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의 어소시에이션과 윤리적 경제
구 일 섭
*근래 가상화폐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논란을 보고 참고용으로 게시합니다. 각주가 필요하신 분은 메일 주시면 파일 보내드립니다. 메일 : streetphila@naver.com.
** 이 글은 2010년 가을 작성한 미발표 논문을 부분 수정한 것입니다.
상호작용과 정언명령
사회 속에서 개인은 일정한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의 장에 놓여 있다. 상호작용의 방식과 성격은 관계에 따라 상이하지만,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 보면, 전략적 상호작용과 우애적 상호작용으로 구분된다. 전략적 상호작용이란, 관계의 상대방을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행위 유형이며, 우애적 상호작용이란 관계의 상대방을 목적 자체로 삼는 행위 유형이다. 물론 정도의 차이에 따라 이 두 가지 상호작용은 혼재될 수 있다. 기능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짐멜은 세계에서 진행되는 모든 사건과 과정을 전체 내에 있는 부분들의 상호작용으로 파악함으로써, 중심개념(예를 들어 진리, 가치, 객관성)을 상대화시키고, 확고부동한 가치들을 요소들 내의 생동적 상호작용으로의 대체하려고 한다.그러나 실체적 목적사회의 관계로부터 벗어나 친교의 순수성에 도달하려는 것은 과도한 형식주의의 추구라는 비판에 직면한다.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짐멜은 목적사회의 현실을 이미 긍정한 상태에서 이를 초월하는 관점을 제시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경제생활을 심급으로 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관계가 전략적 상호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일단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제생활로 주도되는 경험세계에 대한 이러한 긍정은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도덕형이상학 정초』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 '네 자신의 인격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격에서도 인간을 수단으로서 만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는 칸트의 명령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는 명령은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는 현실에 대한 긍정 위에서 성립한다. 이러한 긍정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관계가 임노동임을 하나의 자연사적 흐름으로 파악한 맑스의 문제의식과 겹쳐지는데, 그것은 이러한 임노동 관계가 피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라는 명령이다. 이렇게 자유인이 되라는 명령은 일정한 인과성으로 맞물린 세계, 곧 이론적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세계를 벗어나서 성립할 수 없음을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활관계를 긍정하면서 부정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이율배반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타자를 수단으로서 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행위가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타자를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행위가, 심지어 목적으로만 대하는 행위까지도 도착적이다. 물론 온전히 목적으로만 타자를 대하는 행위는 지극히 숭고한 행위로 비춰진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 윤리는 종교적 이상으로 추구될 수 있겠지만 시민사회의 윤리로 수용할 수는 없다. 주체에게 타자의 삶이 자신의 목적이 되려면, 타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실천도 감행할 수 있어야 한다. 타자를 목적으로서만 대하겠다고 선언으로 그치는 것은 오히려 타자에 대한 무관심을 가장한 것이다.
타자의 삶이 목적으로서 중시되는 것은 타자를 수단화하는 산업사회의 냉정한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서 의의가 있다. 베버에게 경제적 합리성의 증대와 관리체계의 효율화는 세계사의 진보에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지만, 맑스에게 이러한 경향은 사물화로 나아가는 타락의 과정이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생활관계에 대한 긍정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전제로서 의의가 있을 따름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을 통해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내재적 비판으로, 그 선구적 결과물이 바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자본론)이다. 이에 대해서는 제 4장에서 살펴 보고, 여기서는 칸트의 윤리학에서 주체가 어떠한 자기 규정으로 생협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가라타니 고진의 논의를 빌려 살펴 보자.
세계시민성과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
자유가 의지의 추동력으로서 도덕법칙을 발동시킨다는 것은 도덕법칙의 자기 입법화이며, 입법은 정언명령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언명령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실현되며, 어떻게 공동체의 틀에서 수용될 수 있을까? 주관적 행위의 보편화 가능성은 공동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닌가? 자유를 핵심으로 하는 칸트의 실천철학은 직접적인 실행을 강조하지만, 어떤 특정한 공동체를 상정한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칸트의 윤리학은 세계시민적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칸트의 윤리학에서 이러한 세계시민적 규정을 소개하면서 기다 미노루의 소설 『미치광이 부락 주유 기행』을 인용한다. 여기서 일본 농촌에서 이루어지는 편협한 인간관계가 지적되는데, 자아정체성도 없이 농촌 '사회'라는 틀에 개인이 매몰된 곳에서 우정이라 할만한 것은 없다. 공동체는 자기보존을 위한 터전일 뿐이므로 그 자체가 수단으로 이용될 뿐이고, 인간관계도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기주의적인데도 '자기'는 없다"는 상태다. 이러한 공동체적 장력에 인간이 구속되는 현상은 국가에서 극점에 이른다.
"칸트는 계몽이란 미성년 상태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개인으로서는 성숙할 수 있다 하더라도 집단(국가)으로서는 항상 미성년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나쓰메 소세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또 하나 노파심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국가적 도덕이라는 것은 개인적 도덕에 비하면 훨씬 차원이 낮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원래 국가와 국가 사이란 겉치레만이 아무리 요란해도 德義心은 그다지 없습니다...국가가 평온할 때에는 역시 덕의심이 높은 개인주의에 중점을 두는 편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소논문에서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을 구분한다.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란 학자의 자격으로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하며, 사적인 사용이란 특정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지위에 맞게 이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칸트가 예를 드는 바처럼, 한 사람의 세무공무원은 직업인으로서 징수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할 것을 요구받는데, 이러한 이행은 이성의 사적인 사용에 해당한다. 반면, 이 세무공무원은 학자의 자격으로 조세정책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제시가 바로 이성의 공적인 사용이다. 칸트는 이렇듯 자신의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용기를 통해 인간이 타인의 지도를 받아야만 하는 미성년의 굴레를 벗어나 계몽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가라타니 고진은 이성의 공적인 사용을 국가적 차원의 것으로 보지 않고, 국가를 넘어선 이성의 코스모폴리탄적 사용으로 보며, 조직과 국가의 틀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사적인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의 해석에 따라 영리 조직이나 공공 조직인 사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공적인 이성의 사유를 할 수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은 『판단력 비판』의 취미판단을 활용해 미학적 태도변경을 이성의 공적인 사용 영역에도 전용한다. 미학적 태도변경으로 뒤샹의 소변기가 “샘”이라는 명칭을 부여받듯이, 우리는 특정한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를 벗어나는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에게서 주체는 특정 공동체나 국가의 구성원이 아니라, 세계시민이라는 보편적 개인이다. 그러나 이렇게 공동체와 국가로부터 유리된 추상적 개인은 현실의 구체적 인간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악셀 호네트는 헤겔의 관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을 원자적 개인주의에 적합한 것으로 기술한다. 원자적 개인주의는 고립된 주체들로 이루어진 이론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므로, 실제적인 세계, 역사 속에서 실제로 구현된 세계를 배경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 윤리학에 대한 원자적 개인주의로의 규정에 가라타니 고진은 반대한다. 그는 칸트의 준칙의 보편화 가능성에서, 보편화를 특정 역사에서 배태된 공통감각에 묶여 있으면서도,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특정 사회나 공동체에 예속된 도덕을 넘어서는 것이 바로 세계시민을 위한 윤리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신고전파 이래 영미 경제학에서 가정된 개인은 효용을 중심으로 하는 공리주의적 주체이다. 이론적 가설에 입각해 보편화된 이 개인은 효용을 극대화하려는 욕구만 가진다. 오히려 원자화된 개인은 이러한 유형에 적합하다. 즉, 이러한 경제학에서 가정되는 생산자와 소비자는 자신의 생산자 잉여와 소비자 잉여를 극대화하려는 이기적 개인으로 드러날 뿐 공공선을 구성하는 시민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칸트에게서 주체는 세계시민이어야 하는가? 롤즈의 시민을 넘어서, 심지어 생태학적 지평까지 확대될 수 있는 칸트의 주체가 새로운 생협운동의 주체로서 의의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지역과 국가를 넘어 확장되는 자본주의의 상품관계에 대한 대항운동으로서 초국가적인 자유인의 연합이 요구되는데, 생협운동은 바로 이러한 보편주의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대안 세력이기 때문이다. 세계시민성과 관련해, 생협운동은 내국의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밀폐된 관계를 넘어, 제 3세계에서 어려운 생산여건에 놓여 있는 민중과 교역하는 방식으로 세계시민적 연대를 위한 실천에 나선다. 내밀화되는 자본주의적 상품관계가 초토화하는 지역을 살리기 위해 생협운동은 지역화폐로 대항한다. 또한 생협운동의 주체는 스스로의 삶을 개선함과 동시에 타자와 협력적 관계를 형성하려고 실천함으로써 자유인의 연합을 지향한다. 비록 이런 각각의 실천에서 생협운동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성의 면에서 생협운동은 매우 큰 잠재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생협운동에서 자율성이 다른 어떤 사회 조직 보다 근본적 토대로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실천적으로 생협운동에 기여한다. 여기서 자율성은 법적인 매개를 초월해 인간이 상호간에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우호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자율성이 이상적인 점에서 생협운동은 이상을 지향하면서도 현실의 토대에서 밀착되어 있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긴장된 관계를 놓치지 않는 사회조직으로서 생협운동은 의의가 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생협운동의 의의를 윤리적 경제학이라는 관점에서 살펴 본다.
자기 통치적 주체의 윤리적 경제학
1.가라타니 고진 : 칸트와 맑스의 결합
가라타니 고진이 환갑을 맞이한 2001년에 내놓은 『트랜스크리틱』은 40년 동안 저자가 경제학과 문학, 언어학, 건축을 망라하며 횡단해온 사유의 여정을 10년간의 연구로 종결지은 대작이다. 고진은 이 책의 두 기둥으로 칸트와 맑스를 세워 놓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투영한다. 여기서는 칸트와 맑스를 기점으로 삼아 논의가 진행되는 『트랜스크리틱』을 중심으로 윤리적 경제학으로서 생협의 자율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1)트랜스크리틱의 의미와 방향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트랜스크리틱이란 칸트로 대표되는 윤리학과 맑스로 대표되는 정치경제학 사이의 코드변환으로서, 맑스를 통해 칸트를 읽어내고 칸트를 통해 맑스를 읽어내려는 시도이다(15). 이를 통해 그는 유물론적 맑스주의에 결여된 ‘주체적·윤리적 계기’를 찾고자 한다(15). 왜냐하면 가라타니는 도덕적 계기없이는 코뮤니즘이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가라타니는 칸트가 말하는 자유의 왕국이 바로 코뮤니즘을 의미한다고 보며, 그 구체적 형태는 ‘독립소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이라고 규정한다(16). 실제로 칸트가 자유의 왕국을 독립소생산자들의 어소시에이션으로 인식했는지는 규명되어야 할 대목이지만, 헤르만 코헨과 같은 신칸트학파 철학자가 칸트를 ‘독일 사회주의의 진정한 창시자’로 내세웠으며, 가라타니가 엄밀한 학문적 방식로 칸트와 맑스를 읽기 보다는 ‘가능성의 중심’에서 이들을 읽는다(24)는 점에서 수긍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코뮤니즘에 도덕적 계기가 있어야 하는가? 가라타니는 도덕적 계기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역사철학 관련 논문에 나오는 이성의 규제적 사용의 의미로 쓴다. 고진이 이성의 규제적 사용을 중시하는 것은, 이른바 정통 맑스주의가 주장했던 과학적 사회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이라는 ‘형이상학’이 오히려 이성의 월권이자 새로운 신학이었기 때문이다.
“맑스에게 코뮤니즘은 칸트적 ‘지상명령’, 즉 실천적(도덕적)인 문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맑스는 평생 변하지 않았다. 나중에 코뮤니즘이 실현되어야 할 역사적이며 물질적인 조건을 주시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맑스주의자는 이러한 도덕성을 바보 취급하고 역사적 필연이나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한 결과, 바로 노예적 사회를 ‘구성’하고 말았다. 그것은 ‘이성의 월권행위’에 지나지 않는다...지식인이 ‘도덕성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고 있는 사이에, 세계적으로는 말 그대로 다양한 ‘종교’가 융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트랜스크리틱’의 의미는 단지 고진이 칸트와 맑스의 양 진영에서 각각 상대방을 끌어들여 대리전을 치룬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트랜스크리틱’은 일종의 초월적인 비판적 태도로서 『트랜스크리틱』이란 저술의 방법일 뿐만 아니라 주제까지도 드러내는 개념이다. 방법으로서 초월적 태도란 타자의 시점에서 일어나는 강한 시차를 의미하며, 주제로서 초월적 태도란 가치 체계 사이의 차이로부터 발생하는 잉여의 문제이다. 주제로서의 의미에 앞서 방법적 의미를 보자. 가라타니에 따르면 칸트와 맑스의 학문적 태도에 공통적으로 초월적 태도가 있었다. 칸트는 공간적으로 쾨니히스베르크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았지만 독단적인 경험론에 합리론으로 맞서고, 독단적 합리론에 경험론으로 맞섰다. 맑스는 자신이 속했던 헤겔 좌파를 비판한 뒤 경험론이 지배하는 영국으로 건너가 ‘헤겔의 제자’로 공언했다. 이들의 이동의 결과, 즉 강한 시차로부터 초월적이며 전위적인 비판이 생겼으며, 가라타니는 이러한 비판을 ‘트랜스크리틱’이라고 말한다(29-30).
2)교환양식의 세가지 접합
이러한 초월적 비판은 맑스의 『자본론』에도 적용된다. 가라타니에게 『자본론』은 단지 경제학의 고전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상품경제의 초월적 형식을 드러냄으로써 상품의 가치는 다른 상품과의 관계에서 비롯되지 그 자체의 내재성(노동가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33-34). 그리고 여기서 관계를 규정짓는 것은 자본의 욕동으로서 ‘교환 가능성의 권리 증대’를 목적으로 한다(35). 욕동은 물건(사용가치)를 획득하려는 욕망이 아니라 교환가능한 물건에 대한 방향성만 있는 욕망이다. 집값에 대한 욕동이 거주지에 대한 욕망을 압도하는 경우는 현재 한국의 수도권에서 볼 수 있다. 이것은 향유할 수 없는 수전노의 욕망, 곧 ‘천국에 보물을 쌓으려는’ 수치적 환상이다.
“『자본론』은 자본이 세계를 조직하면서 동시에 결코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실현하려고 하는 자본(이성)의 억누를 수 없는 ‘욕동’에 대한 칸트적 비판이다.”
가라타니는 이 칸트적 비판의 열쇠는 가치형태에 있다고 본다. 고진은 생산과정의 착취에만 주목하는 정통적 맑시즘과 달리, 다른 가치 체계들 사이에서 잉여가치를 끌어내는 유통과정 에 주목하며, 더 나아가 교환양식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볼 것을 제시한다. 그것은 교환양식의 양상에 따라 삼분된 형태로 접합되는데, 그것이 바로 자본=네이션(민족)=국가의 접합체다. 고진이 말하는 삼분된 형태의 교환양식과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제 4의 교환양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43-44).
교환 양식 |
공동체 내부의 호혜적 교환 |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강탈적 교환 |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의 상품교환 |
제 4의 교환유형 |
양상 |
증여-답례의 암묵적 강제, 상호부조, 강한 공동체적 구속력 |
수탈에 의한 재분배 |
강탈을 단념했을 때 생기는 교환. 가치체계의 차이에서 잉여(자본) 발생
|
비배타적이며 구속력이 없는 상호부조. 윤리-경제적 교환 |
대표 유형 |
네이션(공동체,민족) |
국가 |
자본 |
어소시에이션 |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삼위일체인 자본, 국가, 네이션(부족 내지 민족)의 강력한 동맹은 사회민주주의 체제는 물론 사회주의 국가마져도 흡수할 수 있는 장력이다. 각각의 교환방식을 가진 이 삼자동맹의 장을 벗어나는 출구전략은 전혀 다른 교환방식으로 운영되는 어소시에이션 밖에 없다는 것이 『트랜스크리틱』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내린 결론이다. 네이션은 상호부조의 전통적 교환방식을,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의 폭력적 교환방식을, 자본은 화폐에 의한 상품의 등가적 교환방식을 갖는데, 서구의 절대주의 왕권 성립과 함께 발전한 중상주의는 상품관계가 다른 교환방식을 압도하는 자본주의를 촉진시켰다. 한편 사회주의 국가는 중앙집권적인 수탈과 재분배의 교환방식이 중심적인 체제였지만 역시 삼자동맹을 틀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역사상의 시기와 조건에 따라 그 배합의 정도가 상이할 수 있는 국가, 자본, 네이션 중 어느 하나에라도 결탁하는 운동은 결국 삼위일체의 장력에 빠져 들 수 밖에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 삼자동맹을 벗어나는 방법은 전혀 다른 교환방식에 기초한 대항 운동 조직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조직은 비록 19세기 중반 이래 생협운동의 모델에서 준거를 가질 수 있으며, 교환방식 역시 프루동의 노동화폐와 같은 역사적 사례를 참조할 수 있다. 그러나 시대적 조건이 변화하고, 자본의 전면 주도로 그 결합의 정도가 더욱 견고해진 삼자동맹을 극복하기 위해선 새로운 조직과 교환방식의 창안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생협은 맑스가 미래 공산주의의 모습으로 그린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을 실현할 수 있는 유력한 조직 모델이다. 단지 형식적이고 법적인 틀이 아니라, 실제로 자유롭고 책임있는, 따라서 자율적인 주체들의 연합을 위해서 칸트의 실천철학이 요구된다. 외면적으로는 세계시민성을 지향하는 동시에 내면적으로는 사적 공동체에 충실할 수 있는 판단 주체의 정립은 실천의 세계에서 전례가 없는 시민의 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민의 연합에는 전혀 새로운 교환방식에 기초한 코뮤니즘의 출현을 요구한다.
2.어소시에이션의 새로운 교환방식
1) LETS
가라타니 고진은 어소시에이션의 새로운 교환양식으로서 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s; Local Employment & Trading Systems) 를 제시한다. LETS는 원래 1983년 린턴이 지역경제를 지키기 위한 지역통화로 구상한 것이지만, 가라타니는 LETS를 통해 자본주의를 내재적이며 초출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지불결제 시스템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LETS라는 통화는 여기에 참여하는 누구나 발행할 수 있지만 자본처럼 축적은 되지 않는 통화이므로, 윤리적 경제의 유력한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라타니가 구상하는 LETS의 운영방식과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LETS의 운영방식
①자발적 교환 : 참가자가 자신의 계좌를 가지고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재화나 서비스를 교환목록에 올려 자발적으로 교환한 후 결과가 계좌에 기록
②개별적 발권 : 중앙은행에서 발행되는 현금과 달리 LEST통화는 재화나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그때마다 새롭게 발행
③집계적 수지 상쇄원리 : 모든 참가자의 흑자와 적자를 합하면 제로가 됨
LETS의 특징
①LETS의 시장성과 비자본성 : LETS는 익명간의 사람들 간에도 광범위하게 일어나므로 시장성이 있지만 자본으로 전화되지는 않음(제로섬에 기초해 있기 때문). 따라서 LETS는 화폐와 마찬가지로 일반적 등가물이지만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관계지을 뿐 그 자체로 성립하지는 않으므로 화폐의 물신화가 생기지 않음.
②화폐 주권의 성립 : 각자가 계좌에 기록하는 방법으로 통화를 발행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짐
한국에서 LETS는 IMF 직후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여러 단체에서 시도했는데, 현재는 대전의 한밭레츠와 과천품앗이가 가장 활동적인 단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직 LETS는 전통적인 품앗이의 교환방식에 머물러 있지 정교하게 시스템화되어 있지는 않다. 비록 가라타니 고진이 LETS의 가능성을 높게 봤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이 자본주의적 현실이 쉽게 극복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듯이, LETS는 아직은 실험적 단계에 불과하다. 또한 경제학자인 가라타니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더 이상 LETS에 관해 상술하지 않는다. LETS와 같은 실험이 보다 안정화되기 위해서 시스템이 기술적으로 고안될 필요성를 고진은 인정하지만, 그는 LETS가 필요한 사회적 배경과 LETS의 원리만을 제시하는데 그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체계가 자리잡히는데 걸린 시간을 견주어 본다면, 새로운 교환양식이 약동하는 현재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규제적 이념의 인도를 받는 것이 아닐까? 칸트가 제시하는 사회성이 반사회성이라는 모순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새로운 교환양식은 자본주의라는 모순을 뚫고서야 나올 수 있지 않을까?
2)새로운 주권 : 발권의 개별화를 통한 자기 실현
언어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그린코프연합의 전무이사를 역임했던 유키오카 요시하루는 “생협은 언어다”라고까지 규정했다. 운동에서 언어가 설득을 위한 수단이자 실천을 끌어내는 무기가 될 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생협운동은 언어라는 미디어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역통화에 관한 세계적 이론가인 니시베 마코토는 지역통화를 화폐와 언어의 중간에 있는 미디어로 본다. “자유라는 관념이 아니라, 자유를 현실화하기 위한 경제적 및 윤리적인 미디어”로서 지역화폐는 화폐와 언어의 중간에서 소통을 하는 미디어의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통화는 자율성의 실질적 조직원리로 운영될 수 있다.달리 말해 LETS나 지역통화는 단지 경제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지역통화와 달리, LETS에서는 각자가(단지 계좌에 기록하는 것 뿐이지만) 통화를 발행하는 권리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국가 주권의 하나가 화폐 발행권에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입에 발린 인민주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자를 진정한 주권자에게 하는 것이다.”
이렇듯 화폐주권이란, 선거의 시기에만 실체화되는 주권 개념을 일상의 세계에서 구체화시킨다. LETS에서 활동하는 참가자는 재화와 서비스를 자본으로 축적하는 일 없이, 오직 교환을 계속적으로 해 나감으로써 서로에게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유통시킨다. 이러한 축적없는 구매활동은 스템프 화폐와 마찬가지다.자본 없이 오직 활동과 활동의 매개로 재화와 서비스를 창출하는 것은 진정한 주권의 발현이다. 더 이상 화폐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화폐는 오직 활동과 활동을 맺고 끊어주는 관절계(Articular system)의 역할에 머문다. 자본에 의해서는 일으켜지지 않던 개인의 잠재된 능력들이 LETS를 통해서 발현되고 증대될 기회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LETS에 대해서도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한계가 있다. 특정 재화와 서비스에 수요가 몰림으로써 수급 불균형이 생길 수 있으며, 다변화된 필요로부터 벗어나 있는 재화나 서비스는 사장될 수도 있다. 또한 화폐기근이 발생하는 최악의 불경기에 레츠는 유용하겠지만, 호경기에는 약화될 수 있으며, 공급 쪽에서 시장의 경향과 어긋나게 높은 가격을 형성하려 한다는 인식을 줄 수도 있다.이런 한계 때문에 마루야마 마코토는 레츠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참가자 개인이 적극적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할 의사와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그런 의사는 물론 능력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 경우에 들어맞는 비판은 칸트에게 향해 질 수 있는 비판과 유사하다. 그것은 칸트의 시민이나 레츠에 참가한 시민은 모두 자신의 능력을 발산할 수 있는 브르조아적 시민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을 자연사의 관점에서 본 맑스를 따른다면, 자본주의가 프로레타리아와 브로조아의 대립된 갈등을 초래한다는 입장은 구시대적이다. 오히려, 국내적일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진행되는 양극화 현상은 자본과 프로레타리아의 갈등양상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브르조아도 하루 아침에 프로레타리아로 전락할 수 있으며, 프로레타리아도 자본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양상을 지배하는 사회적 힘은 자본에 달려 있다. 이런 자본에 대한 분석에 맑스는 생의 절반을 투신했지만, 정작 자본을 극복할 대안을 맑스는 명확히 제시하진 않았다. 칸트의 경우는 윤리적으로는 전복적이라고 할 만한 자유의 정언명령을 제시했지만, 자본에 대한 분석은 물론, 그 극복의 구체적 대안은 칸트에게 기대할 수 없다. 가라타니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을 통해, 구소련의 몰락 이후 암흑기에 있던 그의 사유의 여정에 희망의 빛을 주는 대안으로 어소시에이션의 새로운 교환방식을 제시했지만, 그의 대안이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며, 맑스와 칸트의 사이에서 자신의 사유를 반사시키는 과정에서 현실의 운동과 교차한 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즉 자본을 초극하려는 운동은 수많은 조직가와 활동가에 의해 자본주의의 태동기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지속된 것이므로, 가라타니가 독창적으로 대안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기 주권의 발현을 위한 수단인 LETS와 같은 운동은, 노정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조우하면서 진화해 갈 수 밖에 없으며, 이 진화를 이끌어가는 추진 주체는 생협과 같은 조직이 유력하다. 왜냐하면 생협은 특정한 지역에 기반해 있으면서도, 지역의 이익에 함몰되지 않고, 지역을 넘어, 국가를 넘어, 계급과 인종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어떠한 사람, 조직과도 연대할 수 있는 연합체적 어소시에이션이기 때문이며, 바로 여기서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