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스려진 사회에서는 보편적인 부유가 민중의 최하층계급에까지 미치고 있는 것은 분업의 결과로서 생긴 여러 가지의 기술에 의해서 생산물이 매우 증진하였기 때문이다...우리들은 수천 명의 인간의 조력과 협업이 없이는 문명국에 있어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가 단순 용이하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보통의 가재도구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우리들이 식사를 준비할 수 있는 것은 푸주, 술집 또는 빵집의 박애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때문인 것이다.”1)
이러한 분업에 대한 예찬은 유명한 핀 제조의 예에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그러나 우리가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나사만을 돌리는데 미쳐버리는 찰리 채플린을 볼 때, 유사한 이 장면들은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공장에서 나사만을 조이는 일에는 인간의 기계화와 노동의 소외 외에도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다. 그것은 생산의 과잉이다. 즉, 분업에 의한 생산력 증대로 풍요로워진 상품들이 팔리지 않는다면, 분업의 효과는 제로인 셈이다. 이것을 마르크스 식으로 표현하면, 상품이 화폐와 교환될 수 없다면, 이 상품은 교화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용가치 마저도 상실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이렇듯 상품이 화폐와 교환되지 않을 수 있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신용으로서, 이는 정해진 미래의 어떤 시기에 완료시킬 것이라고 인정된 결제의 지연이다.2) 신용거래계약은 미래완료형태의 보증서로서 자본주의 상품관계의 성장과 몰락을 설명하는 양면의 동전이다. 현재 미국발 증시악재의 원인으로 지목된 비우량주택담보대출(Sub Prime Mortgage)은 이러한 신용의 위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집값 하락과 금리 상승으로 비우량 고객들의 주택담보대출이 제대로 회수되지 않자 대부업체의 파산으로 악재의 시공 테이프가 끊어졌다. 이 부동산을 매각하려 해도, 매각대금이 대출금과 이자에 밑돈다면 이 채권은 부실채권이 된다. 이것은 과열된 한국의 부동산 시장에 대한 반면교사다. 고액 대출로 사들인 집들이 높은 대출 이자율을 상쇄하고 남을 차액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미래에 완료되기로 약정된 결제는 완료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용의 위기가 초래하는 처참한 도미노 붕괴를 막기위한 처방은 무엇인가? 여기서 예외 없이 웃통을 벗고 국가가 등장한다.
3.국가의 개입
경제의 조정자로서 국가의 개입을 본격적으로 인식한 경제학자로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조지프 알로이스 슘페터가 두드러진다. 경제학자이자 금융인, 통상 외교관으로도 활약했던 케인스는 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승전국인 영국의 경제 참모로 평화회담에 참여했다. 이는 말이 평화회담이지 독일을 철저하게 붕괴시키려는 카르타고식 평화3)일 뿐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독일민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 가져오는 역효과다. 가라타니 고진에 따르면, 한 지배 국가가 다른 피지배 국가를, 또는 국가가 인민을 약탈만 한다면 이 국가는 존속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국가는 인민에게 재분배를 해주어야 인민으로부터 수탈할 꺼리가 생기며, 이런 교환관계가 구축되어야 국가는 안정적으로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수탈과 피수탈의 지속적 관계는 약탈-재분배가 호수적 교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일어나야 한다.4) 물론, 케인스가 국가를 가라타니 고진처럼 이런 식으로 몰고 간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굶주린 인민의 ‘광기’를 두려워했을 뿐이다.
“인간이 항상 조용히 죽는 것만은 아니다. 굶주림을 당하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무기력과 절망에 빠지지만 어떤 사람들은 신경불안의 히스테리와 광적인 절망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곤궁에 처한 사람들은 현재 남아 있는 사회조직을 전복시키고, 각자의 거스를 수 없는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문명 자체를 수장시킬 수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과 용기와 이상주의를 모아 대항해야 하는 위험이다.”5)
그러나 케인스를 근본적으로 괴롭힌 것은 단지 굶주림의 문제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맬서스가 어렴풋이 인식했듯이, 저축이 전반적 과잉을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에 케인스는 정면으로 다가섰다. 임금, 지대, 이자 등 모든 소득은 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소득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경제의 끊임없는 재생산은 화폐가 주머니에서 주머니로 끊임없이 오고가는 과정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저축이나 투자로 화폐의 진행이 동결되면 화폐소득의 감소가 일어난다. 물론 저축이나 투자는 더 많은 소득의 발생을 목적으로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투자의 목적이 자동적으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즉 저축과 투자는 정확히 투입-산출을 맞출 수 없어 언제든 서로 어긋날 수 있는 시소게임을 하는 것이다. 늘어나는 저축에 비해 투자가 적을 수 있고 늘어날 투자에 보태기에 저축이 적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에 대해 저축과 투자에도 수요공급의 원리를 적용한 금융시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저축이 넘칠 때는 금리가 폭락해 투자유인을 낮추고, 저축이 모자랄 때는 금리가 상승해 투자유인을 높일 수 있는 경기순환의 자동안정장치를 고려해 볼 수 있지만, 이런 자동안정장치는 1929년 대공황 때 작동하지 않았다. 금리의 계속적 하락에도 불구하고 회복불가능했다. 구매력은 떨어지는데 실업마저 늘어나 저축은 바닥나고 투자는 위축됐다. 투자가 있더라도 투자는 쉽게 포만감을 느낄 수 있어, 중단 없이 대체 투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경제활동은 수축된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국가의 전반적 구매력을 높여서 경기활성화를 자극하는 ‘펌프에 마중물 붓기’(priming the pump)이다. 이것은 취로사업을 시작으로 대규모 건설사업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케인스가 제안해 시행된 대안은 아니고 루스벨트에 의해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정책을 설명하는 이론으로서, 기업이 확장할 수 없다면 대규모 정부지출을 감행해서라도 국가가 불황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처방은 적어도, 실업자들을 구제함으로써 불황의 더미에서 구매력을 끌어내 소비를 자극한 점에서 성공적이었다.6)이런 설명은, 신자유주의의 주도적 이념인 시장의 자생적 질서라는 생각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보여준다.
슘페터 역시 불황이 발생했을 때 사회적 긴장완화로 정부지출이 필요할 수 있다는데 동의했지만, 호경기와 불경기의 교차 속에서도 자본주의의 꾸준한 성장이라는 견인차를 놓지 않았던 케인스와 달리 장기적 전망에서 슘페터는 정반대의 의견을 끌어냈다. 슘페터는 혁신적 기업가가 없다면 자본주의가 정체에 빠져, 변화 없는 반복으로 생산에 기여한 비용 이상의 모든 수입이 사라진다고 봤다. 스미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이윤의 원천은 노동이나 노동의 착취, 자본의 절제로 설명되어 왔으나 슘페터는 이윤을 정태적 경제라는 순환적 흐름에서 벗어날 때 성립하는 것으로 봤다.7)그렇다면 정태적 흐름의 경제에서 왜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 것인가?
“처음의 개선은 전 산업으로 퍼져 나가고 분별없는 은행대출과 투자지출의 홍수가 호경기를 가져온다. 그러나 바로 이 일반화의 결과, 격차의 우위가 없어지게 된다. 경쟁으로 인해 가격은 새로운 생산비 수준으로 내려가도록 강요당한다. 이윤이 감소함에 따라 투자도 감퇴한다.”8)
따라서 끊임없이 생산요소를 창조적 방식으로 결합시켜서 잉여를 창출하는 혁신가 없이는 자본주의는 연명할 수 없다. 즉, ‘그럴듯한 자본주의’라도 가능하려면 혁신가의 지혜가 필요하지만, 슘페터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에 어둠의 그림자를 던진다. 혁신은 결국 관행화되고 자본이 구사했던 이성의 칼날은 이제 자신에게 겨눠진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지성의 힘이 결국 이 체제의 한계를 넘어 온화한 관료적 계획경제로 나아감을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다른 수많은 기관의 도덕적 권위를 파괴한 후에 결국에는 자신을 겨냥하는 비판적 정신구조를 창조한다. 부르주아는 합리주의적 태도가 교황과 왕의 신임장 앞에서 멈추지 않고 사유재산과 부르주아적 가치의 전체 일람표 체계를 공격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을 보고 놀란다.”9)
4.다시 고전파에로
다시 우리가 이번 달에 만나려 했던 고전파의 두 계승자에게로 가보자. 앞서서 말했듯이 동시대인이자 친구인 맬서스와 리카도는 스미스의 경제학을 계승하면서도 그를 비판해 새로운 경제이론을 제시했다. 그런데 맬서스의 경우는 다소 곤혹스러운 위치에 있다. 역사상 그의 『인구론』만큼 파괴적 영향력을 미치면서도 가장 혹독하게 비판받은 작품도 드물겠지만, 이런 논란의 와중에도 불구하고 경제사에서 맬서스의 업적은 리카도가 그의 인구론을 부분적으로 수용했다는 사실과 저축이 전반적 과잉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의혹을 맬서스가 던진 점 외에는 별로 없다. 오늘날 인구학의 분야에서 분명히 맬서스의 『인구론』은 고전의 반열에 올랐고, 현재 중국이 시행하고 있는 강력한 인구통제 정책에 분명히 기여한 점은 있지만, 현재의 인구학은 장기적으로 세계의 인구가 증대 보다는 정체상태로 접어들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10) 더군다나 맬서스의 인구론이 가진 치명적 한계는 이미 당대에 제기됐다. 그의 인구통계 자료가 당시 대규모 이민으로 인구가 25년마다 증가세를 보인 미국을 대상으로 한 점, 영국에서 곡물법의 폐지 이후 인구가 국가의 자원을 고갈시킬 정도로 증가하지 않은 점을 들 수 있다.
이제 눈을 돌려, 맬서스의 인구론을 수용해 지대이론을 펼친 리카도를 주목하자. 리카도가 지대이론을 펼친 사회적 배경에는 19세기 초 산업화에 따라 급격한 변화를 겪은 영국의 국내상황이 있다. 당시 곡물법의 영향으로 외국산 농산물의 수입이 금지되자 영국 내 곡물가격이 치솟았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의 늘어난 생계비로 인해 임금상승의 압박을 받게된 자본가들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맬서스의 저주어린 예고대로-사실 예고라기 보다는 현상의 관찰이었다-산업화에 따라 영국 인구는 증가했고, 당연히 곡물수요가 공급을 앞지르자 부셀당 소맥 가격이 4배로 치솟았고, 가격 인상에 따른 이윤은 지주에게 돌아갔다. 1846년 마침내 30년 만에 곡물법이 폐지되고 값싼 외국산 농산물이 들여오기까지 자본가 편에 가담한 리카도는 지주에 대한 전면전을 펼치기 위한 교범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주저인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였다. 제 2장의 지대론을 보는 것으로 그의 지대이론을 간략히 요약할 수 있다.
“지대의 상승은 언제나 그 나라의 체증하는 부의 결과이며 그 증가한 인구에 대해 양식을 제공하는 어려움의 결과이다...지대는 이용할 수 있는 토지의 생산력이 감소함에 따라 가장 급속히 증가한다...(이하는 리카도의 각주) 스미스 박사는 지대의 재생산이 사회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길게 설명하느라고, 지대가 높은 가격의 결과이며, 지주가 이 방식으로 취득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희생 위에서 얻는 것임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지대의 재생산에 의해서 사회에 절대적 이득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의 희생 위에서 이익을 보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11)
여기서 희생되는 계급은 노동자와 자본가이고 득을 보는 계급은 지주이다. 지대를 구성하는 것은 생산적인 자본과 비생산적인 자본 사이의 차이에 의존한다. 여기서 자본이란 그 비옥도가 상이한 고정자본으로서 토지를 지시한다. 따라서 토지의 불균등 상태에 따라 초래되는 차액이 지대를 인상시키는 요인이 된다. 즉 지대는, 모든 토지의 생산성이 동일하지 않다는 근거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이 생산성의 현격한 격차가 지대의 상승을 유발한다. 그런데, 지대로 발생하는 소득은 토지의 힘에서 나오는 불로소득인데 반해, 노동자는 혹독하게 일을 해야 임금을 받고, 자본가는 사업이라는 ‘쇼’를 해야 이윤을 얻는다12)는 사실에 리카도를 포함한 자본가 진영은 분노했다.
이상과 같은 리카도의 지대론은 헨리 조지의 지대론에 대한 이론적 토대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제학에서 부각시켜야 할 리카도의 기여는 이것만은 아니다. 맬서스와 더불어 그는 엄습하는 시대의 먹구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산업의 전반적 과잉의 조짐과 경제적 불평등에 대처하기 위해 리카도가 경제학에 도입한 무기는 강력한 추상이라는 수학적 모형이었다. 그러나 이런 무기는 그의 사후 100년이 지나서야 프랜시스 이시드로 에지워스와 앨프레드 마셜에 의해 정교하게 다듬어지게 된다. 그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리카도 역시 자본가에 의해 불가피하게 억눌린 존재로 간주했던 노동자들의 분노가 표층을 뚫고 분출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5.책을 덮기 전에
밤새 마신 술로 흐릿한 정신을 흐릿한 주말의 열차에 태우고 가면서 『세속의 철학자들』의 마지막 장을 넘긴다. 슘페터에게서 경제학을 배운 이 책의 저자인 로버트 하일브로너는 점점 수식과 그래프로 모형화됨에 따라 강력한 분석의 기능을 갖추었지만 비전을 잃어버린 현대의 경제학에 목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스미스와 마르크스 이후 목적을 상실한 경제학에게 다시금 비전을 심으려는 하일브로드는 조심스럽게 자본주의의 미래를 긍정하면서 그 방법으로 국가의 개입에 무게를 둔다. 스미스부터 슘페터까지 너무도 중요한 세속의 철학자들을 약올리다시피 다루면서도 그 핵심개념을 놓치지 않고 설명해 주는 이 탁월한 경제학자의 머리와 가슴엔 케인스와 슘페터의 세속철학이 강하게 운동하고 있다. 그것은 소련식 국가사회주가 아닌,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 체제에 가깝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절망적이지는 않은 상태가 북유럽에 현존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있는 것인가? 다음달에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을 접하면서 이 물음을 이어가 보자.
1) 아담 스미스, 최호진⁃정해동 역『국부론』상권(범우사, 2000), 27-32면.
2) 가라타니 고진, 조영일 역『세계공화국』(도서출판b, 2007), 90-91면.
3) 카르타고식 평화란, 로마가 포에니 전쟁 후 처음에는 배상금과 영토 포기로 카르타고를 옥죄다가 종국에는 전쟁의 싹을 자르고자 카르타고의 전체 시민을 학살 및 노예화시키고 카르타고를 불태우는 로마식 평화였다. 로버트 하일브로너, 장상환 역 『세속의 철학자들』(이마고, 2006), 341-340면 참조.
4) 가라타니 고진, 앞의책, 62면.
5) John Maynard Keynes, The Econoinic Consequences of the Peace (New.York: Harcourt, Brace, 1920), p.32.(하일브로너, 앞의책, 343면에서 재인용) 이러한 경고는 독일에서 나치즘이 발생한 이유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6) 로버트 하일브로너, 앞의책, 349-363면 참조.
7) 로버트 하일브로너, 앞의책, 383-390면.
8) 로버트 하일브로너, 앞의책, 392면.
9) Schumpeter,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p.126.(하일브로너, 앞의책, 400면에서 재인용)
10)이런 분석은 다음 책을 참고 바람. 헤르빅 비르크, 조희진 역 『사라져가는 세대』 Die Ausgefallene Generation(북코스모, 2006).
11)리카도,『 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비봉, 1991), 144면.
12)하일브로너, 앞의책, 125-1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