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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21.02.23 사회의 사회1 : 코드화와 프로그램
  2. 2013.08.23 구일섭의 서신2

사회의 사회1 : 코드화와 프로그램

책들 Bücher 2021. 2. 23. 20:4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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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halb bildet sich im Zuge der Evolution von Cordierungen eine Zustzsemantik von Kriterien, die festlegen, unter welchen Bedingungen die Zuteilung des positiven bzw. negativen Wertes richtig erfolgt.

따라서 코드화의 진화가 이뤄지는 가운데, 어떠한 조건에서 긍정값 내지 부정값의 할당이 적절히 수행되는지를 확정하는 기준들을 위한 추가적인 의미론이 형성된다.

 

Wir werden diese Konditionierungen ‘Programme’ nennen.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을 프로그램이라고 부른다.

 

Sie hängen sich wie ein riesiger semantischer Apparat an die jeweiligen Codes; und während die Codes Einfachheit und Invarianz erreichen, wird ihr Programmbereich, gleichsam als Supplement dazu, mit Komplexität und Veränderlichkeit aufgeladen.

이것은 거대한 의미론적 장치처럼 각각의 코드에 부착되어 있다. 코드가 단순성과 불변성에 이르는 반면에 코드의 프로그램 영역은 말하자면 보조장치로서 복잡성과 가변성으로 채워진다.

 

Die jeweiligen semantischen ‘Bestände’ des Rechts zum Beispiel oder der Wissenschaft bestehen in diesem Sinne aus Programmen.

예를 들어 법과 과학의 의미론적 자산은 이러한 의미에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Niklas Luhmann, 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Suhrkamp, 2018), s.364. 장춘익 역, 사회의 사회1(새물결, 2012), 426쪽 참조. 

 

 

코드화는 양갈림 중 하나로 귀결되는 구조인 반면 프로그램은 이런 코드화에 역동성을 부여한다고 할까?  이것은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연관지어도 흥미롭다. 코드 자체로는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프로그램화 됐을 때 코드는 살아있는 객체처럼 움직인다. 이러한 구분은 매체와 형식의 구별을 상기시킨다. 

 

 

Die Codes bezeichenen für ihren jeweiligen Funktionsbereich das zuständige Medium, also eine begrenzte, aber lose Kopplung von Möglichkeiten.

코드들은 그것의 각각의 기능영역에 대한 해당 매체를, 즉 제한된, 그렇지만 느슨한 결합의 가능성을 나타낸다.

 

Sie können also nicht vergessen werden, während auf der Ebene der Programme sowohl Erinnern als auch Vergessen möglich ist, je nachdem, wie oft die Programme aufgerufen bzw., wenn nicht, aus dem Gedächtnis getilgt werden.

따라서 코드들은 망각될 수 없지만, 프로그램들의 층위에서는 프로그램이 얼마나 자주 소환되는지에 따라서, 그렇지 않으면 기억에서 삭제됨에 따라서 상기와 마찬가지로 망각도 가능하다.

 

상동

 

 

이하는 2016년 12월 이후 페북에 남긴 관련 메모(역순)

 

매체와 형식의 구별 : 매체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표현도구로 문자, 신호, 그림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지속적이진 않더라도 구성요소들의 강한 결합을 이루는 형식과 달리 느슨한 결합을 유지하면서 형식을 위한 무한에 가까운 원료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무한 조합을 위한 문자나 성당의 원형기둥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란 매체

 

루만은 단지 자신만의 독특한 사회이론을 펼치는 사회학자가 아니라 사회이론의 철학을 제시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프랑스 철학의 독일적 수용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역설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세계는 부분이나 전체로 파악할 수 없는 불가해한 통일체로서,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만 접근가능한 구성물인 것이고(베르크손의 <창조적 진화> 1장) 이 방식 중 루만이 세계, 특히 세계사회를 이해하는 유력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이다.

 

의식체계와 커뮤니케이션체계의 유력한 대체물인 컴퓨터가 인간지능의 모사인지 인간지능을 넘어서는 것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컴퓨터가 구성한 실재와 의식 또는 커뮤니케션 체계 사이에 컴퓨터가 산출한 구조적 결합이 가져올 결과. .루만 GdG S.117-118..즉 체계의 인공적 대체물이 초래할 예측불가적인 결과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문제.

 

루만에게 인구는, 문자나 기호 등의 커뮤니케이션 매체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동시에 가동시킬 수 있는 70억의 의식체계이며(S.115), 이들에게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어떤 합의점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통제에 어려움을 겪는 바이러스처럼.

 

루만의 체계이론 혹은 사회이론은 헤겔과는 다른 맥락과 여타 이론의 누적으로 정신현상의 발생에 관한 현대적 해석을 포괄 : 커뮤니케이션을 발생시키기 위한 의식체계의 발달은 신경생리학의 조건에서 가능하나 신경생리학에서 바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것은 아님. 문자를 비롯한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발달에 관한 설명은 온전히 자연에 맡길 수 없음

 

사회의 재구성, 사회의 구별, 사회의 작동을 위한 시간 제약적 의사소통의 요소 : 일회적 놀람만 일으키는 정보, 행위로서 시점에 묶인 전달, 반복되지 않고 상기될 뿐인 이해

루만,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 s.71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대한 간략 후기: 베버에서 비판이론으로 이어지는 독일 사회이론과 파슨스의 체계이론에 대한 비판적 재구성을 통해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정립시키려는 거대한 시도로만 보임. 이론사를 등에 업고 이를 자신의 구상에 맞춰 절단하는 실력은 예리하지만 결국 반사적 구성물을 벗어나지 못함. 더이상 거대이론이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하고 통섭적 학문교류의 필요성을 역설한 점에서 선구적 귀감. 또한 하버마스 본인 스스로도 법학 강의 청강생으로 대학생들 틈에서 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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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섭의 서신2

서술 Beschreibung 2013. 8. 23. 23:1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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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섭과 하버마스의 서신 2 :
『의사소통행위이론2 :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 중
V장 <미드와 뒤르켐에서의 패러다임 전환>

 

*이 글은 가상의 서신이며 텍스트 소개를 주목적으로 합니다. 인용된 텍스트의 쪽수는 문장 끝의 [ ] 안에 수자로 표기하며, 직접 인용한 텍스트의 문장은 ‘ ’사이로 넣습니다. 또한 『의사소통행위이론 1권』은 [1권, ] 으로 표기하며, 다른 인용문헌도 [ ] 로 표기합니다.
**주텍스트 :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2, 장춘익 역(나남, 2006).
***원문 대조본 : Jürgen Habermas,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 band 2 Zur Kritik der funktionalistischen Vernunft (Suhrkamp, 1982).


 

루카치 (2013.08.17.月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편지가 많이 늦었다. 1차 서신을 마친 후,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중 1967년 저자 서론을 지난 6월에 읽었다. 자신의 40여 년 전의 논문집을 유토피아적 관념론이라고 스스로 비판하는 루카치에 대해, 당신은 물화 개념을 통해 재차 비판을 가했다. 루카치와 아도르노는 미학을 포함한 사회철학적 주제의식의 공통성과 서술 방식의 복잡성에서 유사하기도 하지만, 아도르노는 루카치를 의식철학의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실패한 이론가로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 비판을 당신은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루카치는 당신들처럼 단지 이론의 전당에서 현실을 관찰하며 관조만 했던 인물이 아니다. 그는 국내적이며 국제적인 혁명의 과정에 깊이 개입하면서도 이론과 현실 해석을 통합하려고 했던, 비록 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지라도, 실천을 사유로 매개하려고 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성명이나 발표하고 각종 상을 수상하며 한가한 노년을 보내는 당신과는 첨예하게 다른 역사적 조건에서 분투했던 인물이다. 미국으로 망명해 천박한 대중문화에 아연실색하며 비판에 급급해 있던 비판이론가들과도. 당신이 루카치에게 가한 비판이 과연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 언제 기회가 되면 좀 더 면밀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여기서 내가 문제 삼는 것은, 『역사와 계급의식』에 관한 루카치 자신의 1967년 자아비판이 아도르노에겐 읽히지 않았을지라도, 분명 당신은 접했을 것인데, 이를 알면서도 재차 비판을 가하는 것은 공정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하버마스가 참고한 루카치 전집 2권 『역사와 계급의식』의 출판 연도는 1968년임).

 

지난 4월 9일 편지의 말미에서 당신은 사회합리화의 문제를 의사소통행위의 개념과 조절매체를 통한 체계형성의 개념으로 전개하기에 앞서, 이 기본개념들을 미드와 뒤르켐의 이론에서 재구성해 보자고 했다. 이들에게서 이론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하는 이유와 앞으로의 논의 방향에 대해 설명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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