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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10.28 남한산성에 다녀오다
  2. 2009.09.24 남한산성-2
  3. 2009.09.21 남한산성-1

남한산성에 다녀오다

여행 Reise 2009. 10. 28. 10:2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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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랜만에 강동 쪽으로 공급지원을 나갔다가, 일찍 일을 마치고 동문과 초저녁에 산성역에서 만났다. 근방의 술집에 들어갈까 하다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길래 산에 가자고 했다(산성역 1번 출구 9번 버스). 아마도 서울 근교에 500미터가 넘는 산길로 올라가는 버스노선은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빙빙 돌며 올라가는게 마치 옛날 한계령 길 같다. 버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가파른 벼랑과 나무가지 넘어  저 멀리 성남과 송파 일대의 야경이 너무도 눈부시게 비춰지고 있었다. 북문 쪽 인근의 너른 평지에 있는 오래된 손두부집에서 동동주를 마시고 북문까지 올라가 봤다. 성문이 열려 있었는데, 성문 밖은 낭떠러지로, 광주 방면이다. 호란 당시 인조가 머물렀다는 행궁을 새로 조성했다길래 찾으러 갔다가, 밤길에 길을 헤매다 북문까지 올라가 본 것이다. 어두워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책으로 접했던 산성 내부를 눈으로 보니 색다르다. 나도 유적지나 좀 돌아보고 역사소설을 써서 재미좀 봐볼까. 남한산성은 얼마나 좋은 소재인가. 북문에서 내려와 다시 버스를 타고 하산한 뒤 역 인근에서 한잔 더 하고 헤어졌다. 잠실에서 버스를 갈아 타는데, 예전에 육영재단에서 운영하던 어린이집 자리에 홈플러스가 들어서 있는 것을 확인했다. 잠깐 사이에도 많은게 변하지만, 사라진 권력의 유산은 너무도 탄탄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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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2

책들 Bücher 2009. 9. 24. 17:4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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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남한산성>을 계속 보고 있다. 궁금해서 인터넷 지도를 펼쳐 봤더니 남한산성은 내가 살고 있는 남양주에서 수직선상에 있는데, 거리는 약 12km 정도 밖에 안된다. 청군의 우두머리인 용골대가 조선왕에게 쥐새끼처럼 왜 그런 산골에 숨어 들어 갔냐고 야유하는 것처럼, 남한산성은 산세를 잘 활용한 요새이지만, 사방에서 청의 20만 대군이 에워싸면 그대로 포위되고 마는 섬과 같은 지형이다. 물론 왕가 행렬이 강화도에 가려다가 청군이 강화도의 길목인 김포를 선점한 상태라 급작스럽게 남한산성으로 길을 잡은 것이긴 하지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서도 왕가와 조정이 이렇게 방비가 없었다는 것도 놀랍다. 조선은 차라리 200년 역사로 끝장나야 했다.

예전에 한번 남한산성 밑자락 쯤에 간 적이 있는데 사철탕 집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닭, 개고기 류인데, 이것도 역사적 유산이다. 호란 당시 병참이 없어 말라가는 남한산성에서 닭 우는 소리와 개 짓는 소리는 날이 갈 수록 줄어들었다. 말까지 대형 솥에 넣어 삶아 먹었을 정도니 계견은 오죽했으랴. 수원에 소갈비가 유독 유명한게, 수원성 건립 후 노역에 동원된 백성에게 정조가 운반용으로 쓴 늙은 소들을 먹인데서 유래했듯이, 모란 시장엔 개고기가 유명하다.

김훈도 화자를 빌려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행태를 조롱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왕가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것은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투항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병력도 없는데 장기적으로 버티려면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 가야 했다.  도망쳐 다니는게 왕의 위엄에 지대한 손상이었을까? 도주하면서 백성을 끌어 모아 항전을 했더라면, 그래서 끝내 패퇘해 왕조의 운명이 끊겼더라도, 백기투항해 용골대 앞에서 머리를 찧는 것보다 더 낫을 것이다. 그래서 비굴하게 연명한 왕조는 다시 200년 후 400년 전 조선을 침탈한 국가에게 제 나라 백성의 혁명적 봉기를  진압케 하고, 끝내 나라를 넘기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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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1

책들 Bücher 2009. 9. 21. 11:5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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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처음으로 김훈의 소설책을 봤다. <남한산성>. 대략 짐작을 했지만, 국가주의 정서가 물씬 풍긴다. 아무래도 그는 왕조시대만을 다룰 수 있는 작가같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이미 전날 얼어붙은 강을 건넜던 왕가 일행이 들어간 남한산성으로 가기 위해 뱃사공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넌 후, 뱃사공을 죽이는 대목은 국가 폭력의 현재성을 보여준다. 얼어붙은 강의 살얼음길을 피해 왕가 일행을 안내하고도 보리 한줌 받지 못한 무지랭이 뱃사공이 식량을 위해 청군에게 길을 안내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예판은 뱃사공을 처단할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처리'방식은 작가의 허구이지만, 이런 허구를 만든 의식에는 국가주의적 폭력에 대한 묘한 정당화가 도사리고 있다. 전시에 부역하는 자는 일고의 가치없이 처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시에 이런 행태는 비일비재하며, 따라서 이에 대한 제한 장치가 발동되는 것은 익히 예상할 수 있으나, 김훈의 관점에는 마치 자코뱅적인 처단의지가 보인다. 뱃사공 하나 죽인다고 물밀듯이 들어오는 청군을 막을 수 있는가? 전쟁을 초래한 조정에 비해 강에 의존해 연명하는 뱃사공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가? 수탈은 할 뿐 재분배는 없는 조정에 대해 백성은 무슨 아쉬움이 있는가? 실제로 그 당시는 단일한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훈은 어떠한 사정에 놓인 백성일지라도 국가를 배반하는 행위는 응징해야 한다는 국가주의를 풍긴다. 불편하다. 뱃사공은 자신의 불충한 속내를 털어놓은 놓은 이유로, 아무런 대가없이 전날 왕가 행렬을 건네주고, 다음날 벼슬아치를 건네주고도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살려고 하는 자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지는 못할 망정, 미리 배반을 막기 위해 처단하는 것은 병영국가의 단면이다. 하긴 조선이란 국가가 왕족과 정승의 나라였지 진정한 백성의 나라는 아니긴 했다. 그런데 백성을 말먹이를 위한 일개 지푸라기 정도로 보는 봉건적 시대의식에서 갇혀 있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불편하고 위험하다. 김훈이 이런 시대의식에서 자유롭다면, 뱃사공을 최대한 설득하거나 이것도 안되면 남한산성으로 강제로라도 끌고 가는 식으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 딸이 강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예판의 권유를 마다한 뱃사공을 기습처단하는 것으로 김훈은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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