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만의 사상자를 낸 한국전쟁을 대리전으로 봤다는 한강 작가의 식견은 국외적 관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어느 소설에서 황석영도 비슷한 시각을 보였다. 1940년대 초반 미영소 삼국의 불안한 동맹은 나치 독일을 무너뜨리는데 단결했지만 동아시아를 집어 삼킨 일본의 문제에서는 균열을 드러냈다. 스탈린은 이미 미국이 일본의 목줄을 쥐고 숨통을 끊으려 하기 전부터 숟가락을, 그것도 150만이라는 병력을 투입하면서 만주와 사할린, 쿠릴열도, 그리고 조선에 대한 야욕을 뻗치기 시작했다. 사할린과 쿠릴열도는 제정 러시아 때 일본에 빼앗겼었던 것이라 탈환의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의 재래전으로 일본을 완전 패망시키려면 1949년 까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다, 소련이 극동아시아에 깊히 개입하는 것에 미국은 당황하고 다급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이런 스탈린의 극동 전략의 일환으로 시작됐고 스탈린의 죽음으로 끝났다. 손안대고 코를 풀려고 했던 건 소련이고 여기에 휘말린 것이 한국과 중국, 연합국이다. 한국전쟁 발발 전 남북의 관계가 긴장국면에 있었다해도 결국 전쟁으로까지 폭팔하는 데에는, 김일성의 결단에 영향을 미친 소련의 그림자가 너무도 짙다.
반제국주의를 표방했지만 사회제국주의로 나간 소련의 이 우상은 푸틴에게 깊은 영감을 준 것일까.
어제 츠빙글리에 관한 영화를 보고 어떻게 기독교가 교황을 필두로 위계적 조직체계로 되었는지 궁금해 역사책과 교회사 관련 책을 뒤적이는 중 반유대주의의 태동이 기독교의 로마수용과 관련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정식 종교로 승인된 것을 넘어 국교로 수용된 후 자리를 잡아가던 5세기 초의 로마 카톨릭은 정통 유대교를 따르는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을 묵인한다. 1500 년 이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전조처럼. 예수를 박해한 정통 유대교인들에 대한 반감은 공관복음에도 뚜렷히 보인다. 그렇다면 반유대주의 기원은 신약성서인 셈인데, 통합성서의 탄생이 로마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이후 이루어 진 것으로 볼 때 납득할만 하다. 기독교의 발전은 로마, 그중 서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하며, 특히 이 지역에서 정교분리, 카톨릭과 제국의 분리가 집중된다. 정치에 대립되고 독립적인 교회조직이 만들어진 것을 넘어 제국도 지배하려는 추세로 카톨릭이 나간 점에서 또다른 정교통합의 시대가 천 년간 이어진 것이고, 이것을 깨뜨린 선구자들이 얀 후스, 마틴 루터, 울리히 츠빙글리 등 이다. 루터에 비해 츠빙글리는 쮜리히에서 성공적인 종교개혁에 도달하지 못하고 전장에서 숨진다. 이런 실패는 장 칼뱅이 제노바에서 주도한 무시무시한 종교개혁과도 대비된다.
Han Kangs Einsicht, dass er den Koreakrieg, der 4 Millionen Opfer forderte, als Stellvertreterkrieg betrachtete, ist aus internationaler Sicht durchaus überzeugend. In einem Roman äußerte auch Hwang Seok-young eine ähnliche Perspektive. In den frühen 1940er Jahren vereinigte sich das unsichere Bündnis aus den Vereinigten Staaten, Großbritannien und der Sowjetunion zum Sturz Nazi-Deutschlands, doch als es um die Japan-Frage ging, die Ostasien erfasst hatte, zeigten sich Risse. Stalin hatte bereits damit begonnen, seine Ambitionen auf die Mandschurei, Sachalin, die Kurilen und Joseon auszuweiten, indem er 1,5 Millionen Soldaten stationierte, während die Vereinigten Staaten versuchten, Japan zu erdrosseln und zu ersticken. Sachalin und die Kurilen waren während des Russischen Reiches von Japan eingenommen worden, es war also auch eine Gelegenheit, sie zurückzugewinnen. Damals schien es, als würde es bis 1949 dauern, Japan durch konventionelle Kriegsführung vollständig zu besiegen, und die Vereinigten Staaten hätten durch das tiefe Engagement der Sowjetunion in Fernostasien in Verlegenheit geraten und drängen können. Der Koreakrieg begann als Teil der Fernoststrategie Stalins und endete mit Stalins Tod. Es war die Sowjetunion, die versuchte, sich die Nase zu putzen, ohne ihre Hände zu benutzen, und es waren Korea, China und die Alliierten, die sich darauf einließen.
Hat dieses Idol der Sowjetunion, die den Antiimperialismus befürwortete, stattdessen aber den Sozialimperialismus verfolgte, Putin zutiefst inspiriert?
노벨 문학상 소식을 접하고 책을 구매해 읽어 본 경우는 오에 겐자부로와 토니 모리슨이 수상했을 때가 전부였다. 노벨상이 아니었다면 이름도 모를 작가로 남았을 것이다. 물론 노벨상이 아니었어도 인상깊게 접한 작가들도 있다. 즐겨 읽던 작가들 중엔 수상자도 있고 비수상자도 있다. '테스'의 토마스 하디는 유력한 수상후보였으나 끝내 받지 못했다. 그의 '이름없는 쥬드'의 결말에서 보이는 바와 같은 불온한 세계관에 노벨상위원회가 못마땅해 했다는 후문도 있으나 별 설득력은 없다. 인간에게 보내는 희망의 메시지는 비극을 통해서도 충분히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 더 세련된 방식이기도 하다. 한편 노벨문학상 수상자 중에는 철학자도 있는데, 그들은 버트란드 러셀, 앙리 베르크손, 장 폴 사르트로, 엘리아스 카네티다. 20세기 이후의 철학자 중에는 이들과 순위경쟁을 하기엔 어색하면서도 중요한 철학자들을 꼽을 수 있다. 발터 벤야민, 자끄 데리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어떤가?
분명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은 충분히 상을 수여받을 자격이 있겠지만, 비수상자들 중에도 수상 자격이 있는 작가들이 있다. 이런 점에서 수상자는 일종의 대리수상자인 셈이기도 하다. 사정은 다른 부문의 노벨상에 대해서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국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당연히 기뻐할 일이지만, 마치 월드컵에서 우승한 것인 마냥,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라도 한 것 처럼 떠들석하게 축포를 쏘며 책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난리가 나는 현상은 철저히 노벨상이라는 권위로 낚인 일시적인 일이다. 진정한 작가, 위대한 시인을 발굴하는 일은 위대한 독자의 엄연한 몫이도 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날이 갈수록 전파에 깊이 의존하는 양상으로 나간다. 일례로 스마트폰은 전파가 없다면 통신이 안되므로 SNS나 유트브를 이용할 수 없다. 무선통신에 사용되는 전파는 고주파로서 방송파 보다 높은 주파수 대역에 있다. 방사능이나 감마선은 이보다 더 높은 주파수 대역에 있다. 고에너지인 고주파의 전파일수록 이에 피폭되면 인간에게 위험하다. 도시의 벌들이 무선통신의 전파에 피폭되어 개체수가 줄어가듯이. 스마트폰 중독의 위험 못지 않게 전파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의 위험을 피하려면 수시로 와이파이나 데이터를 꺼놓는 습관도 필요하다.
전파를 통한 정보전달은 아날로그나 디지털 방식으로 데이터를 변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마치 가시광선과 같은 빛을 통해서 인간이 사물을 지각할 수 있는 것 처럼 정보의 전달을 위해서 전파가 매체로 이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신체에 전파를 통한 정보수용과 복조를 위한 미세한 수용체를 이식한다면, 증강현실과 같은 체험을 위한 헤드기어 없이 인간은 새로운 진화의 단계에 들어설 것이다. 더군다나 저출산의 대안으로 인간배양기술이 시행된다면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한 칩을 이식받도록 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신체가 기계가 아닌 이상 직접적으로 그러한 전파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인간은 이미 빛과 같은 저주파장으로부터 지각을 하는 것으로 진화되어온 것으로 봤을 때 전파와 떼어질 수 없는 공생의 운명일까?
분명한 것은 그러한 새로운 기술이 인간신체에 침입했을 때 그것의 위험성에 대한 논란은 현재의 스마트폰에 대한 논란과 유사하면서도 지배를 위한 강력한 통제수단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엔비디아나 구글에 몰리는 천문학적 투자는 그러한 기대의 반영이란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돈이 된다면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물불 안가리고 달려드는 이상 피할 수 없고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