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우연찮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역사적 배경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라는 것을 알고 이 책을 보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생겼다. 마치 달의 후면을 볼 수 있는 듯한 관심의 발동이라고 느낀 것은, 러시아 인민의 관점에서 이 전쟁을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인데, 전쟁의 역사가 자국의 경우가 아니라면 가해자 중심으로 기술된 것에 익숙한 것도 원인이겠다. 특히 이 전쟁의 양상이 이렇게 잘 알려진 문호의 대작에서 다뤄졌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도 다소 어처구니가 없다. 이 책이 집 어딘가에서 굴러다닐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뒤져 보았으나 허사여서 도서관에서 대출을 했으나 범우사의 구역본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반납했다. 할 수 없이 최신 번역본을 구하러 나섰는데 문학동네 판은 4권중 1권만 출판되어 있다. 마치 지난날 토마스 만의 <요셉 이야기>(살림)를 읽던 것 처럼, 독자의 독서와 역자의 번역이 동시진행될 상황이다.
그사이 도스트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열린책들)와 손병홍의 <논리로 보는 패러독스 패러독스로 배우는 논리>(새문사)를 읽고 있다. 40년간의 지하생활에서 시작되는 <수기>의 1부는 예상치 못한 독백의 서술이어서 이것이 소설인지 수필인지 구분을 어렵게 하지만 2부로 넘어가면서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소설은 그렇다치지만, 에세이의 성격의 글이나 논문의 경우는 논리법칙의 구속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수기>의 이중 작가는 가상의 논적을 두면서 글을 진행하는데 이것은 그의 수기의 개연성을 측정하는 장치이다. 손병홍은 저 책에서 세상사에서 진행되는 역설적인 논증의 양상을 극단적으로는 허리케인, 보통의 경우는 바다의 파도에 비유하고 논리규칙을 명확히 추출할 수 있는 퍼즐놀이는 파도타기로 본다. 인간은 어떤 완성이나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 이후의 해체를 염원한다는 지하생활자의 비이성적 욕망론은 논증이라고 보다는 주장이겠지만, 주장의 개연성을 위해서는 논증의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으며, 문학을 논증의 틀로 보려고 하는 것은 패러독스한 현실에 대한 논리의 침투라고도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존재하지 않지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곧 반박할 수 없는 것이 엄밀히 말해 패러독스는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패러독스란 참으로 인정된 전제로부터 타당하게 추론된 결론이 일반의 상식과 믿음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거짓인 명제를 말한다.
이에 대해 대표적으로 알려진 패러독스의 예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 대머리의 패러독스다. 대머리의 패러독스를 명제로 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전제)
대머리는 머리카락의 수가 0개인 사람이다.
대머리인 사람에게 머리카락이 1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대머리다.
대머리인 사람에게 머리카락이 2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대머리다.
대머리인 사람에게 머리카락이 n+1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대머리다.
(결론)
머리카락의 수가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그는 대머리다.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역설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도 거짓도 아닌, 판단불가의 상태인데 반해 논리적으로 패러독스란 거짓 논증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