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클라스 루만 : 구별의 사회이론

서술 Beschreibung 2024. 9. 11. 01:5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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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중단했던 루만의 '사회의 사회'를 다시 읽는다.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나 문단과 문단의 연결이 원할치 않은 단절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여의치 않으나 내용으로나 방법으로나 이런 독특한 이론을 자기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마치 '천 개의 고원'이나 '파사주 프로젝트'의 진입로와 퇴로가 온전히 독자에게 맡겨진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하나의 요약이나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학문사적 맥락에서 루만의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체계이론의 본론과 각론(사회체계이론과 부분 체계이론들)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진입의 문제다. 특히 학문세계 밖에서라면 더욱더 그렇다.

한가지 분명해 보이는 것은 루만이 도덕을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로 보는 점이다. 덕이라는 것은 온전히 인간에게 소급되는 것으로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자질이지만 생득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은 구별을 위한 활동으로 정의될 수 있다. 동식물세계에도 커뮤니케이션 활동이 있겠으나 인간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 그런 활동은 19세기에 들어서야 활용될 수 있었기에 역사성이 빈약하다. 한편 왜 구별인가? 가히 주제의식이라고 할 만큼 루만이 구별에 집중하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선과 악, 옳음과 틀림, 정의와 불의 등등의 이항대립적 이분은 끊임없이, 때로는 그 위치를 바꿔가며 진행하는 운동에 가깝다.

구별은 어떤 사태나 현상을 이해하는 주요한 방법이다. 정상상태로부터 비상사태, 즉 예외상황을 판별하는 것을 칼 슈미트가 주권자의 권리로 파악하는 것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구별의 활동은 도처에서 강도를 달리하며 행해지는 일이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본래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이 아님, 비인간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이 용이하면서도 주도적인 방식이었다. 마치 자유라는 것은 굴종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구별은 하나의 권리인가, 인식인가? 권리라는 것은 구별의 권한이 상이하게 나눠질 수 있다는 것이고,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출발점인 관찰이 상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찰의 지점에 따라 인식이 상이할 수 있다는 것으로 구별은 유효한가?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는 뫼비우스의 띠 것처럼, 구별되지만 언제든 구별이 무력해지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는 양당제 교대 정권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당들의 기원이 어찌 됐든 서로를 스스로 구별짓지만 교대로 국민의 선택을 받듯이 구별되면서도 구별되지 않는 역설이 일어난다. 어쩌면 민주주의는 구별이 더욱 섬세하고 다양할 수록 비로서 작동하는 원리일지도 모른다. 역설적 선택은 사실 강요에 가깝기 때문이다.



https://youtu.be/XW1fe20I5Z4?si=yeuV_gWWTZmNc1D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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