은 서수적 오류(ordinalist fallacy)란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거래하지 않을 상황으로서의 선호항목의 구조(lexicographic ordering of preference: 선호와 거래하지 않을 용의에 대한 위계)가 있기 때문이다. 선호항목의 구조상 개인의 선호들 사이에서는 신고전파의 순수교환모형을 위한 두 번째 가정(강볼록성)이 부정하는 문턱(threshold)효과가 일어난다. 예를 들어 굶주린 사람은 밥을 텔레비전과 거래하지 않을 것이고 우표수집이 취미인 사람은 우표를 야구 방망이와 거래하지 않을 것이다. 거래용의의 발생을 어렵게 하는 이러한 문턱효과는 특히 생태계와 관련해 설명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CFC(냉각제) 생산과 오존층 보호 사이의 거래는 인간 생존에 치명적인 종의 소멸을 의미할 뿐이다.32) 이와 같이 거래가 성립하기 힘든 항목을 거래가능하도록 보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환경평가(가상가치평가법)는 근본가정(특히 강볼록성)에 있어 불완전한 토대 위에 놓여 있다.33)
②시민 저항 : 가상가치평가법에 대한 저항
이상의 사적 소유권(공적 사용권)과 긴밀히 연관된 시민 저항의 정당성에 대해 살펴 보자. 여기서 시민 저항이란 인간을 선호의 수동적 담지자로 규정한 가상가치평가법−이것은 사회 정책의 입안 과정에서 객관적 분석도구로 활용될 소지가 많다−에 대한 저항을 말하며, 사고프는 가상가치평가법에 따른 설문조사를 받는 응답자들이 이런 저항을 계기로 공적 심의(공론)을 통해 환경에 대한 그들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숙고된 판단의 담지자라고 본다.34) 그렇다면 이 저항의 정당성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이것은 가상가치평가법이 기초하고 있는 지불용의가 공리주의적인 개인적 효용(utility)도 반영할 수 없다는데 있다. 비록 Edwards는 지불용의와 함께 유력한 경제적 분석방식인 비용-편익 분석이 공리주의의 특별한 사례라고는 하지만35) 이에 근거한 분석은 실질적인 의미의 좋음과 행복, 만족이라는 공리주의적 가치와 관련이 없다. 여기서 사고프가 염두하는 공리주의는 주로 밀의 고전적 공리주의다. 이 고전적 공리주의의 목적은 순간적인 욕망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의 지양을 통한 지속적인 행복의 도달이다. 그러나 소비행위를 통해서는 만족과 동시에 불만족이 일어난다.36)
그런데 여기서 개념적 혼동이 지적될 필요가 있다. 경제학(특히 한계효용학파 이후의)에서 선호를 구체화하는 개념인 효용과 공리주의적 효용은 다른 개념이다.37) 따라서 경제적 가치의 판단 기준인 지불용의로 경제적 효용을 나타내는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이 지불용의를 사용한 방법이 공리주의적 효용을 포함한 규범적 가치에 개입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미시 경제학의 이론적 효용 개념이 실질적이고 규범적인 인간의 가치를 양화가능한 지불용의로 기술할 수 있어도 설명할 수는 없다.38)
가상가치평가법(입찰게임법)에 대한 시민 저항의 정당성을 제시하기 위해서 경제적 효용 개념이 인간의 규범적 가치를 다루는데 있어 제한적임을 밝히는 심층적 논의가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입찰게임에 국한해서 지불용의에 근거한 경제적 가치의 한계를 살펴 본다. 가상가치평가법에 따르면 야생지에 관한 경제적 가치는 야생지 소유자나 사용자의 지불용의에 근거해 책정된다. 여기서 지불용의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의존하는 모델로서 Walras 학파의 일반 균형 모델에서 나온 것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모든 경제활동은 파레토 최적39)의 자원할당을 위한 완전 경쟁 구조의 입찰로 간주된다.40) 경제적 가치는 바로 이 입찰 과정에서 지불용의란 형태로 나타난다. M. H. I. Dore가 문제삼는 것은 바로 이 입찰 과정에서 지불용의로 나타난 경제적 가치다. 이론적으로 볼 때 입찰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주어진 입찰 대상 자체 외에 아무 것도 새로 생산되는 것이 없다. 오직 입찰 대상에 대한 입찰 경쟁자 간의 지불용의로 입찰 대상의 가치가 발생할 뿐이다. 특히 이 입찰 대상이 야생지라면 이 입찰과정(가상가치평가)에서는 생태학적 사실이나 미래세대에 대한 고려가 쉽게 누락된다. 즉 생태학적 측면에서 볼 때, 입찰에 참가한 야생지 소유자나 사용자의 소비자적 관점은 야생지 개발로 인한 토양 오염과 종다양성의 훼손, 토양 침식 등의 생태적 사실로부터 장기적으로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에 관한 전문적 지식을 결여하기 쉽다. 미래세대의 측면에서 볼 때, 현세대의 사람들은 미래세대에게 부담되는 자연 훼손의 비용보다는 현재 충족될 수 있는 편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므로(social rate of time preference) 미래세대의 편익을 포함한 사회적 관점을 결여하기 쉽다.41) 따라서 가상가치평가에서의 지불용의는 야생지의 사실적, 사회적 가치를 드러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앞에 본 것처럼 지불용의에는 야생지에 관한 생태적 사실의 결과와 미래세대를 포함하는 사회적 기회 비용이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III.환경론의 민주적 공론화
1.권리-의무의 성립에 관한 벤담의 논의에서 본 환경론의 위치
벤담은 자연권이 성립할 수 없는 근거로 권리에 의무가 결부되듯 자연권에 결부되는 자연법이 있을 수 없음을 주장한다. 즉 중력과 같은 자연의 인과법칙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발생시키거나 창안하는 자연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자연법에 대한 주장은 사회의 관습적인 허용(compliance)의 규칙 체계로부터 영향받는 법 체계 내에서 사회 구성원의 이성적 심의절차를 통해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이나 성 등 신체적 특질과 같은 비관습적 속성이나 신비적 자연주의에 직접 근거해 권리주장을 함으로써 권리주장의 범람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이런 권리주장들을 제약할 수 있는 규준제시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규준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미 자연법이 아니다.42) 벤담의 논의를 요약하면 사회 구성원간의 구체적 관계를 규정하는 내용으로서의 권리와 이를 위한 의무가 관습적 규칙과 형식적 법칙의 틀 내에서만 성립하는 것이지 바로 자연 자체에서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M. Sumner가 이러한 벤담의 고전적 권리 개념과 함께 염두하는 것은 현대적 권리 개념인데, 이런 권리의 행사를 위해선 자신의 의무를 변경할 수 있을 정도로(따라서 의무에 의해 규정되는 권리의 변화까지 함축하는) 도덕적 사유 능력을 갖춘 이성적 행위자가 전제된다.
이러한 권리 개념에 근거한 도덕관에 따른다면 동물 해방론이나 자연의 내재적 가치론은 성립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원전의 방사능 누출이 문제되는 것은 방사능 누출 자체나 이로 인한 토양 오염, 생물 다양성의 훼손때문이 아니라 방사능 누출의 피해를 현재나 미래에 입을 무고한 사람들의 신체 보전 권리가 침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인간의 기본적 권리가 시간이 갈수록 인위적인 자연현상의 변동과 긴밀한 관련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생태학의 진보와 환경운동의 지속적 확대화는 현상적으로는 환경권을 기본권으로까지 상승시키는 양상을 보인다. H. A. Simon의 합리성 구분을 적용시킨다면 이 두 분파의 내외적 정당화 논리는 필지가 보기에 실질적 합리성과 절차적 합리성(발견적 과정의 논리 중시)을 병행시킨다. 여기서 실질적 합리성이란 환경의 특성이라는 주어진 조건에서 목적을 성취하는데 적합한 행위를 말한다.43) 즉 생태학과 환경운동의 실질적 합리성은 인간에 의한 자연 현상의 변동이 인간에게 유해한 영향을 미치는 환경의 제약성에서 내적 논리의 학적 발판을 세우고 이에 대한 대안을 목표로 제시함으로써 이론적 정확성을 확보한다. 생태학과 환경운동의 절차적 합리성은 이러한 내적 논리를 외적 논리로 확대하여 환경의 제약성을 사회 성원들에게 고발·설득·실천유발(담론화 절차)·제도화(법적 절차)함으로써 실천적 구속력을 확보한다.44)
그런데 문제는 이론적인 생태학적 사실과 사회운동적·제도적 실천의 연결망이 불투명하다는데 있다. 이와 같다면 환경에 관한 이론과 실천은 서로 헛돌게 된다. 즉 생태학적 사실이 다분히 이론적인 잠재 상태에 머무를 뿐 사건화되어 분출될 정도가 아니면 이론적인 생태학적 사실에 입각한 실천적 대안은 일반인에게 공허한 구호로 들리기 쉽다. 예를 들어 원전의 방사능 누출과 핵폐기물 유출에 대한 사전의 이론적 검증과 보고에 입각한 근본적인 대책마련(예를 들어 원전 시설을 폐기하고 친환경적 에너지원인 태양열이나 풍력 에너지에로의 전환)은 체르노빌 사건이나 일본 도카이무라(東海村)시의 첫 방사능 임계 사고와 같은 재해가 일어나지 않는한 시급한 요청으로 들리지 않게 된다. 이런 논지에 대해서 R. Bailey와 같은 사람은 환경론자가 ‘재앙’으로 먹고 산다는 비난을 한다. 왜냐하면 ‘재앙’이 발생해야 그들의 이론이 입증되었음이 증명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잘못된 추정의 부담을 환경론자에게 덧씌우는 것이다. 동일한 논리대로라면 예방의학 연구자는 예측된 병이 발생해야 먹고산다는 말도 성립한다. 그런데 과연 환경론자나 예방 의학자가 ‘재앙’이라는 나쁜 목표를 위한 수단 정도로 그들의 이론을 연구한다거나 예측된 재앙의 발생을 그들의 이론적 입지를 공고히 해줄 논거로 본다고 할 수 있는가?
2.환경론에 관한 기술적 관점과 사회적 관점
그러한 ‘혐의’로부터 환경론자가 안전하다해도 예방 의학자 만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병의 위협은 환경의 위협보다 더 직접적이다). 여전히 사건화되지 않은 이론(생태학적 사실)과 실천 사이의 간격차는 크다. 방사능 누출에 의한 극심한 피폭과 같은 신체적 위협이 아닌 이상 생태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사회 현상과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도 벤담의 주장이 유효한 함축을 갖는다. 권리를 성립시키는 의무가 사회의 관습적 허용의 규칙과 법칙 체계 내에서 타당할 때에라야 의무는 사회 구성원들에게서 실천적 구속력을 기대할 수 있다. K. S. Shrader-Frechette은 이런 점에서 환경 정책에 관한 주요한 논점을 제시한다.45) 그에 따르면 현대의 환경 영향 분석과 기술 평가는 순수히 기술적으로 최적화된 연구 패러다임만을 수행함으로써 K. Keniston이 명명한 ‘미완결된 실행의 오류’를 범한다. 미완결된 실행의 오류란 Moore의 자연주의 오류(경험적이거나 연역적, 통계적 고려는 윤리적 판단 수행에서 요구되는 것의 일부일 뿐인데 이런 고려를 전부인 것처럼 취급하는 오류)를 철학적 근원으로 갖는 것으로(41), 현상유지적인(:근본적인 목표의 변화없이 수단의 개량만을 추구하는) 과학기술이 환경적이고 사회적인 불안을 해소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말한다(40). 이에 대해서 Shrader-Frechette가 든 두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첫째, 방사능 누출과 폐기물로 야기되는 환경 위험의 경우 실제로 처리하기 어려운, 그럼에도 중요한 문제는 어떤 저장기술(폐광, 심저 갱, 단단한 세라막 막, 이중 강철막 탱크내 액화)을 채택하느냐에 관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위험을 미래세대에 부과할 수 있느냐’와 ‘주어진 위험의 수용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와 같은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이다(37ff). 둘째, 자동차의 배기 가스로 인한 대기 오염에 대해서 이를 규제하는 효율적 장치 개발에 전념하는 기술적 해법(OTA)은 대중교통 이용에 대한 제도적 혜택과 같은 사회적·정치적 해법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39).46) 이 두가지 사례에서는 K. E. Boulding이 정의한 하부최적화(suboptimaization: 현상유지적인 기술을 더욱 세밀하게 발전시킴으로써 미완으로 남겨둬도 좋을 만한 것까지 최적화시키는 것)가 사회적 윤리적 고려를 압도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 Shrader-Frechette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환경정책에서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는 윤리적 사회적 가정을 정책의 비용-편익 분석에 적용함으로써 공적 선택의 범위를 확장하는데 있다(42ff). 그의 논점은 정부 주도적인 전문적 정책 입안의 주체에 방향을 맞춘 인상을 주지만 그 자신이 한때 EPA(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라는 기술편향적인 환경기술 평가기관에 일원으로 참여했던 점을 감안할 때 그의 글은 ‘기술 전능주의’적 환경평가에 대한 자기 성찰의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다양한 대안(목표)의 가능성 제시는 사회 주체들이 책임있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여지를 넓히는 장점이 있다. 만약 에너지 정책에서 가능한 대안이 현상유지적인 원자력 발전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면 에너지 정책에 대한 논의는 기술 관료의 전문 영역에만 한정되고, 원자력 발전의 단점은 기술적인 하부최적화의 논리로 남아 이에 대한 일반인의 참여는 봉쇄되기 쉽다. 이 경우 에너지 관리의 책임은 전적으로 기술 관료에게 위임되고 만다. 이에 반해 대체 에너지의 기술적 발전경과와 병행해서 이것의 사회·윤리적 가정이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공론을 통해 충분한 사람들의 참여로 논의된다면 결과적으로 결정이 어떠한 특수하고 우연적인 맥락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과 상관없이 그 책임은 사회 구성원에게 균등히 분산될 수 있으므로 절차적 구속력이 담보될 수 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그 결정이 공론의 추세에 반하는 것이라면 입안자는 정책 실행에 있어 심각한 부담을 지을 수 밖에 없다.
이렇듯 기존에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영역으로만 국한되어 이해되어온 문제들을 사회적인 영역에서 고려하는 움직임은 역사적으로 서구의 급진적 환경운동에서 볼 수 있다. 과학기술의 진보를 특수한 역사적 문화에 한정시켜 볼 것을 제안하는 근본 생태주의의 창시자 A. Naess는 원자력 기술이 특정한 사회적 구조를 전제한다고 본다. 이것은 고도로 집중화된 사회로서, 여기서 에너지원은 원거리의 집중화된 기관에 의해 통제된다. Naess는 이러한 에너지의 집중화된 관리가 개별적인 문화의 자기 결정과 실천적 자유의 축소를 가중시킨다고 본다.47) 왜냐하면 탈중심화되고 분산된 에너지원(예를 들어 석탄이나 나무)을 생산,관리하는 생태 친화적인 지역 공동체는 스스로 자원을 통제함으로써 집단적 자율성을 행사할 수있는데 반해 집중화된 에너지원(예를 들어 원자력)에 관계될 경우 전문화되고 집중화된 결정구조가 분산적 결정구조를 대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에너지원의 특성에 따라 해당 에너지에 전제되는 의사결정구조도 상이해 진다. 적은 수의 인구와 소규모 생산시설에 적합한 분산된 에너지가 현대에 적합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즉 많은 인구와 거대 산업단지에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공급하는데 있어서 집중화된 에너지가 현실성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런데 Naess처럼 에너지의 특성에 따라 사회의 의사결정구조를 다르게 봄으로써 원자력에 관해서는 집중화된 의사 결정이 전제되다고 보는 점은 Sarader-Frechette의 관점에서 볼 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원자력이라는 에너지의 특성상 원자력 단지와 원자력 관리가 집중화된 통제를 필요로 한다는 에너지원에 관련된 특성이 이 에너지원의 채택과 관리, 위험성 여부에 관한 자생적 공론을 특정 기관(예를 들어 원자력 관리공단이나 과학기술부의 원자력국)의 의사결정에 종속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즉 집중적 관리를 요구받는 원자력 에너지의 경우라도 그 타당성이 공론을 통해 점검받을 수 있는 분산된 의사결정구조가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원자력 에너지의 타당성에 관한 진단은 과학기술의 전문적 영역에서 논의되는 사안이지만 대체 에너지의 채택에 관한 문제에 관해서는 전문가의 의견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효율성에서는 원자력에 비해 월등히 뒤지지만 에너지 시설의 안정성과 미래세대를 위한 환경보전의 면에서 원자력에 비해 월등한 태양열 에너지를 한정된 산업시설을 제외한 편의시설에서 대체 에너지로 채택하는 문제는 활발한 공론이 절차를 밟을 수 있는 사안이다.
*각주
1) 예를 들어 급진적 생태철학 내의 활발한 담론에 관심을 표명하는 M. E. Zimmerman은 환경철학의 주요한 세 영역을 급진성의 정도에 따라 급진적 생태철학(종종 반문화운동과 연관된 심층 생태주의, 생태 여권주의, 사회 생태주의)과 환경윤리(비인간중심주의, 약한 인간중심주의), 인간중심적 개량주의로 나눈다. Zimmerman(1993: vi-viii) 참고(장춘익, “생태철학 : 과학과 실천 사이의 지적 상상력” 한림대 인문학 연구소, 1999:118에서 재인용. 여기서는 설명의 편의상 순서가 반대로 되어 있음). 『자연의 죽음』으로 잘 알려진 생태 여권주의자 C. Merchant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견해와 사용의 근거로서의 환경 윤리를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 경쟁적 자본주의의 치열한 이해관계 속에서 조정자로서의 이성적 입법자를 상정하는 자아중심적(egocentric) 윤리, 둘째, 최대다수 인간의 최대 선을 목표점으로 갖는 공리주의로서의 인간중심적 윤리, 셋째, 유기체와 무기체를 포함한 생태계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생태중심적 윤리이다. C. Merchant(1990:48-64) 참고. 환경에 대한 철학적 접근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사적 접근을 하는 D. Pepper는 세가지 유형의 분류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①초창기 서구의 환경운동에서 이데올로기(신념체계)를 기준으로 분류된 ‘기술 지향주의’와 ‘생태 지향주의’ ②사회의 의사결정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분류로서의 기능주의적 다원론과 급진적 맑스주의 ③근본적인 철학적 견해를 기준으로 한 환경 결정론과 인간의 자유 의지론. D. Pepper(1997:56) 참고.
2) K. E. Goodpaster(1993:49-64); 한면희(1996:34-64); 홍지영(1996:58-59) 참고.
3) 대지 윤리를 제창한 A. Leopold의 생명공동체론에 가까운 C. Stone의 입장은 심지어 동물과 나무의 법적 지위(권리)까지 주장한다. 그는 이를 우리의 도덕적 자각을 확장시킬 역사적 진보의 일부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이런 도덕의 확장을 통해 사회는 억압받아온 집단인 흑인(유색 인종), 여성, 아이에 대한 평등을 [다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일한 관점을 수용하는 L. Tribe는 감정이입을 할 수 있도록 증대된 인간의 지각 능력이 인간해방운동에 고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 생태계 전체의 균형에 초점을 맞춘 M. Sagoff는 환경법이 반드시 개별 동물이나 개별 식물의 복지를 증진시키거나 그 생명을 보호하지 않고도 이것들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가능성(개별종의 권리 주창 보다는 인간에게 자연의 보전에 대한 의무를 지우는 방법)을 고려한다. M. Sagoff, in Zimmerman(1993:84-85).
4)‘인간중심적 현실론’은 황경식(1994:182-3)을 참조. 여기서 황경식은 환경윤리학에 대한 ‘인간중심적 이상주의’의 관점에서 ‘인간중심적 윤리설’을 옹호하지만 이것이 자연물에 대한 무절제한 남용인 ‘인간중심적 현실주의’와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다.
5) 롤스톤은 미국 땅의 98%가 이미 개발되고 2%만이 야생지로 남은 상태에서 극대-극소(maxi-min) 원리로 남은 야생지의 가치 2%를 최저선으로 하여 이것을 98%까지 극대화하는 바닥치기 모델을 제시한다. 이것은 이미 개발된 가용 대지의 가치 98%를 100%로 극상시키는 극대-극대(maxi-max) 원리의 일방전승 모델에 반대된다. H. Rolston(1985:39ff) 참고. 남한의 경우 전국토(10만k㎡)의 7.5%만을 차지하는 16개 도시(인구 50만명 이상)의 인구는 전체의 62%를 차지할 정도로 과밀지역이다. 전국 도시에서 녹지지역 구성비는 1980년 74.6%에서 1990년 70.4%로 감소했다. 또 1971년 대도시의 무분별한 확장을 막고 환경을 보전할 목적으로 처음 도입된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은 1997년까지 14개 권역, 42개 도시에 전국토의 5.4%(약 5,397.1k㎡)가 지정되었고 여기에 28만 가구(96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2.2%)이 거주하고 있다. 한국도시연구소 편(1998:29,36)참고. 근래에 김대중 정부가 대선공약이었던 그린 벨트 해제를 발표함으로써 앞으로 도시 주변의 녹지는 더울 줄어들 전망이다.
6) 예를 들어 환경론에 대해 폭로적 성격의 저서를 낸 과학 저널리스트 R. Bailey(1999) 참고.
7) M. Sagoff, in Environmental Ethics v.7 (1985:104).
8) 달리 말해 연구 당사자에게 가치 배제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생태학의 지식에 대해 환경 위기론(보전론)과 환경 파괴론은 이견을 공유한다. 왜냐하면 한 생태적 연구 과제에 대해서도 생태학의 연구는 계속되는 실험계획에 따라 다른 결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또는 의도된 실험계획에 따라 가능한 의도된 결과에 수렴해 가는 실험을 반복할 수도 있다). 사고프는 이러한 생태학의 이론(가정) 전복 현상을 전문적인 생태학 간행물을 인용하며 지적한다. 예를 들어 염분 습지와 근접 유역 간의 물질 교환(outwelling에 의한 에너지 이동)에 관한 생태학적 이론은 경제성을 내세운 습지 유용론(보전론)과 습지 무용론에 각각 유리하게 적용되었다가 불리하게 판정된 반전의 양상을 보여준다. M. Sagoff(1985:106ff) 참고.
9) 『자유의 생태학』에서 인간 현상과 자연 현상의 분리에 대한 비판을 내화·지양하고 양자의 상호연관성의 전체 구조를 밝힐 목적으로 사회 생태론을 전개시키는(22) 북친은 근(현)대 인간의 자연 파괴 능력이 자연에 관한 인간의 재구성 능력(생태친화적 응용기술의 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이런 방향전환적 의식과 감각의 미비가 문제임이 지적된다(19). 그런데도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생명체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생물계를 조작가능한 정복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위험하다고 북친은 말한다. 왜냐하면 자연에 대한 무차별 정복은 자연에 허용가능한 일말의 자활성마져 남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이 자활성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예속을 뜻하지는 않음). 더군다나 북친의 사회 생태론에서 자연에 관한 미래계획은 일방에 완승을 안겨 주는 격투적 체스 게임이 아니라 선박 조종술에 비유된다(25). 또한 북친은 자연사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아직 선사시대 수준이라고 말한다(34). 이런 시기적 조건에서 그는 상호 차이가 있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풍부한 발전의 연계점(상호적 길들임의 조건)을 찾아내려 한다(35). 이상은 M. Bookchin(1981:ch.1) 참고.
10) M. Sagoff(1989:28).
11) 앞의책, 26-27.
12)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에 따르면 시민은 정의의 두 가지 원리를 원초적 입장에서 도출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이것을 구성하는 주체이다. 역동적인 시민의 정치 문화로부터 영향 받으면서, 원 초적 입장의 당사자로부터 도출된 정의의 원리의 구성은 시민에게서 일어난다. 즉 시민은 정의의 원리가 일어나는 환경으로서의 정치적 문화를 경험한 주체이면서 이 정의의 원리가 현실에서 구 성되도록 하는 주체이다. Rawls(1993:48-88) 참고.
13) Sagoff, 앞의책, 34-35.
14) Edwards(1987:76).
15) 가치의 발생을 정치경제학적으로 살펴 보면, 맑스는 사용가치를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한 가치이자 물리적 속성체로 본다. 사용가치는 인간의 노동을 거치면서 상품화되어 다른 상품과 일정한 비율로 교환되는 교환가치가 된다. 따라서 인간의 노동이 가미되지 않거나, 임금 및 이자와 함께 사회적 총생산의 한 요소인 차액 지대로 전환되지 않는 자연의 사용가치는 인간이 추상적 노동이 응고된 교환가치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교환가치가 될 수 없는 자연의 사용가치, 비사용가치는 정치경제학 논의의 밖에 있다. 맑스, 『자본론』I권(1991), 43-51 참고.
16) 가치 판단에 의한 ‘좋음’(goodness)이 인간의 주관에서만 성립하는 비자연적(비실재적)인 것인지 혹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인지에 관한 도덕적 실재론의 논쟁에서 전자를 대변하는 입장은 고전적으로는 Moore(비자연적 속성으로서의 가치), 현대적으로는 Mackie(실재에 대한 반사 작용으로서의 가치)와 Ayer(정서작용으로서의 가치), Blackburn(표현적 기능로서의 가치)의 이론이고, 후자를 대변하는 입장은 McDowell의 이론이다. McDowell에 따르면 가치는 로크의 제 2 성질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감성(sensibility)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제 2 성질(예를 들어 ‘붉음’)이 지각 대상인 물체 실재한다고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치도 약한 의미에서 가치 경험자와 독립적으로 실재할 수 있다. A. Oliver, "Value, Ontological status of," Routlde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9, 1998:580-581 참고. 본문에서 가치의 기원을 인간 의식으로 본 것은 가치의 실재성도 인간의 의해 인식되어야 가능하다는 소박한 의미이다. 넓은 의미에서 McDowell의 가치 실재론도 인간 기원적인 의미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17) Rolston은 경제적 환원이라는 문제점이 일어나는 배경으로 관료 집단의 행정 편의성을 든다. 야생지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있어 가격이라는 평가 요소는 정책 결정에 있어 다른 설명 범주나 의견수렴의 복잡한 절차보다도 간결한 분석 도구이다. 따라서 가격이라는 요소는 전문적인 행정 관료에게 과학적일 뿐만 아니라 민주적인 것으로도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원 사용과 관련된 문제에서 인간을 배려하는 확실한 수단이 가격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H. Rolston, III, "Valuing Wildlands," p.23-24 참고.
18) Environmental Ethics에 실린 관련 논문들을 시기별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H. Rolston, III, "Valuing Wildlands,' v.7, 1985; S. Edwards, "In Defense of Environmental Economy," v.9, 1987; M. Sagoff, "Some Problems with Environmental Economics," v.10, 1988; J. M. Gowdy & P. R. Olsen, "Discussion Papers: Further Problems with Neoclassical Economics," v.16, 1994; M. H. I. Dore, "The Problem of Valuation in Neoclassical Environmental Economics," v.18, 1996.
19) 지불용의란 경제학적으로 소득 수준의 영향을 받는 개인적 효용(utility)의 변화를 반영한다. 지불용의는 다른 말로 소비자 잉여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한계효용학파의 창시자 Marshall에 따르면, 소비자가 지불할 용의가 있는 가격과 실제 지불한 가격과의 차액을 말한다. 차액이 클수록 소비자 잉여는 큰 셈이다. 안국신(1995:110) 참고.
20) 오호성(1998:202-203) : “가상상황평가법(contingent valuation method: CVM)은 비시장재화에 대해 실제로 시장이 존재하는 것처럼 가상적 시장을 설정하고 설문조사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지불용의액수를 직접 묻거나 또는 우편조사를 통해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Hicks의 보상변화(CV) 또는 보상잉여(CS)를 산출하여 이를 비시장재화의 가치로 간주하는 방법이다. 가상상황평가법(CVM)은 Davis(1963)의 입찰게임법이 소개된 후 최근 10여년 동안 큰 발전...CVM의 이론적 근거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정부나 공공기관의 투자로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 환경이 개선되었을 때 소비자들의 지불용의액수(WTP)나 수취용의액수(WTA)로 직접 효용의 변화를 측정할 수 있다는 데 두고 있다. Hicks의 보상변화, 대등변화, 보상잉여, 대등잉여는 효용수준의 변화량을 뜻하고 WTP와 WTA는 효용수준의 변화를 재는 수단이다.”
21) Edwards(1987:79).
22) 오호성(1998:189-190): “선택가치(option value)는 현재는 사용하지 않으나 미래에 사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래의 ‘선택’이 가능하도록 하는 자원의 보전가치를 의미한다. 이는 미래의 선택을 위해 지불할 용의가 있는 일종의 보험료 같은 期待價値(expected value)를 의미한다...존재가치(existence value)는 특정자원을 현재 이용하지 않고 있으며 미래에도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얻는 효용을 말한다...유증가치(bequest value)란 현재 이용하지 않고 있으며 가까운 미래에도 이용할 가능성이 없으나 후손들이 즐길 수 있도록 자연환경의 보존을 위해 지불할 용의가 있는 가치를 말한다.”
23) R. Rowe et al., "An Experiment on the Economic Value of Visibility," Journal of Environmental Economics and Management, 1980:2(Sagoff(1988:64)에서 재인용).
24) 피실험자가 공유되는 야싱지의 혜택을 받는 사람이라면 야생지 개발의 저지를 위해서는 세금으로 갹출될 자불용의액수(WTP)를 문의받고, 야생지 개발을 허용하기 위해서는 보상으로 받을 수취용의액수(WTA)를 문의받는다. 특히 수취용의액수에 관한 조사는 피실험자가 야생지의 소유자일 때 주로 사용된다.
25) 법리적으로 대지에 대한 두 거래 당사자의 필수적인 교환 조건인 자발적 매매 의사(동의)가 최고가 입찰가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매입하려는 사람이 아무리 큰 액수의 지불 용의를 제시해도 소유자의 동의가 없다면 매매가 이루어질 수 없다. Sagoff(1988:60) 참고.
26) Sagoff(1988:60-61).
27) 아도르(ardorshin), "정회상님의 “공공재”에 대한 논의에 답하며“, 자유기업센터 토론전문사이트-자유토론(www.toron.org), 1999/9/9.
28)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오염 배출권 거래라고도 한다. 오염 배출권 거래는 오염을 일으킬 기업과 지역 주민 사이의 거래일 뿐만 아니라 기업과 기업간의 거래도 포함한다. 즉 선진국이 핵폐기물을 후진국에 수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기업은 다른 기업에 오염물을 팔거나 오염물의 처리를 대리시키는 거래를 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기업들이 직접적으로 환경 보전을 위해 오염을 줄이지는 않지만 위와 같이 오염 배출권 거래라는 영리에 의해 우회적으로 오염을 최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29) 현재의 영향이 미래에 미치는 결과, 곧 미래 사건의 불확실성은 미래세대에 대한 사회적 할인의 한 근거가 된다. 할인(discount)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자연으로부터의 편익은 주로 현세대에게, 이 편익에 대한 비용은 미래세대에 전가한다면, 이때의 할인율은 0과 ∞ 사이에 있다. 할인율이 0일 때 비용-편익상 현세대와 미래세대 사이의 차별이 없어지고, 할인율이 음일 때 미래세대에 대한 고려가 현세대에 대한 고려보다 앞선다. Spash(1998:119-123) 참고.
30) 바틀렛은 인간과 하등생명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생태적 합리성의 개념과 시간 지평이 다른 형태의 합리성에 비해 인간중심주의가 결여되다는 단점을 지적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생태학으로서의 경험과학이 윤리학과 접할할 가능성이 있는 상호 연관적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Bartlett(1986:230ff;233) 참고.
31) 신고전파 경제학이란 희소성이란 제약조건에서 개인의 ‘선택기준’(비용을 최소화하고 편익을 극대화하는 ‘최적선택’)을 모든 경제행위의 기본관점으로 보는 것으로, 스미스에서 리카도, 세이, 밀에 이르는 고전파 경제학과 구별되고 1870년대 이후 마샬의 ‘한계혁명’의 ‘희소성 관점’을 수용한 모든 경제이론을 지칭한다. 이상호(1995:130-137) 참조.
32) 환경에 관한 우리의 현실은 거래불가능성의 거래가능성을 너무도 잘 보여준다. 도심주변의 고유지인 하천의 자연보전과 도심의 외곽도로화를 위한 하천 부지이 고가도로 건설 사이의 거래는 하천에서 향유되던 경관의 가치를 자가운전자의 편의를 위한 혼잡한 차량의 소음과 매연의 증대로 대치하는 것이다. 아마도 남한처럼 한정된 좁은 토지에도 불구하고 자가운전자를 위해 도로를 빠른 속도로 확장해 가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38) Sagoff, 앞의책, 주4 : “어떠한 경제학자도 어떤 사람이 자신을 실질적인 의미에서 더욱 좋게 해주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지불용의가 있음으로 보여주는 증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주7:“비용-편익 분석은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계획 도구이며 효율성은 자유로운 시장을 관료적 통제로 대체한 독단적 체계에서만 가능하다.”
39) 파레토 최적이란 현재의 실현가능한 자원배분상태에서 더 이상의 상호이득(어느 한 사람의 후생감소없는 전체적 후생 증가)을 바랄 수 없는 상태를 말하며, 파레토 최적의 상태에서 어느 한 사람이 이득을 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자원을 뺏어오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데 파레토 최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파레토 우위를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파레토 우위가 성립된 이후에야 파레토 최적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어떤 두 배분 상태를 비교할 때 한 배분상태가 다른 배분상태보다 ‘파레토 우위’(Pareto superior) 또는 ‘파레토 개선’(Pareto inprovement)이라고 부른다.” 후자의 기준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한 배분상태가 실현가능하고 다른 모든 실현가능한 배분상태와 비교해 볼 때 이보다 파레토우위인 배분상태가 없으면 이 배분상태를 파레토최적이라 한다. 즉 사회 내의 어떤 사람의 후생을 감소시키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후생을 증대시킬 수 없는 실현가능한 배분상태를 파레토 최적이라 하는 것이다.” 안국신(1995:488-489).
40) Dore(1996:65-66).
41) Dore(1996:69-70).
42) Sumner(1984:27-33).
43) Bartlett,"Ecological Rationality," p.221;224ff,239: H. A. Simon은 고전파 경제학도 실질적 합리성과 최적화된 목정의 가정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즉 고전파 경제학은 자연 환경에 의한 인간 사회 발전의 본래적 제약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공리 체계내의 연역적 추론을 강조하는 학적 설명구조를 갖추었다. 한편 Bartlett은 환경정책을 평가하는데 있어 절차적이고 실질적인 생태 합리성을 다른 모든 합리성의 근저 논리로 본다.
44) 담화와 관련된 이론의 정확성과 실천의 구속성에 대한 구분과 설명에 대해선 장춘익(1994:300-301) 참고.
45) Shrader-Frechette(1982:37-47). 이하 인용은 본문에 가로친 페이지 수로 표기.
46) 이런 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본다면, 대기오염을 줄인다는 목적을 위해서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은 복수의 대안을 갖는다. 정부는 동일한 비용을 자동차의 공학적인 오염규제 장치 개발을 위해 기술 연구소를 지원하는데 쏟거나 대중교통의 장려를 위해 대중교통체제 개선에 투여할 수 있다.
47) A. Naess,"Simple in Means, Rich in Ends," in: Zimmerman(1993: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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