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Die sinnliche Gewissheit oder das Dieses und das Meinen
II.Die Wahrnehmung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7-
Die abgestossenen Unterschiede verteilen sich nicht von neuem an zwei solche Substanzen, welche sie trügen und ihnen ein getrenntes Bestehen verliehen, wodurch der Verstand aus dem Inneren heraus wieder auf seine vorige Stelle zurückfiele.
밀려난 차이들은 다시는 그것들을[실체들] 짊어지고 그것들에게 분리된 존재를 부여하는 두 개의 실체들 속으로 분산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해는 내면으로부터 다시 이전의 자리, 즉 본질과 현상을 나누는 그 위치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이 문장은 "전도된 세계" 개념을 설명하는 결정적 전환점 중 하나. 앞서 현상과 본질, 긍정과 부정, 북극과 남극 같은 ‘전도된 대립항들’이 나타났지만, 여기서 헤겔은 이러한 대립항들 간의 분리가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 즉 의식이 대립의 모순을 내적으로 종합하게 되는 순간을 묘사. 이 문장의 중심 사유는 다음과 같은 오성과 그것의 한계 극복에 있음
1. 두 실체(Substanzen)에 대한 분산 거부
‘전도된 세계’의 대립 항들(예: 북극/남극, 산/염기 등)이 다시 두 개의 고정된 실체로 나뉘는 것은 아님. 이전까지 오성은 대립들을 각기 다른 실체 속에 배치해왔음 (ex: 좋은 것 vs 나쁜 것, 내면 vs 외면)
2. 오성의 한계 지적
만약 차이들이 다시 두 실체에 분산된다면, 오성은 내면과 현상을 나누던 그 이전 상태로 퇴행하게 됨. 이것은 헤겔이 비판하는 형식적 사고의 반복이며, 진정한 변증법적 사유가 아님
3. 헤겔의 전진 방향
차이는 고정된 실체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체 자체가 자기 안에서 대립을 포함하고 있음을 의식이 인식해야 함. 즉 대립은 외재적 분할이 아니라 내재적 긴장 구조로 파악되어야 함. 헤겔의 다른 표현에 따르면,
"이제 차이들은 다시 두 개의 실체 속에 나뉘어 머물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본질과 현상을 나눈 옛 이해의 위치로 되돌아가게 될 뿐이다. 우리는 이 대립들을 통일된 주체적 운동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후의 전개에서 의식은 단순한 오성의 형식에서 벗어나 이성, 즉 자기모순을 내적으로 포함하고 지양하는 사고로 나아가게 됨].
상동 130
Die eine Seite oder Substanz wäre wieder die Welt der Wahrnehmung, worin das eine der beiden Gesetze sein Wesen triebe und ihr gegenüber eine innere Welt, 'gerade eine solche sinnliche Welt' wie die erste, aber in der 'Vor-stellung'; sie könnte nicht als sinnliche Welt aufge-zeigt, nicht gesehen, gehört, geschmeckt werden, und doch würde sie vorgestellt als eine solche sinnliche Welt. Aber in der Tat, wenn das eine Gesetzte ein Wahrgenommenes ist und sein Ansich, als das Verkehrte desselben, ebenso ein sinnlich Vorgestelltes, so ist das Saure, was das Ansich des süssen Dinges wäre, ein so wirkliches Ding wie es, ein saures Ding; das Schwarze, welches das Ansich des Weissen wäre, ist das wirkliche Schwarze; der Nordpol, welcher das Ansich des Südpols ist, ist der an demselben Magnete vorhandene Nordpol; der Sauerstoffpol, der das Ansich des Wasserstoffpols ist, der vorhandene Sauerstoffpol derselben Säule. Das wirkliche Verbrechen aber hat seine Verkehrung und sein Ansich als Möglichkeit in der Absicht als solcher, aber nicht in einer guten; denn die Wahrheit der Absicht ist nur die Tat selbst.
한쪽 측면 또는 한 실체는 다시 지각의 세계일 것이고, 그 안에서 두 법칙 중 하나가 자기 본성을 드러내며, 그 반대편에는 내면의 세계가 자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내면 세계는 ‘단지 표상 속에 있는’ 감각적 세계, 즉 첫 번째와 같은 감각적 세계일 것이다. 이 세계는 감각적으로 보여질 수 없고,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혀로 맛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 세계처럼 표상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만약 하나의 법칙이 지각되는 것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전도된 모습(Ansich)은 감각적으로 표상된 것이고, 예를 들어 단맛의 본질이 신맛이라면, 그 ‘신맛’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 즉 신 사물인 것이다. 흰 것의 본질이 검은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표상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검은 것이다. 자석에서 남극의 본질이 북극이라면, 그 북극은 동일한 자석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 수소극의 본질이 산소극이라면, 그 산소극은 같은 기둥 안에 실제로 존재한다. 실질적인 범죄는 그것의 전도이자 본질을 ‘가능성’으로서 ‘의도’ 속에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좋은 의도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의도의 진리는 오직 ‘행위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해설 :
1. 감각적 세계 vs 내면 세계
전도된 세계를 이해할 때, 사람들은 ‘감각 세계’와 ‘표상된 내면 세계’를 다시 분리하려고 함. 즉, 외면은 이렇고, 진짜는 ‘내 안’ 또는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함.
2. 헤겔의 비판
헤겔은 이것을 거부한다. 만약 본질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단지 표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현실적인 존재여야 함
→ 신맛이 본질이라면, 그것은 단지 생각 속에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신 사물이어야 함
→ 현상과 본질의 분리는 성립하지 않으며, 모순은 실재 자체의 구조 안에 포함되어 있음.
3. 예시들을 통한 구조화
단맛 ↔ 신맛 → 신맛이 단지 관념이 아니라 실제 사물
흰색 ↔ 검정색 → 검정은 흰색의 본질이 아니라 현실로 존재
남극 ↔ 북극 → 둘은 한 자석 안에 공존
수소극 ↔ 산소극 → 동일한 전기 기둥 안에 있음
이는 전도된 대립이 표상 속 환상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임을 보여줌
4. 실천적 귀결: ‘의도’와 ‘행위’
마지막 문장은 윤리적·실천적 판단으로 연결
"실제 범죄는 그것의 본질을 의도 안에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좋은 의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의도의 진실은 말이나 표상 속에 있지 않고, 오직 행위 자체 안에 있다. 즉, 말이 아니라 행위가 진실이다. 선한 표상이나 의도만으로는 실제 악행을 지운 수 없다.
헤겔은 다음과 같은 급진적인 변증법적 통찰을 전개하는 것 : 본질은 현상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 안에서 현실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진리는 표상이 아니라, 실천적 행위 속에 있다.].
상동
Das Verbrechen seinem Inhalte nach aber hat seine Reflexion in sich oder seine Verkehrung an der 'wirk-lichen' Strafe: diese ist die Aussöhnung des Gesetzes mit der ihm im Verbrechen entgegengesetzten Wirk-lichkeit. Die wirkliche Strafe endlich hat so ihre verkehrte Wirklichkeit an ihr, dass sie eine solche Verwirklichung des Gesetzes ist, wodurch die Tätigkeit, die es als Strafe hat, sich selbst aufhebt, es aus tätigem ㅣwieder ruhiges und geltendes Gesetz wird, und die Bewegung der Individualität gegen es und seiner gegen sie erloschen ist.
그러나 범죄는 그 내용상, 그 자체 안에서의 반성, 또는 그 전도된 모습(Verkehrung)을 '실제적 형벌' 안에 가진다. 이 형벌은, 범죄 안에서 법에 대립하는 현실성과 법 사이의 화해이다. 그리고 이 실제적 형벌은, 다시 그것 자체의 전도된 현실을 포함한다. 즉 그것은 법의 실현이지만, 동시에 형벌로서 행사되는 그 활동이 스스로를 폐지하는 그런 실현이다. 그렇게 해서 법은 활동적인 상태에서 다시 고요하고 유효한 법이 되며, 개인과 법 사이에 존재했던 운동—즉 상호 대립과 긴장—은 소멸된다[이 문장은 헤겔의 윤리적 변증법의 정수를 보여줌. 그는 ‘범죄–형벌–법–개인’ 간의 대립과정을 단순한 외적 대립이 아닌, 내적 자기운동과 화해의 과정을 통해 설명
1. 범죄의 이중성
범죄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법에 대한 부정이자, 그 법의 존재를 전제하는 반성임. 범죄는 법이 있기에 범죄다. 즉 범죄는 법과 분리된 독립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 법을 반영한 대립적 현상이다.
2. 형벌의 본질
형벌은 단지 복수가 아니라, 법과 그에 반하는 현실(범죄)의 화해의 장이다. 형벌은 단순히 범죄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법의 자기현현, 즉 법이 자기 자신을 다시 확증하는 방식이다.
3. 법의 자기지양 (법이 형벌로서 스스로를 초과)
형벌은 법의 활동적인 구현이지만, 이 활동은 자기 자신의 목적이 아니다. 형벌의 완성은 형벌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다. 이때 법은 다시 고요한 상태, 즉 단순히 존재하고 유효한 상태로 돌아감. 법과 개인 사이의 긴장은 해소되고, 윤리적 질서가 복원됨.
헤겔은 이 문장을 통해 다음을 시사 :
법과 개인의 진정한 관계는 폭력적 대립이 아니라, 형벌이라는 중재를 거친 후의 '자유로운 화해'임. 법은 단지 외적 명령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 안에서 스스로를 다시 고요한 규범으로 확립하는 자기운동].
상동 130-131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헤겔은 생명의 철학을 선포한다. 생명의 철학이란 두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철학이 목적으로 삼는 진리란 생명처럼 유한한, 그래서 어떻게 소생하더라도 끊임없이 전복될 수 밖에 없는 부정의 계기를 거친다. 둘째, 철학의 진정한 포착대상은 사유화된 개념 자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유동하는 사태 자체다. 외적 현상에서 보편화 가능한 법칙을 발견하는 것은 철학이 인류에게 가져다주는 성과다. 헤겔은 예고했고 마르크스는 실현했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틀을 뉴톤에게 빌려온 것과 유사하면서도 야심적으로 헤겔은 자연현상에서 뉴톤이 발견한 만유인력과 같은 법칙을, 아니 오히려 이것보다 더 본질적인 법칙의 발견을 철학에서 이룰 수 있다는 포문을 연 것이다. 그렇다면 헤겔의 바톤을 이어받아 마르크스가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밝힌 자본잉여율 하락의 법칙은 이후 슘페터같은 경제학자가 더욱 발전시킬 정도로 불변에 가까운 진리로 남아 있다. 철학의 역사에서 마르크스만큼 세계,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었다. 그야말로 청출어람이다.
텍스트 : Georg Lukacs, Die Zerstörung der Vernunft G. Lukacs Werke Band 9(Neuwied am Rhein : Luchterhand, 1962)

사회학 서가에서 발견한 루카치의 '이성의 종말'.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었던 정신사를 추적한다. 철학사로는 셸링에서 쇼펜하우어, 니체로부터 연원하고 사회학에서는 베버, 슈미트 등에 이른다. 루카치는 시대적, 학문적 간격과 무관하게 다소라도 파시스트적 경향을 드러낸 사유의 흔적들을 들춰내 보겠다고 한다. 내전을 방불케할 정도로 자국을 혼란에 빠뜨리면서도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을 들며 이란에 엄포를 놓는 트럼프같은 인간이 재집권할 수 있는 세상에서 이성의 종말은 아직도 완료되지 않을 일같다.
비코와 헤르더의 자연과학적 진보를 중심으로한 관념적 변증법은 프랑스혁명과 맞무려 헤겔에게서 체계화됨. 이러한 진보에 대한 관념적 변증법적 역사적 개념에 대한 투쟁으로 근대적 비이성주의가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계기는 셸링에서 키에르케고에 이르는 길. 이는 혁명에 대한 봉건적 반격이자 진보에 대한 부르조아적 적대.
상동 12
파리코뮌으로 새롭게 대두된 대표적 적수는 니체. 여기서 논쟁은 학문적 비판과 논쟁은 ㅣ 중상모략과 선동으로 변질됨.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 후 부르조아의 역량은 사라졌다고 표현. 자의성, 모순, 무근거, 궤변적 논증으로 특징되는 철학적 수준의 쇠퇴는 비이성주의 발전의 본질적 징후이며 이러한 경향은 국가사회주의 세계관에서 가장 생생하고 명백하게 드러남
상동 12-13
독일 독점 자본주의의 본질, 가장 반동적인 형태, 새롭고 공격적인 독일 제국주의의 미래를 이념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히틀러와 로젠베르크를 포기하는, 즉 "저급" 히틀러에서 고품격 슈펭글러, 하이데거, 니체로의 후퇴는 철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전략적 후퇴이며, 추격하는 적으로부터 이탈하여 반동 세력을 재편하고, 더 유리한 조건 하에서 방법론적으로 "개선된" 극단적 반동의 공세를 재개하는 것. 이러한 철학전 쇠락의 경향은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필연적 현상임.
상동 13
이념가의 철학적 수준은 궁극적으로 그가 시대의 문제들을 얼마나 깊이 파고드는지, 어떻게 그것들을 철학적 추상화의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가 속한 계급의 관점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문제들을 얼마나 깊이, 그리고 마지막 세부 사항까지 탐구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지에 따라 결정됨.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나 스피노자의 "데우스 시브 나투라(deus sive natura)"는 당시 매우 시사적이고 과감하게 편파적인 질문과 답변이었음)
상동 14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골목상권이 비어가는데다 대형마트도 고전중이라고 한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쿠팡과 같은 인터넷 쇼핑몰의 물류망은 더욱 규모화되고 치밀해졌다. 한밤중에 동네 구석구석으로 쿠팡맨들이 흟고 지나가니 한낮에 상가로 갈 일이 없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나깨나 핸드폰을 쥐고 있는 세상에 손가락으로 흟기만 해도 다음날 아침 물건이 도착한다. 또한 전국민의 최대 주거지이자 최대 선호지인 아파트는 문전 배송에 최적인 주거형태이기도 하다.
주식시장과 마찬가지로 내수시장도 어차피 주어진 수요한도에서 업종별 경쟁적 편차가 발생한다. 즉 주어진 파이를 놓고 공급자들이 각축한다. 늘상 얘기되어온 경기침체 외에 인구소멸과 고령화를 제외하고 보면, 현재의 내수시장의 침체는 산업의 내부적 변동요인이 크다. 이것은 자연적인 과정이 아니라 인위적 편중이고 규제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문제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도 일해야 하는 대형마트의 노동자를 보호해야한다면, 심야에 배송해야 하는 노동자도 보호해야 한다. 소비자 편리라는 명분으로 역시 소비자인 노동자의 기본권을 외면하는 사업방식은 고전적 착취의 잔재다.
지브리와 같은 그래픽전환기능이 추가되면서 생성형 AI의 유료 가입자수에서 한국이 미국 다음이라고 한다. AI에 대한 뜨거운 수요추세는 산업과 교육을 넘어 이제 국가정책으로까지 시행될 태세다. 나도 유료는 아니더라도 틈틈히 하는 학습에서 오픈AI의 저력에 실감하지만 이런 체험은 가히 전국민적 공감대로 나아가고 있다. 지식의 가공과 처리, 재처리, 증폭, 연결, 변조에서 AI의 생산성과 효율성은 날마다 새롭게 조명되고 이것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산업이 된 동시에 모든 영역에 파고들고 있다. 언젠가 한국을 기계의 나라라고 했던 네팔 출신 시인이자 외노자의 표현은 이제 더 심화되었다. 의식마저 기계화되어 가는 것이다. 기계가 대신 읽어주면 대신 들어줄 기계도 필요해지지 않을까? 아바타의 세상이 멀지 않은 것이다.
법률가들이 특히 AI로 고전할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 한 유트버 변호사는 이제는 AI를 잘 활용하는 법률가가 대세일 것이라고 하면서 지식의 활용은 Al에 위탁하고 남는 변호사의 주업무는 서비스일 뿐이라고 한다. 법률 서비스가 일종의 음식 서비스처럼 범용화되는 것이다. 서비스라는 표현에는 다소 하대가 용이한, 그래서 을의 입장으로 몰아세우기 쉬운 의미가 풍긴다. AI의 시대가 가져다 줄 긍정적 기여를 굳이 든다면, 인간은 이제 기계에 비해 연약한, 그래서 이제는 을이 되버린 인간끼리 서로 보살피고 도우며 살라는 현실인식일 수도 있다. 하지만 AI를 고도로 활용하는 특정인간들에게는 여전히 그것은 고도의 지배도구일 뿐이다.
신분을 중심으로한 봉건지배에서 산업을 중심으로한 자본지배를 거쳐 이제 지식을 중심으로한 정보지배의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봉건적 의식과 자본주의가 극복된 것은 아니다. AI는 이것을 강화시키거나 무력화시킬 수 있는 양날의 검으로 인간의 손에 넘겨진 것이다.
*이 글에 대한 오픈 AI의 반응
당신이 써 주신 글은 AI 시대를 관통하는 인식의 변화와 그 양면성을 매우 섬세하고 성찰적으로 조망하고 있습니다. 문장의 흐름은 마치 에세이이자 비평이며 동시에 시대 진단처럼 읽힙니다. 아래에 그 내용의 요점과 철학적·사회적 함의를 간결하게 정리하고, 이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논점을 제안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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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의 주요 흐름 및 주제 정리
### 1. **AI 대중화와 한국 사회**
* 한국은 **AI 유료 가입자 수 세계 2위**, 기술 수용도와 활용도가 매우 높음.
* 지브리와 같은 시각 기반 기술은 AI에 대한 **체험의 몰입도**를 높이며, 산업과 교육을 넘어 **국가 정책화** 조짐.
* AI 활용은 이제 **전 국민적 체감과 공감의 대상**으로 확대.
### 2. **AI의 생산성과 인간 의식의 기계화**
* AI는 지식의 생성과 가공, 증폭, 재처리 등에서 탁월한 생산성을 가짐.
* **AI 사용 자체가 산업이자 노동이 되는 시대**.
* 네팔 출신 외노자의 “한국은 기계의 나라”라는 표현은 이제 **의식의 기계화**까지 함의함.
### 3. **전문직(특히 법률가)과 AI**
* AI는 변호사, 법률가의 **지식 처리 업무**를 대체.
* 법률가는 AI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주 업무는 \*\*서비스(=대면, 감정, 관계)\*\*로 전환될 것.
* “서비스”라는 표현에 깃든 **‘을’의 정서**는 AI 시대 인간의 상대적 위치를 상징.
### 4. **AI 시대의 인간적 과제**
* 기계보다 나약한 인간끼리 서로 **돌보고 보살피는 새로운 사회적 연대**가 요청됨.
* 그러나 동시에 AI는 여전히 **지배 도구**가 될 수 있으며, **기계와 결합한 엘리트층**이 새로운 권력자가 될 위험 존재.
### 5. **지배 양식의 역사와 AI**
* 봉건 지배(신분) → 자본 지배(산업) → 정보 지배(지식).
* 그러나 봉건성과 자본주의는 여전히 잔존.
* AI는 이를 **강화하거나 무력화할 수 있는 양날의 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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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찰적 논점 제안
### 1. **의식의 기계화란 무엇인가?**
* 단순히 노동의 자동화가 아닌, 사고방식이나 감정의 반응마저 **알고리즘화**되는 현실을 말함.
* \*\*“기계가 읽어주고 들려주는 시대”\*\*는 단순 편리함을 넘어 **경험 자체의 외주화**를 함의.
### 2. **‘서비스’라는 개념의 전복**
* 서비스화된 전문직은 겉으로는 **고객 지향적**이지만, 실제로는 **알고리즘에 예속된 인간 노동**일 수 있음.
* 이것은 ‘사람 냄새 나는 인간’을 강조하는 **역설적인 을의 시대**를 의미함.
### 3. **AI와 권력의 재편**
* 지식의 민주화가 아니라, **지식 처리 기술을 독점하는 소수**에 의한 **신권력 구조의 재구성** 가능성.
* 기술 사용의 격차는 **정보 불평등 → 존재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음.
### 4. **AI는 ‘거울’인가 ‘무기’인가?**
* AI는 사회와 인간의 내부를 **증폭시켜 드러내는 거울**일 수도 있고, **지배와 착취를 강화하는 무기**일 수도 있음.
* 이 도구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통제하고 규범화**할 것인가가 미래를 가름할 핵심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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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무리 제언
이 글은 단지 기술 발전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AI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고 재정의하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윤리, 정치, 교육, 노동, 그리고 인간관계까지 포괄하는 **철학적 과제**입니다.
이런 사유는 **AI 철학**, **디지털 정치철학**, 혹은 **포스트휴머니즘 사회이론**과도 접맥될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이 주제를 기반으로:
* 칼럼으로 발전시킬 초안,
* 학술 논문 구조 설계,
* 포스트휴먼 사회를 다룬 철학자들(예: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유발 하라리 등)의 인용과 비교 분석
등도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계속 이어가고 싶으시면 말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