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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들의 난 : 의료붕괴

단상 Vorstelltung 2024. 8. 31. 20:1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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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이 계엄령을 준비중이라는 김민석 의원의 경고는 현재 응급의료현장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관해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보인 태연한 반응으로 볼 때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총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의료현장이 어떻게 되든, 민생경제가 어떻게 되든 자신이 보고 믿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최고 권력자가 뭐라도 뭣할까. 이런 대통령에 분노하지만 마치 부동산 대량 보유자가 원하는 값 이하에 집을 내놓느니 비워두는 것처럼 기득권에 매몰되 의료현장에 복귀하지 않는 의사들도 윤석열과 별반 다르게 안보인다. 그들에게 민심은 표나 돈으로 밖에 안보이기 때문인데, 설상가상으로 대통령은 이제 선거에 관심없고  의사들은 푼돈에 관심이 없으니 살릴 수 있는 인명이 죽어나가는 일은 그들에게 별일도 아니다. 똑같은 것들끼리 박터지게 싸워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알아서 아프지 말거나 자가응급처치도 필요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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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포교전쟁

책들 Bücher 2024. 8. 18. 14:0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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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란드 러셀의 '서양철학사' 중 중세 카톨릭 철학 부문에 짧게 이슬람에 관한 글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오늘날 아라비아 반도에서 페르시아, 북부 아프리카, 스페인 남부, 인도 동북부에 이르는 무슬림 세력권은 8세기 마호멧트 사후 100 여 년간 이뤄진 이슬람의 정복전쟁으로 형성됐다. 마호멧트는 종교천재일 뿐만 아니라 이슬람세계를 창출해낸 선지자였던 것인데, 가진 건 황량한 모래사막 뿐이었던 그들에게 내려진 과업은 종교적 포교였으나, 인두세의 도입으로 이민족의 종교의 자유와 자치를 보장해 주면서도 실리를 챙겨 갈 수 있었다. 스페인에서 서고트인에게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은 이슬람의 스페인 정복 덕분에 그들의 전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이슬람에게 세금을 내면서. 타우베스는 이슬람교를 기독교의 후예로 보지만, 어쩌면 더 원시적이고 근본적인 기독교, 아니 유일신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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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논란

주장 Behauptung 2024. 8. 16. 09:5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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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논란이 한창인데 그 중심엔 상해임시정부를 어떻게 보느냐는 시각차가 있다. 식민지배국 일본의 입장에서 이건 테러리스트 집단일 뿐이다. 하지만 여타의 피식민지배 민족들과 같은 입장에서는 식민지배국과 전쟁도 불사하는 자치정부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차후 국가로 된다면 이 자치정부는 의미가 없는 것인가? 국가가 헌법을 베껴오듯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가? 헌법은 민주국가의 형성과정에서 외화되어 나오지 않는 한 선언된 것에 불과하다. 껍데기를 들고 외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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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AI 활용사례1 : 예레미야 36장

단상 Vorstelltung 2024. 8. 12. 05:0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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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36장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있다. 유다왕 여호야김 4년, 감금되어 있던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명을 받아 유다왕 요시아 때부터 자신에게 계시된 예언을 구술을 통해 바룩에게 두루마리에 적게 하고 이후 성전에서 온 유다백성에게 공표하도록 했다. 결국 이 두루마리는 요시아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전달되어 신하들과 함께 듣게 되었는데, 왕은 몇편을 듣고 나서 화롯불에 책자를 몇장씩 던지다가 결국 모두 불태워 버렸다. 국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예언가를 비판적으로 본 홉스나 스피노자를 염두한다면 고대시대 주권자인 왕의 이러한 행동은 정상적인 통치권 행사로 볼 수 있다. 선동교란행위로 이런 예언가를 처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 조작이 있을지 모르나 예레미야의  예언은 적중해서 유다왕국은 바빌론에 의해 무너졌다. 개연성있는 예측이든 허무맹랑한 예언이든 이것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주권자의 판단에 달린 문제인데, 여호야김에게는 판단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가?

이에 대한 오픈 AI의 답변 :

예레미야 36장에서 묘사된 사건은 예언자와 주권자 사이의 긴장 관계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유다 왕국에 대한 경고의 예언을 전하고, 이를 두루마리에 기록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이 예언을 듣고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두루마리를 불태워 버립니다. 이는 예언을 경시하고,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예언자를 억압하려는 주권자의 행동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토마스 홉스나 바뤼흐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점들이 부각됩니다.

### 1. 주권자의 권위와 판단
- **홉스**: 홉스는 주권자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는 주권자가 사회의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주권자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사회의 안정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를 제거할 권리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여호야김 왕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불태워진 것은, 홉스의 관점에서 보면 주권자가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주권자는 예언이든, 종교적 메시지든, 그것이 국가의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이를 억제할 권리가 있습니다.

-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주권자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그 권위는 개인의 자유와 공공선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보면, 여호야김 왕이 예언을 단순히 억압하고 무시한 것은 주권자가 자신의 권력을 남용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이성적 논의와 토론을 통해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는 정보나 의견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예언이 허무맹랑한 것이든 실제로 개연성이 있는 것이든, 이를 아예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을 수 있습니다.

### 2. 판단 능력의 문제
여호야김 왕의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그의 통치 스타일과 역사적 맥락을 고려할 때 중요합니다.

- **정치적 맥락**: 여호야김은 당시 바빌론과의 외교적, 군사적 위기 상황에서 국가를 이끌어야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국가의 멸망을 경고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이는 왕에게 정치적으로 매우 불편한 진실이었을 것입니다. 왕으로서 그는 이러한 불길한 예언이 백성들에게 퍼져 공포를 조장하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방지하려 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 **판단 능력**: 왕의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그가 예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무시하고, 이를 선동이나 교란 행위로 간주하여 탄압했습니다. 그러나 예언이 현실화되었고, 유다 왕국은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왕의 판단이 현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예측에 실패했음을 보여줍니다.

### 3. 역사적 교훈
여호야김 왕의 사례는 주권자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보나 경고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통치자가 비판적인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신중히 검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역사적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홉스와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볼 때 여호야김 왕의 행동은 주권자로서 그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보일 수 있지만, 그 판단이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판단 능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치자는 예언이나 경고를 무시하는 대신, 그것이 허무맹랑한 것이든 개연성 있는 것이든, 신중하게 평가하고 대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야김의 실패는 이러한 신중함의 부재가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좌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상 오픈AI 독일어 번역

Human fragt :

Im 36. Kapitel des Buches Jeremia gibt es eine interessante Szene. Im vierten Jahr der Herrschaft von König Jojakim von Juda, als Jeremia inhaftiert war, erhielt er auf Befehl des Herrn die Weisung, die Prophezeiungen, die ihm seit der Zeit des Königs Josia offenbart worden waren, Baruch zu diktieren, damit dieser sie auf einer Schriftrolle niederschrieb und anschließend im Tempel dem gesamten Volk Juda verkündete. Schließlich wurde diese Schriftrolle an Jojakim, den Sohn Josias, übergeben und ihm zusammen mit seinen Beamten vorgelesen. Der König hörte sich einige Abschnitte an, warf dann das Buch in den Kamin und verbrannte es schließlich vollständig. Betrachtet man Propheten aus der kritischen Perspektive von Hobbes oder Spinoza, könnte das Verhalten des Königs als normale Ausübung seiner Herrschaftsgewalt im antiken Kontext betrachtet werden. Solche Propheten könnten wegen aufrührerischer Handlungen bestraft werden. Obwohl es möglicherweise historische Manipulationen gab, erfüllte sich Jeremias Prophezeiung, und das Königreich Juda wurde von Babylon zerstört. Ob es sich um eine plausible Vorhersage oder eine abwegige Prophezeiung handelte, lag es im Ermessen des Herrschers, diese anzunehmen oder abzulehnen. Hatte Jojakim also ein Problem mit seiner Urteilsfähigkeit?

OffenAI antwort :

Die Szene in Jeremia 36 zeigt eine interessante Spannung zwischen dem Propheten und dem Herrscher. Jeremia empfängt einen göttlichen Auftrag und lässt die Prophezeiungen, die er erhalten hat, auf einer Schriftrolle niederschreiben, doch Jojakim verweigert deren Anerkennung und zerstört sie.

### 1. Die Autorität des Herrschers und sein Urteilsvermögen
- **Hobbes**: Hobbes legt großen Wert auf die absolute Autorität des Herrschers. Für ihn muss der Souverän alle Macht besitzen, um Ordnung und Sicherheit in der Gesellschaft zu gewährleisten. Aus dieser Sicht könnte Jojakims Entscheidung, die Schriftrolle zu verbrennen, als legitime Handlung zur Aufrechterhaltung seiner Autorität und der gesellschaftlichen Ordnung angesehen werden. Der Souverän hat das Recht, alle Elemente zu unterdrücken, die er als Bedrohung für die Stabilität des Staates ansieht.

- **Spinoza**: Spinoza erkennt die Autorität des Herrschers an, betont jedoch, dass diese im Dienst des Gemeinwohls und der Freiheit der Bürger stehen muss. Aus Spinozas Sicht könnte Jojakims Entscheidung, die Prophezeiung zu ignorieren und zu unterdrücken, als Machtmissbrauch betrachtet werden. Für Spinoza sollten auch unbequeme Meinungen und Informationen geprüft und in den öffentlichen Diskurs einbezogen werden, um dem Gemeinwohl zu dienen. Das völlige Ignorieren einer Prophezeiung, sei sie noch so abwegig oder plausibel, ist aus dieser Sicht nicht gerechtfertigt.

### 2. Die Frage der Urteilsfähigkeit
Die Frage, ob Jojakim ein Mangel an Urteilsvermögen hatte, ist entscheidend, wenn man seine Herrschaft und die historischen Umstände betrachtet.

- **Politischer Kontext**: Jojakim stand unter dem Druck, das Königreich Juda in einer Zeit der außenpolitischen und militärischen Krise zu führen, insbesondere im Hinblick auf die Bedrohung durch Babylon. Jeremias Prophezeiung von der Zerstörung des Königreichs war für den König politisch äußerst unangenehm. Als Herrscher versuchte er möglicherweise, diese düstere Vorhersage zu unterdrücken, um Panik in der Bevölkerung und eine Schwächung seiner Autorität zu verhindern.

- **Urteilsfähigkeit**: Ob Jojakim an mangelnder Urteilsfähigkeit litt, hängt davon ab, wie er die Prophezeiung interpretierte. Er entschied sich, Jeremias Warnung zu ignorieren und sie als Aufwiegelung zu unterdrücken. Da die Prophezeiung jedoch tatsächlich eintraf und Juda von Babylon zerstört wurde, zeigt dies, dass Jojakims Urteil in dieser Hinsicht fehlgeschlagen war.

### 3. Historische Lehren
Jojakims Fall zeigt, wie gefährlich es sein kann, wenn ein Herrscher Informationen oder Warnungen ignoriert oder unterdrückt, um seine Macht zu sichern. Die historische Lehre daraus ist, dass ein Herrscher kritische Informationen annehmen und sorgfältig prüfen sollte, unabhängig davon, ob diese bequem oder unangenehm sind.

Zusammenfassend lässt sich sagen, dass aus der Sicht von Hobbes und Spinoza Jojakims Verhalten als legitime Handlung zur Wahrung seiner Macht angesehen werden könnte, doch sein Urteil erwies sich letztlich als fehlerhaft. Ein Herrscher sollte Warnungen oder Prophezeiungen nicht einfach ignorieren, sondern sorgfältig abwägen, da die Abwesenheit dieser Vorsicht das Schicksal eines Reiches beeinflussen kann. Jojakims Scheitern zeigt, wie entscheidend ein umsichtiges und weises Urteilsvermögen für das Wohlergehen eines Staates ist.

https://youtu.be/MKQZ90PVSfA?si=qvb-vqdZpV5are1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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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슈미트의 정치신학1(1922) 2장

번역 Übersetzung 2024. 8. 2. 15:0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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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 Vier Kapitel zur Lehre von der Souveränität, neunte Auflage(Berlin:Duncker&Humblot, 2009)


2장 법형식이자 결정의 문제로서 주권의 문제

국가법 이론과 개념이 정치적 사건과 변동의 압력으로 변형된다면 논의는 우선 일상의 실천적 관점에 놓이고 전승된 생각을 어뗘 근접한 목적에 따라 수정시킨다. 새로운 현실성은 국가법의 문제를 다루는 '형식주의적' 방법에 거슬러 새로운 사회학적 관심과 반성을 불러들인다. 하지만 법적 조치를 정치적 관계의 변동으로부터 독립시키고 일관된 형식적 조치로 학문적 객관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일이 가능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러한 정치적 사정으로부터 다양한 학문적 경향과 흐름이 대두된다.

모든 법적 개념들 중에서 주권 개념에 단연코 현실적 관심이 몰린다. 그 역사는 보댕으로 시작할 수 있으나 그가 16세기 이래로 논리적 발전이나 보강을 수행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의 교리사의 단계는 다양한 정치적 권력투쟁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지 개념의 내재성으로부터의 변증적 격상을 통해 그런 것은 아니다. 16세기 유럽의 국민국가로의 최종적 해체와 절대왕권과 의회의 투쟁으로부터 보댕의 주권개념이 나왔다. 18세기에 들어 새롭게 등장한 국가의 자기의식은 바텔의 국제법적 주권개념에서 반영되었다. 1871년 이후 새롭게 기초된 독일제국에서 연방국에 대한 회원국의 주권영역을 제한할 원칙을 수립해야하는 필요성이 생겼고, 이런 관심에서 독일 국가이론이 주권개념과 국가개념 사이의 구분을 발견함으로써 개별국에게 주권을 부여하지 않고서도 국가적 성격을 구해낼 수 있었다. S.25 다극의 변종을 띄며 이 오래된 정의는 항상 반복된다 : S.25-26 주권은 법적으로 독립적이고 파생되지 않는, 최고의 권력이다.

이러한 정의는 다극의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 적용되며 다극의 정치적 관심에 사용될 수 있다. 이것은 현실의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 공식이자 기호, 징후이다. 이것은 끊임없이 다중적이며 따라서 실천에서 상황에 따라 이례적으로 요구되어지거나 완전히 무효화된다. 실제적인 거대함을 나타내는 식으로 그것은 '최고의 권력', 최상급으로 사용되지만 인과법칙으로 지배되는 현실에서는 개별적 요소로 끌어낼 수 없고 그런 최상급의 의미로 생각할 수 없다. 자연법칙적 확실성으로 기능하는 불가항력적인 최고의, 위대한 권력이 정치적 현실에
있는 것은 아니다 ; 권력이 법을 입증할 것은 없다. 루소가 그의 모든 시대와 일치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했던  평범한 근거에서도 그렇다 : 힘은 물리적 능력이다 ; 강도가 들고 있는 권총도 또한 하나의 능력이다(사회계약론 I, 3). 사실적이고 법적인 최고 권력의 조합은 주권개념의 근본적 문제이다. 여기에 그 모든 어려움이 놓여 있고, 일반적으로 동어반복적인 술어를 통해서가 아닌, 법적인 본질을 명확히 해 법학의 이 근본개념을 파악함을 통해서 하나의 정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몇년 사이에 있었던 주권개념에 관한 가장 상세한 접근은 사회학과 법학의 구별로 다만 단순한 해결책을 찾았고 단순한 양자택일로 순수히 사회학적인 것과 순수히 법학적인 것을 얻어 냈다. 켈젠은 자신의 저서 "주권의 문제와 국제법 이론"(튜빙겐 1920)과 "사회학적 법학적 국가개념"(튜빙겐 1922)에서 이 방법을 따랐다. 모든 사회학적 요소가 법학적 개념과 이격됨으로써 규범과 궁극적으로 통일적인 근본규범의 귀속에 관한 순수한 체계가 획득된다. 존재와 당위, 인과적 고려와 규범적 고려라는 오랜 대립적 설정은 S.26 매우 확고하고 엄격하게 이미 게오르그 옐리네크와 키스티아코프스키가 수행했지만 이들은 증명할 수 없는 자명성으로 사회학과 법학의 대립개념으로 이월시켰다. 어떤 다른 학문이나 인식이론에 따라 법학이 그러한 구분을 적용했다는 것은 숙명으로 보인다. 켈젠은 이런 방식의 도움으로 전혀 놀랍지 않은 결과에 이르렀는데, 법적으로 봤을 때 국가는 어떤 순수한 법적인 것, 어떤 규범적으로 유효한 것이면서 어떤 현실성이나 가상적인, 법질서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법질서 자체, 말하자면 하나의 통일체다(여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어려움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또한 국가는 법질서의 원조이자 원천이 아니다; 모든 그러한 생각은 켈젠의 인격화와 의인화에 따르면 통일적이고 일체적인 법질서를 다양한 주체들로 이중화시키는 것이다. 법질서를 의미하는 국가는 최종적인 귀속점에 기반한 귀속의 체계이면서 최종적인 근본규범이다. 국가에서 유효한 상위와 하위 질서는 통일적인 중심점에서 촤하위 단계까지 권한위임과 권능이 다다른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최고의 권능은 어떤 한 인물이나 사회적 심리적 권력복합체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규범체계의 통일체에 있는 주권 질서 자체에만 귀속된다. 법적으로 봤을 때 실제적이거나 가정적인 인물이 아니라 귀속점만이 있다. 국가는 법적 고찰의 본질인 귀속이 정지할 수 있는 귀속지점의 최종지점이다. 이 '지점'은 동시에 '더이상 파생될 수 없는 질서'다. 원천적이자 최종적인, 최고의 것에서부터 하위의 것에 이르기 까지 위임된 규범을 의미하는 하나의 일관된 질서의 체계는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매번 새롭게 반복되고 학문적 반대에 거슬러 새롭게 대두된 결정적 논의는 항상 동일한 것으로 남는다: 한 규범의 효력 근거는 다시 규범일수만 있다; 따라서 국가는 법적으로 봤을 때 그 헌법과 동일한 것으로, 이것은 통일적인 근본규범이다. S.27

이러한 연역에서 핵심 단어는 '통일'이다. "인식지점의 통일은 강제적으로 하나의 일원적인 직관을 요구한다." 사회학과 법학이라는 방법의 이원론은 일원적인 형이상학으로 끝난다. 그러나 법질서의 통일체, 즉 국가는 법학의 영역에서 모든 사회학적인 것으로부터 '순수한' 것으로 남는다. 이러한 법학적 통일체는 전체체계인 광대한 통일체와 같은 종류의 것인가? 자연법 체계나 이론적 일반법 이론의 통일성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타당한 질서의 통일성을 의미한다면, 일군의 적극적 규정들이 동일한 귀속점을 지닌 통일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질서, 체계, 통일성과 같은 단어는 동일한 가정의 다른 표현일 뿐이며, 이로부터 '헌법'(이는 또 다른 동어반복적 표현이거나 적나라한 사회학적-정치적 사실을 의미)에 기초하여 체계가 출현하는 것이 어떻게 순수하게 성취될 수 있는지, 어떻게 적합할 수 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켈젠에 따르면 체계적 통일은 '법적 인식의 자유 행위'다. 한 점이 질서이고 체계이며 하나의 규범과 동일해야 한다는 흥미로운 수학적 신화를 제쳐두고 우리는 다양한 귀속점에 대한 다양한 귀속의 지적 필연성과 객관성이 명령을 의미하는 적극적 규정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기초하는지 묻는다.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자명한 일인 것처럼 지속적인 통일과 질서에 관해 항상 다시 얘기되고 있다; 자유로운 법적 인식의 결과와 정치적 현실의 통일로만 결합된 복합체 사이에 미리 예정된 조화가 있는 것처럼 높고 낮은 질서의 단계에 대해 얘기되고 있는데, 이것은 적극적 수습에 임한 법학이 테이블에 올려 놓는 모든 것에서 발견된다. 켈젠이 법학을 극도로 순수하게 세우는 기반인 규범적 학문은 법률가가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로부터 평가를 한다는 의미에서 규범적이지 않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적극적으로 주어진) 평가에만 관련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하나의 객관성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지만,S.28 명백한 필연적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법률가와 관련된 평가는 그에게 주어질 것이긴 하지만 그는 상대적 우월성을 갖고 이를 대처한다. 왜냐하면 그는 법적으로 그에게 흥미롭고 그가 '순수'하게만 남겨질 수 있는 한 모든 것으로부터 통일을 간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과 순수성은, 아주 강력하게 본래적인 어려움을 무시하고 형식적인 근거에서 체계적으로 적대되는 모든 것을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 분리함으로써 쉽게 획득된다. 자신의 법학이 지금까지 법학으로 실행되어 온 것과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기 위해 단 하나의 구체적인 예를 사용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확고한 방법론을 고수하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비판할 수 있다. 방법론적 서원과 개념적 날카로움, 기민한 비평은 준비로서만 가치가 있다. 법학이 형식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본론에 도달하지 못하면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법학의 반대파에 머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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