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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의 다소 지리하고 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다가 대출기한이 다되어 세러 브래드퍼드의 <체사레 보르자>로 갈아 탔다. 단테에서 시작한 여정이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거쳐 고대 로마냐에 도달했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돌아 15세기의 이탈리아에 다시 상륙한 셈이다. 단테와 마찬가지로 피렌체 출신인 마키아벨리에게 이상적인 군주로 서술되는 보르자 가문의 이 특출한 인물 체사레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년, 로드리고 보르자)의 서자다. 교황이 되기 전 반노차라는 유부녀를 통해 끔직하게 아끼게 될 자녀를 얻게된 로드리고 보르자의 가문은 스페인 북동부 아라곤의 보르야라는 외진 도시를 기원으로 하며, 체사레의 증조부 알론소가 처음으로 이탈리아 땅을 밟아 근면과 운의 조합으로 교황이 되면서(1455년 칼릭스투스 3세) 이탈리아 중부를 집어 삼키려는  이 가문의 야망이 펼쳐진다(밀라노, 피렌체, 나폴리는 이들이 넘보기엔 열강의 기세가 드셌고 강건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유일한 자립국이었다). 교회를 중심으로 현실정치에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교황이 자신의 정부를 통해 얻은 체사레를 추기경에 앉혔다가 영구적인 세속 권력(결혼할 수 없는 교황과 달리 정당한 결혼을 통해 세습이 가능한 군주)을 위해 다시 이 아들을 환속시키고,  교황이 된 이후로도 노골적으로 새로운 정부를 두는 행태가 당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준 바와 같이, 체사레 보르자의 행동은 정적에 대한 은밀하고 신속한 처단으로 인해 쿠테타의 모범으로 남아 있다(반란을 획책한 유명 가문 출신 용병대장들에 대한 숙청).

 

보르자 부자의 이탈리아 지배는 외세의 힘, 특히 프랑스 왕가 덕분에 가능했다. 체사레는 추기경 모자를 벗고 루이 12세 왕가와의 혼인으로 발렌티아 공작으로 변신하면서 프랑스를 등에 업으면서도 종국엔 프랑스를 등져야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교황령 로마냐에 척추모양으로 펼쳐진 영지들(포를리, 이몰라, 리미니, 파엔차, 우르비노 외)의 재복속을 위해선 루이 12세의 병력 지원과 승인이 필수적이었고 피렌체에 대한 위협에도 루이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나 스페인 출신의 보르자 부자가 스페인과 프랑스가 각축을 벌이는 나폴리에 눈을 돌리면서 결정의 순간이 다가 오지만(이 열강들이 이탈리아 남부에서 다툼을 벌이는 사이에 프랑스에 민감한 토스카나를 침공함으로써 피렌체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 갑작스러운 교황의 죽음과 체사레의 열병이 목전에 둔 이탈리아 중부의 단일 국가수립이라는 목표를 멀어지게 한다.

 

알렉산데르 6세 사후, 체사레에게 호의적이었으나 단명으로 끝난 차기 교황(비오 3세, 26일간 재임)에 이어 교황직에 오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1503년 율리오 2세)는 보르자 가의 오랜 정적이었다. 체사레와의 협상을 통해 줄리아노는 쉽게 교황직에 오를 수 있었지만 이후 체사레를 적대하게 되고 내부의 적(콜로나 가, 오르시니 가)과 외부의 적(스페인의 페르디난도, 프랑스의 루이)에 둘러싸인 체사레는 로마에 묶인다. 루터에게도 알려진 성직매매로 보르자 가에 빚을 진 일부 추기경단과 잔존 충성파의 도움으로 체사레는 스페인으로 건너 갔으나 여기서도 감금되고, 이후 탈출해 합스부르크 가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나바라의 전장에서 무모한 죽음을 맞는다(1507년, 31살). 피렌체 정부 10인 행정위원의 비서로서 바티칸에 파견되어 보르자 가의 동태 보고 임무를 수행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의 성공과 몰락을 바로 곁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그가 줄리아노와 손을 잡으려 했던 것을 마키아벨리는 그의 치명적인 실수로 봤다.

 

스텐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 중 대저택에서 벌어지는 상류층 인사들의 집단혼음은 고급 매춘부를 동원해 이색파티를 즐겨 벌였던 알렉산데르 6세의 교황궁을 모티브로 함을 알 수 있다. 생식력을 놓고 시합까지 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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