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다페스트, 2024년 11월 19일 오후 9시
가끔 TV에서 중계되는 분데스리가는 건성으로 보는데 이따금 있는 국가대표전은 좀더 흥미롭게 본다. 이날 경기가 그렇다. 헝가리도 유럽의 강팀인 점은 알고 있으나 전반전 경기력으로 볼 때 침투는 독일이 잘하는 편이지만 힘과 압박은 헝가리가 앞서 보였다. 다만 골 결정력과 골 연결력의 테크닉은 확실히 독일이 앞선다.
독일 대표팀은 절반 이상이 주로 근동과 아프리카에서 귀화한 선수로 구성된 반면 헝가리는 대부분 자국 출신 선수로 포진되어 있다. 홈경기의 이점을 살려 헝가리의 거친 플레이가 빈번하다. 전반전은 헝가리의 압박이 돋보이며 양팀 무득점으로 마무리됐으나 후반에 확실히 독일의 경기력이 살아 났다. 더 빠른 침투와 정확한 패스를 이어가던 독일은 몇차례 기회를 놓친 후 득점에 성공한다. 골키퍼 선방으로 빠르게 튕겨나간 공을 놓치지 않고 통쾌하게 골대 깊숙히 골망을 터뜨린 것이다. 헝가리도 몇 차례 기회가 있었고, 기습공격으로 골을 성공시켰으나 옵사이드 판정을 받는다. 헝기리의 막판 추격전은 후반 추가시간 4분을 향해 가면서 단단한 독일의 수비벽을 뚫고 슛을 날리지만 한 수비수의 팔 언저리를 맞고 공은 골대를 벗어난다. 심판은 경기 종료를 하려고 하는데 관중들이 핸들링이라고 난리다. 결국 심판은 비디오 판독에 들어가고 페널킥을 선포한다.
다소 불안한 기색의 헝가리 페널키커는 우측방향으로 기우는 독일 골키퍼를 완전히 속이고 정 가운데로 살짝 공을 성공시킨다. 1 대 1. 경기는 바로 종료된다.
경기가 끝난 후 국가전이 더군다나 무승부로 끝나서인지 양팀 선수들은 국가 리그에서 풀려나 클럽 리그의 동료로 서로를 축하한다. 경기 중 거친 플레이는 마치 장난이었다는 듯이.
숙소를 벗어난 생활을 하면서 토요일 한주 일과가 끝나면 밥 먹으며 술한잔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 전에 숙소생활을 할 때는 평일에도 숙소 동료들과 술 마실 일이 적지 않았고 일과가 끝나는 토요일에는 숙소를 벗어날 궁리만 했었다. 아무튼 토요일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오고가며 자주 들르던 통복시장 깊숙한 곳에 밥 먹을만한 곳이 꽤 있을 줄 알았는데, 술 한잔 하며 먹을 수 있는 식당은 순대국집 3곳, 베트남 식당, 백반집 2곳, 소머리 국밥집, 그리고 떢볶이집이 내가 가봤던 전부였고, 베트남 식당에 제일 많이 갔다. 여기서는 소주 외에 베트남 맥주도 팔았는데, 오징어튀김과 새우튀김 반반에 소주 1병이 적당했고 좀더 마시면 베트남 쌀국수도 좋았다. 혹은 베트남 만두에 소주도 괜찮았는데, 이렇게 적당히 먹으면 만원에 해결됐다. 아직 해가 남아있는 초저녁에도 상관없었다.
이 베트남 식당은 밖의 매대에서 포장판매를 하고 홀 장사도 하는데, 홀은 분식집처럼 작은 평수고 의자와 테이블도 작은 편이었는데, 바둑판 정도 크기의 제일 작은 테이블은 혼자 먹기 좋은 자리였다. 붐비는 시간대에 가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되서 좀더 일찍 가는 편이 좋았다.
한번은 여기서 튀김과 소주를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평택현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는 한 청년이 쌀국수를 먹고 있었다. 조선소에서 일하다가 올라 왔다는 그는 근래 현장에서 인원감축 소문이 돈다고 꽤 걱정하는 중이었다. 그의 염려는 거의 1년이 지난 시점에 현실화됐고 또 한 해가 지난 후 기정사실화됐다. 그도 이 식당의 단골이라고 했는데 이날 처음 보고 이후 또 볼 일은 없었다.
오랜만에 극장영화를, 그리고 처음으로 독일 극장에서 자막없는 독일어 더빙으로 봤다. 더빙의 기술이 완벽해서 독일영화로 보일 정도지만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내용전개로 볼 때 1편의 이야기 선상에서 새로운 서사를 발굴하고 일부 중요 인물들도 재등장하지만 이들은 죽는다. 속편과 전작의 시간차로 봐서도 노감독의 3편이 나오긴 힘들 것이다.
역모를 모티브로 하는 1편에 이어 2편도 역모가 중요하게 다뤄지고, 격투장면도 화려하지만 1편 시작에서 게르만족과 로마군의 전투에서 보여 줬던 웅장한 면모는 기대하기 힘들다. 그리고 전편에 나왔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딸이 후편에서 막시무스의 연인으로 그려지고 그 아들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드러나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것은 둘째치고 전작과의 관련성이 다소 부족해 보인다.
댄젤 워싱톤은 이름값답게 역사적 인물에 걸맞은 중요 배역으로 그려지지만, 갑작스럽게 흉악범처럼 돌변하는 것도 좀 의아하다. 결론적으로 전작을 넘어서는 속편은 없다는 영화사의 오랜 불문율을 이 영화도 넘어서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로마사에서 빈번했던 모반의 실체와 실상을 생생하게 그려보려는 흔적은 역력하다.
전편을 극장에서 본게 20년 이상 지났듯이, 그 사이 세월의 변화는 공주와 원로원 의원에게서 여실히 드러나지만, 연기가 연로해진 것은 아니다. 이들의 투혼에 찬 연기가 이 영화의 백미다.
*하루가 지나고 어제 함께 영화를 본 동료 3명에게 물어보니 전편만 못하다, 1편은 못봤지만 흥미롭다, 잔인하다는 평가였다. 영화는 직장에서 단체 관람을 한 것이었는데, 상영관 하나를 전세내서 상영 한 시간 전에 극장 홀에서 파티 분위기의 술판이 열렸고 영화를 보러 들어갈 때 잔 포도주와 병맥주를 들고 들어가는 이들도 상당수였다. 한 동료는 포도주 2병을 마시고 상영시간 내내 잠들었다고 한다.
어느 해 늦가을에서 다음 해 봄까지 70km 거리의 안성에 있는 물류센터로 출퇴근을 하다 안성의 내리라는 동네에 방을 잡았다. 일반도로로 신호를 받으며 운전을 하는 출퇴근길이 그리 피곤한 일은 아니었으나 퇴근 후에는 밥 먹고 뉴스 좀 보다 바로 잠들고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는 생활이 그리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라디오를 들으며 퇴근하는 길이 그나마 위안이었지만, 하루 왕복 140km의 운전은 확실히 심신에 부담이 됐다. 신변을 정리하면서 마침 이사도 가야했기에 안성에 몇개월간 살 방을 구한 것이었다.
방을 구하기 전에는, 인적이 드문 산골의 물류센터에서 하루종일 있다가 퇴근하기 바쁜 생활 중 이따금 있던 회식자리와 우체국 볼일로 일터를 벗어나서야 동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상당한 거리로 동 떨어진 시내의 구시가지와 새로 형성된 신시가지가 전혀 다른 도시의 풍모를 풍겼다. 구시가지는 예전 서울의 80년대 변두리처럼 오밀조밀한 골목길도 있고 주차환경이 열악할 정도로 저층 주택단지로 다소 과밀해 보이기도 했는데, 회식 장소로 자주 갔던 공도라는 곳은 신도시처럼 비교적 반듯하게 구획되어 있었다. 마침 세월의 흐름이 동네마다 다른 속도감을 내듯이 어떤 동네는 완전히 시골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내리라는 동네는 중앙대 안성 캠퍼스가 있는 곳인데, 문예창작과와 예술대 등이 매우 광활한 부지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학생들 때문에 형성된 원룸 형태의 집합주거시설에는 이제 학생 보다는 근방의 공장 등지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더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외국인들을 겨냥한 식당들도 눈에 띌 정도 였다. 이따금 산책 삼아 그 넓은 대학 캠퍼스를 둘러봐도 학생들은 잘 보이지 않고 나처럼 마실 나온 동네 주민이 더 보일 정도였고, 그 주민도 주로 외국인이었다. 그렇게 멋지게 보이는 학교에 학생들로 넘쳐나던 시절은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중부 고속도로의 호법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영동고속도로 강릉방향으로 갈 때 하이닉스 반도체의 타워로 대표되는 이천을 수없이 지나쳐 가기만 했었는데, 이곳에서 3개월 정도 살 기회가 있었다. 바로 이 반도체 덕분이었다. 평택의 반도체 공장 건설 현장에서 먼저 일하고 있었을 때 이천 하이닉스 현장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는데, 평택보다 수월하고 편하다는 것이었다. 평택은 현장 규모도 워낙 크고 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다 규율이 심해서 감옥같다는 느낌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분위기는 발주처인 두 거대기업의 사내 분위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며, 환실히 이천 현장이 평택 보다 여러모로 편했지만 뭔가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내보니 이천이 참 좋은 동네라는 인상이 들었고, 마침 그때는 경강선 전철이 들어서서 서울로 오고가기 편해진 시점이었다.
사전에 담당 팀장에게 받은 숙소의 주소지로 가기위해 터미널에서 택시를 탔다. 버스도 있었지만 짐이 좀 되서 택시를 잡았다. 아파트 숙소였는데 각 방엔 이미 먼저 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여 비어 있는 거실에 내 짐을 풀었다. 당장 다음날부터 일하는 것은 아니고, 서류를 쓰는 일정이라 초저녁에 숙소 근방의 국밥집에서 반주를 하며 밥을 먹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까지는 일정에 문제가 생겨 며칠 늦춰졌다. 덕분에 시내로부터 3km 정도 떨어진 숙소와 현장, 그리고 시내를 택시와 버스, 도보로 오고가며 동네를 알아갔다. 자칫 일도 못하고 돌아가야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도 들었지만 정상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임시거주자의 생활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