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예전에 건설현장에서 함께 일한 동료와 짧게 안부를 주고 받았다. 오래 갈 줄 알았던 평택현장이 올해 초반부터 일감이 줄어들다 최근에 다시 회복되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렇지 않은가 보다. 사실 한 현장이 3년 이상 지속되기는 힘들다. 3년이 뭔가? 3개월, 3일도 안되서 현장일이 끊길 수도 있는 것이 건설현장이다. 그래도 반도체공장 건설은 공기가 다른 현장에 비해 안정적인 편이다. 심지어 발전소 보다도.
현실이 이렇다 보니 팀단위로 움직이는 이들은 수시로 현장을 옮겨 다녀야 한다. 개별적으로 한다 해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팀을 따라 움딕이는 것이 여러모로 덜 피곤한 일이지만, 동물도 서식처가 바뀌면 힘든 것 처럼 새로운 현장은 낯설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움직이며 팀 뿐만 아니라 현장도 옮기는 일에 이골이 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뿐, 나이들고 이 현장 저 현장 돌아다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에 적합하고 민첩한 사람은 사실 팀장급의 사업주 외엔 드물 것이, 어차피 같은 노임을 받는다면 안정적인 공기의 동일현장이 임노동자에게 더 낫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돈에 흔들리는 사업자에겐 이런 일은 부수적일 뿐이다.
공기는 건설비용과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당사자 모두에게 민감한 일이지만, 옛날처럼 무리하게 공기를 단축하려다 사고가 나면 더 큰 문제이기에 건축주 입장에서는 더욱 신중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런 일은 반도체나 발전소, 대규모 아파트같은 대형 현장에 한한다. 한없이 늘어질 수 없는 것이 건설공기지만, 한 현장이 마무리될 때 까지 일하고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팀을 만나는 것도 운이다. 좀더 능력이 된다면 그런 팀을 만드는 것은 운을 만드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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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6 건설 노동의 공기 1
- 2023.12.25 혼돈의 성탄
- 2023.12.11 고독
- 2023.09.30 Europa des Chaos
- 2023.09.22 철야노동의 기억
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가 태어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짧게 언급되어 있다. 정적 안토니우스를 누르고 황제권을 확립한 아우구스투스의 칙령 아래 모든 로마 식민지에 호적이 강제됨에 따라 이스라엘에서도 타향에 있던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호적등재를 위해 고향으로 회귀해야 했다. 나사렛에 있던 요셉은 만삭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150 km 떨어진 조상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야했고, 결국 어렵게 도착한 그곳의 어느 사관에서 마리아는 아이를 출산했다. 베들레헴은 현재 팔레스타인의 도시로서 2만명 이상이 숨진 가지지구에서 70km 거리에 있다. 이 지역에서 비참과 혼돈의 강도가 2023년 전 보다 현재가 더 세지만 아무튼 예수는 혼돈의 시대, 혼돈의 장소에서 태어났다. 크리스마스 성극에서 '빈방 있습니다' 라는 토로로 유명한 여관 주인역을 맡은 한 아이의 상반된, 하지만 진실한 대사는 비참과 혼돈의 시대에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크리스마스 이브 사설에서 종교가 폭력적인 세계사에 기여하는 것에 관해 비관적으로 말한다. https://m.faz.net/aktuell/politik/inland/kommentar-zur-weihnacht-gott-mit-uns-19403899.html 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갈등과 살상이 벌어지는 일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쾰른 대성당에는 이슬람테러 주의경보로 경찰의 통제 하에 신자들이 입장하고 있다. 저마다 자신의 신들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탄압하는 것은 종교의 구시대성과 야만성을 보여주지만, 사실 종교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은 권력에 책임이 있다. 하마스 지도부와 네탄야후 처럼 말이다. 물론 종교가 이런 권력에 부역하는 일은 나치에 동원된 카톨릭처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종교로부터 세속화된 세계에서 어떤 주장이나 명제를 종교를 근거로 정당화하는 것은 더이상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물론 상식적인 윤리를 종교로부터 뒷받침 받는 것에 관해서는 굳이 비판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그 윤리라는 것은 종교로부터 계속적인 정당성을 끌어낼 수는 없다. 윤리의 기원이 종교일지는 모르지만, 종교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태양계로부터 벗어난 보이저호의 유영과 유사한 숙명이다. 왜? 영구불변한 진리라는 것은 그 말 자체가 허구적인 것이고, 그런 말 자체는 특정시대와 특정장소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알프스 산맥을 넘지 못한다.
세속화를 넘어 정교분리가 상식적인 헌법질서인 사회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야만을 넘어 불법이기도 하다. 종교의 이름으로, 혹은 유사종굥의 이름으로도.
군대에 가기 전 겨울방학의 어느 추운 밤, 미닫이 식의 창호 문이 달린 허름한 자취방에서 글을 쓰며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이 밤에 이곳에서 담배만 있다면 어느 누구와 함께 있지 않더라도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몇 년이 지나고 이런 생각을 동기생에게 얘기했는데 그의 답변이 기억나지 않지만, 별로 수긍하지 않는 편이었다.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정신없는 일과를 보내는 생활 속에서 그런 자아도취적 고독감이 파고 들어갈 여지는 없다. 아니 여유가 없다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포화 속에서 생명이 순간 순간 위협받는 상황에서 이런 말은 무의미하겠지만, 삶의 종점은 미뤄든 숙제처럼 저 편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잘 차려진 밥상에서 미식을 즐기며 죽음의 철학을 설파했다는 쇼펜하우어 못지 않게 사회의 결정적 구조는 개별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연동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보험산업은 병로와 죽음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다. 한국전쟁 후반기 지리한 휴전협상 속에서도 많은 인명을 앗아간 중부전선의 치열한 교전은 스탈린의 죽음으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아마도 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의 몰락 이후에나 끝날지 모른다. 개별체들의 죽음은 또 다른 세상을 여는 삶의 출구인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대면은 죽음 직전에 있는 나를 바라보는 하나의 연습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 더 나아가 나와 너,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될지 묻는 것이다.
Es gibt eine Kontroverse darüber, wie es mit den Flüchtlingsschiffen umgeht, die weiterhin im südlichen Meer nach Europa strömen, während der Krieg weitergeht auf der Ostseite. Im Bundesstaat Thüringen vor ein paar Tagen, während die deutschen Landtagswahlen im Herbst fortgesetzt wurden, ersetzte die rechtsextreme AfD schließlich die Linke und trat in die Macht ein, trieb ihre Dominanz auf der Ostseite an und erweiterte ihre Charta nach Nordwesten. Es wird teilweise im wirklichen Leben beobachtet, dass die aufregende Agitation des deutschen Nationalprioritätismus ihre Macht ausübt, indem sie sich von der Politik der Ampeln nährt, die kommen und gehen. Am Hauptbahnhof einer Großstadt, dem Hauptwohnsitz des Penners, ruft eine Person voller Wut, eine Person, die aus dem Nahen Osten oder der Türkei zu kommen scheint, auch einen jungen Stationsangestellten mit dunkler Haut an, nach Afrika zurückzukehren. Die AfD, die Ausländer hasst, ist eher ein Querschnitt des Trends, der von einem anderen Ausländer gut aufgenommen wird.
Das unruhige Zusammenleben der deutschen Koalition ist auch die Spiegel der unruhigen Integration Europas. Die vollständige Sitzung des Staatssekretärs für Kommunikation unterstützt nachdrücklich die Finanzierung des Deutschland Tickets, einer erfolgreich bewerteten Politik des öffentlichen Verkehrszuflusses, aber der Bundesminister für Verkehr der FDP, der als rechts eingestuft wird, ist unbestritten. Die Hälfte der finanziellen Unterstützung ist auf Bundesebene. Das rechte Italien muss jetzt die Einreise von mediterranen Flüchtlingsschiffen blockieren, aber der deutsche Innenminister der SDP besteht auf einer humanitären Einreise entlang der Linien der Europäischen Union. Innenministerin Nancy Fraser erscheint häufig in Medienberichten zum Thema Flüchtlinge, und sie hat jetzt im Herbst in Hessen ihre Stimme als Kandidatin für das Amt des Premierministers abgegeben. Hessens Wahlergebnisse sind ein weiterer wichtiger Wendepunkt.
Wenn es eine Ära geben wird, die nicht chaotisch ist, ist zu beobachten, inwieweit die Intensität des Chaos anhält, und der Grad der Stärke.
동편에서는 전쟁이 지속되는 가운데 남녁 바다에서는 유럽으로 끊임없이 몰려오는 난민선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놓고 논란중이다. 가을철 독일연방의 주선거가 연달아 이어지는 와중에 얼마전 있었던 튜링겐주 선거에서는 드디어 극우 AfD가 좌파당을 갈아치우고 집권대열에 들어섰고, 동부에서의 우세를 몰아 서북으로 전세를 확장하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신호등 연정의 정책을 먹이로 삼아 독일민족 우선주의라는 신나치적 선동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실생활에서도 일부 관찰된다. 부랑민의 주요거처인 대도시의 중앙역에서 무슨일로 분노에 가득찬 한 사람, 중동이나 터키 출신으로 보이는 사람도 피부색이 검은 젊은 역무원에게 아프리카로 돌아가라고 외친다. 외국인을 혐오하는 AfD가 오히려 또다른 외국인에게 호응을 받고 있는 추세의 단면이다.
독일 연정의 불안한 동거는 유럽이라는 불안한 통합체의 반영이기도 하다. 성공적으로 평가받는 공공교통 유입정책인 도이치란트 티켓의 재정지원에 관해 연방 16개 주 교통부장관들의 전체 회의체는 찬성이지만 우파로 분류되는 FDP 소속의 연방 교통부장관은 이에 난색을 드러낸다. 재정지원의 절반은 연방의 몫이다. 지중해를 떠도는 난민선의 입국을 우파집권의 이탈리아 정부는 이제 막아야한다는 입장이지만 SDP소속의 독일연방 내무장관은 유럽연합의 노선을 따라 인도주의적 입국을 주장한다. 내무장관 낸시 프레이저는 근간 난민문제를 놓고 언론보도에 자주 등장하는데 당장 그녀는 가을철 주총리 후보로 헤센주에 출사표를 던진 상태다. 하지만 여론조사상 이곳에서 SPD는 오히려 AfD에 밀리는 상황이고 CDU가 선두로 질주중이다. CDU와 AfD와 공조는 더이상 동부의 일부 시의회에서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유권자들 뿐만 유능한 정치역량을 가진 인사들도 속속들이 이 극우정당에 몰리고 있다.
유럽의 혼돈양상은 단지 지정학적 불안정의 문제일까? 유럽 내부에서만도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갈등처럼 언제든지 파열을 일으킬 수 있는 불안요소가 잠재해 있는데 유럽의 외곽은 더 말할것도 없이 유럽을 압박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대량학살을 감행할 것으로 의심되는 아제르바이잔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끊긴 러시아의 가스공급을 대체할 유럽의 공급처가 됐다. 인종청소를 피하기 위해 유럽으로 오려는 아르메니아인을 막을 것인가? 그들을 우크라이나의 피난민처럼 대우해 줄 것인가? 어쩌면 유럽이라는 전통적인 경계선이 흐릿해지는 것도 추후 새로운 역사의 발전방향으로 그려질 날도 멀지 않을지 모른다.
언제 혼돈스럽지 않은 시대가 있을랴마는, 혼돈의 강도가 어느 수준으로 지속되는지, 강약의 정도는 관찰할 수 있는 일이다.
작년 초여름 한 달, 약 반년 넘게 일한 평택현장의 한 전기팀에서 나와 잠깐 동일현장의 수장 숙식 철야조에서 일했다. 낮밤이 완전히 바뀐 생활이었는데, 기대했던 벌이에 비해 생체리듬의 붕괴와 팀내 우발사항으로 오래 일할 수 없었다.
일단 단가가 하루 8시간 2공수인 것이 미끼다. 숙소에서 오후 5시쯤 나와 저녁을 먹고 오후 8시부터 일한다. 중간 휴게시간 2시간을 빼고 오전 6시에 일이 끝난다. 시간만 놓고 보면 매력적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많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주간현장에 비해 야간 현장은 얼마나 한산한가. 평택삼성현장에서 주간에 2시간이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 점심을 먹는 일은 한바탕 전쟁이지만 야간은 이런 일이 없다. 이 시각에 현장 식당 자체가 운영이 안되고 주변에 즐비한 노점상도 잠들어 있기 때문에 뭔가 먹으려면 도보로 20~30분 거리의 편의점에 가야한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 식사는 거르고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가곤 했다. 정신없이 일을 하다보면 시간은 금방 흐르고 아침 퇴근 후 지정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고 숙소로 들어가 씻고 바로 누우면 간밤의 극심한 피로감에 금방 잠이 들지만 4시간 이상은 못자고 일어나곤 했다. 중간 중간 들락거리는 숙소 사람들 때문 이기도 하지만 낮에 깊히 잠들 수 없는 사정도 있다. 이렇게 몇주간 생활하다 갑자기 숙소를 옮기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숙소배정에 관한 소통에 문제가 생겨 하루에 2번이나 숙소를 바꾸는 일이 생겼고, 결국 배정받은 숙소는 내가 일하는 팀이 주로 쓰는 숙소였다.
복층 다세대 주택은 신축이긴 했지만 제대로 관리가 안되서 매우 지저분했다. 결국 생활리듬의 붕괴와 새 숙소배정에 반감이 생겨 다시 새로운 전기팀을 알아보고 그만뒀다. 장구류를 반납하기 위해 하청 회사 사무실을 방문해야 했는데 뜻밖에도 두 명의 직원이 나에게 친절하게 무슨 어려움이 있냐고 하면서 좀더 더 일할 수 없겠냐고 물었다. 사실 수장일이 육체적으로 더 고된 점은 있으나 철야노동이 맞지 않아서 그만둔다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잠시 함께 일한 60대에서 20대 사이의 동료들은 무난한 편이었고 팀장은 솔선수범형이었지만 뭔가 뒤틀린 일이 생기면 우악스러운 성깔을 터트리곤 했다. 그냥 견디고 계속 있었으면 사람들과도 그럭저럭 익숙해 질 수 있었을 것이지만, 더워지는 여름, 철야노동을 위한 한낮의 서늘한 휴식은 피곤함과 공허함이 먼지처럼 쌓여가는 시간이었다.
한주간의 철야작업이 끝나는 어느 토요일 아침, 식당에서 소주 일병을 하며 밥을 먹는 나에게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평택현장에 들어온지 얼마 안된 20대 동료는 핀잔을 줬다. 아마도 철야노동이 건강에 좋지 않다고 그에게 말했던것 같다. 건강생각하는 양반이 아침부터 소주를 마시냐는 것이다. 친구여, 이 정도는 한주간의 고되 노동 이후에 주어지는 정당한 보상이라네. 이런 맛도 없다면 이런 생활이 얼마나 갑갑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