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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처음으로 김훈의 소설책을 봤다. <남한산성>. 대략 짐작을 했지만, 국가주의 정서가 물씬 풍긴다. 아무래도 그는 왕조시대만을 다룰 수 있는 작가같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이미 전날 얼어붙은 강을 건넜던 왕가 일행이 들어간 남한산성으로 가기 위해 뱃사공의 도움을 받아 강을 건넌 후, 뱃사공을 죽이는 대목은 국가 폭력의 현재성을 보여준다. 얼어붙은 강의 살얼음길을 피해 왕가 일행을 안내하고도 보리 한줌 받지 못한 무지랭이 뱃사공이 식량을 위해 청군에게 길을 안내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예판은 뱃사공을 처단할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처리'방식은 작가의 허구이지만, 이런 허구를 만든 의식에는 국가주의적 폭력에 대한 묘한 정당화가 도사리고 있다. 전시에 부역하는 자는 일고의 가치없이 처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시에 이런 행태는 비일비재하며, 따라서 이에 대한 제한 장치가 발동되는 것은 익히 예상할 수 있으나, 김훈의 관점에는 마치 자코뱅적인 처단의지가 보인다. 뱃사공 하나 죽인다고 물밀듯이 들어오는 청군을 막을 수 있는가? 전쟁을 초래한 조정에 비해 강에 의존해 연명하는 뱃사공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는가? 수탈은 할 뿐 재분배는 없는 조정에 대해 백성은 무슨 아쉬움이 있는가? 실제로 그 당시는 단일한 민족의식과 국가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훈은 어떠한 사정에 놓인 백성일지라도 국가를 배반하는 행위는 응징해야 한다는 국가주의를 풍긴다. 불편하다. 뱃사공은 자신의 불충한 속내를 털어놓은 놓은 이유로, 아무런 대가없이 전날 왕가 행렬을 건네주고, 다음날 벼슬아치를 건네주고도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살려고 하는 자에게 살 길을 마련해 주지는 못할 망정, 미리 배반을 막기 위해 처단하는 것은 병영국가의 단면이다. 하긴 조선이란 국가가 왕족과 정승의 나라였지 진정한 백성의 나라는 아니긴 했다. 그런데 백성을 말먹이를 위한 일개 지푸라기 정도로 보는 봉건적 시대의식에서 갇혀 있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불편하고 위험하다. 김훈이 이런 시대의식에서 자유롭다면, 뱃사공을 최대한 설득하거나 이것도 안되면 남한산성으로 강제로라도 끌고 가는 식으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 딸이 강 저편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예판의 권유를 마다한 뱃사공을 기습처단하는 것으로 김훈은 '처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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