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불운의 시절

책들 Bücher 2012. 3. 20. 22:0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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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4권 후반부를 읽고 있다. 조씨 일가가 종손으로는 서희만 남은 최참판댁을 접수한 이후, 시대가 을사조약과 겹쳐지면서 소설 전개의 에너지가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 든다. 임이네와 엮어진 용이의 운명이 기이한 반면 전반적으로 세대 갈이(이런 말이 성립할까마는)가 이루어진 이후의 삶들은 초라하기 그지 없다. 동학전쟁과 임오군란에 참여했던, 이 소설에서 은근히 작가의 귀추를 받는 것으로 보이는 총각 대목장 곰보 윤보가 뭔가 해볼려고 한다.  

윗마을, 아랫마을 장정들과 합심해 조대감댁을 치는데 삼수가 다리역할을 하지만, 이런 자의 본성상 위기를 자신의 이익으로 삼으려는 저의(조대감의 꼬봉 역할을 지서방한테서 회수하려는 목적)는 조대감이라는 또다른 악에 통할리 없었다. 평사리 거사 전 윤보를 찾아가 같은 편역에 설 것을 다짐하던 삼수가 거사날 밤 긴급히 사당 마루 바닥 밑에 숨어 들어갔던 조대감과 홍씨를 거사대에게 발설하지 않은 것은 욕심이었던 것이다. 아래 인용문은 꼭 누군가를 생각나게 한다.

악의 생리 : "어리석은 삼수. 그가 아무리 악독하다 한들 악의 생리를 몰랐다면 어리석었다 할밖에 없다. 악은 악을 기피하는 법이다. 악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언제나 남을 해칠 함정을 파놓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궁극에 가서 악은 삼수가 지닌 그와 같은 어리석음을 반드시 지니고 있다. 왜냐, 악이란 정신적 욕망에서든 물질적 욕망에서든 간에 그릇된 정열이어서 우둔할밖에 없고 찢어발길 수 있는 허위의 의상을 걸치고 있기 때문"

박경리, 『토지』4권(나남, 2011, 25쇄), 34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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