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 도시의 철학과 사람들

단상 Vorstelltung 2023. 6. 12. 00:5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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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살의 전설적 선배, 개설된지 얼마 안된 과의 단년 대표까지 역임한 그는 당시로서는 알콜중독자로 보였지만, 그때의 그에 버금갈 정도로, 대개의 중장년이 그렇듯이 매일 알콜을 주식처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그는 다만 조금 일찍 달린 것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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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벤야민은 예술이 기술에 종속되는 시대적 양상을 대중이 정치기술에 종속하는 양상과 병치시킨다. 회화가 선사했던 주의와 집중, 명상을 대체해 영화는 분산과 오락, 기분전환을 대중에게 유포하는데, 이러한 역할은 정치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프로레타리아가 정치의 전면에 수용되는 듯한 효과다. 그러나 영화가 삶에 어떤 기여를 하기 보다는 삶을 잠시 배제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정치도 결정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벤야민은 파시즘이 소유관계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지배자 숭배라는 쇼를 정치에 끌어들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술복제에 대한 벤야민의 직관은 오늘의 시대에 별로 신선하지 않다. 선거때마다 트로트를 개작해 터트리는 이곳에서 문화는 상업을 넘어 정치선동에 자연스럽게 이용되는 풍토다. 오히려 유일성, 현존으로서의 예술은 부유층의 관심어린 투자 목록속에서 향락된다. 예술을 관람하는 분위기로서의 아우라는 여전히 전시장과 교회에서 작용하고 있고 외부인을 차단한 소굴화된 전시공간이 어딘가에서 횡행하고 있겠지만, 이제 예술가는 건축가처럼 작품의 사용성과 촉각성에 열려 있다. 더이상 시각의 대상으로서만  음미되는 예술은 이제 퇴폐적이고 변태적이며 유아적이다.

그러나 카메라의 발전은 시각의 정밀화를 가져왔다. 벤야민이 회화와 영화의 사이에, 그리고 마술과 외과술 사이에 놓은 간격은 날이 갈 수록 더 벌어질 뿐만 아니라 영화와 외과술의 결합으로 영상의학이라는 분과학도 나왔다.  카메라는 은하 너머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토콘드리아의 내장에도 시선을 투과한다. 예술은 극단화되는 과학의 발전 앞에서 더이상 은밀한 부분을 숨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복제의 기술은 단지 이미지의 이미지들을 대량 생산하는 것 뿐만 아니라 복제품의 기원을 더이상 원본에서 유출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올려 놓는다. 또한 더이상 해당 분야의 전문가만이 글을 쓸 수 있는게 아니라 글을 쓰는 기계도 충분히 가능한 세상이다. 따라서 예술의 종말은 작가의 종말도 포함한다. 집단창작이라는 방식은 이러한 기계적 창작의  원시적 형태이다. 왜냐하면 이 한 편의 글에서  분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분업은 기계적 방식의 원초적 형식이므로, 분업화된 글쓰기는 아직은 수공업적인 기계적 생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공업적 생산도 자동생산체제로 급변하는 것도 그리 먼 일이 아니다. 프로그램화된 글쓰기 환경에서 작가는 주제와 핵심어, 연결어 몇개를 선택해서 컴퓨터가 알아서 글을 쓰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우라의 몰락, 회화의 종말, 작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우라는 횡행하며 회화는 생산되고 작가는 활동한다. 이들을 넘어서는 기술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낙후한 창작들이 쉽게 사라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다만 기술의 장막에 가려질 뿐이다.  아니 오히려 기술의 장막에 침을 뱉으며 자신의 전통적 의례에 집전하는 작가들도 있다. 이는 마치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횡단하면서, 기내에서 잠꼬대로 자신은 헤험을 쳐서 대륙을 횡단하고 있다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다. 작품의 생산과 향유의 조건을 날이 갈수록 변화시키는 기술복제와 기술진보의 시대는 마치 발을 담그자 마자 원래 서 있으려 했던 지점이 저 멀리 흘러가 버리는 거침없는 강물같다.

2008.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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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근원은 신이 아닌 인간의 선택(판단의 자유, 그리고 판단의 책임)

김용옥의 강연에 의하면, 구약성서의 집필시기는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수기(b.c. 6세기, 70년간)로 추정된다. 즉 모세오경과 같은 구약의 기초서사(출애굽 외)를 비롯해 열왕기,  유대 통일왕국을 이룩한 다윗의 이야기가 모두 고고학적 증거가 없는 하나의 신화라는 것이다. 이는 오디세이가 고대 영웅들의 신화적 서사인 것과 비슷하지만 주변 강대국들에 고난을 당하고 결국 멸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염원하는 소망을 담은 장대한 드라마라는 것이다. 마치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서가 구약으로만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규범과 서사로 남았을 것이지만, 신약으로 인해 보편종교로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다윗도, 솔로몬도, 그리고 예수도 역사적 실체가 모호한 신화적 서사의 주인공들일지라도, 서한의 형식으로 신약 집필의 서두를 마련한 역사적 인물 바울에 의해서 기독교의 고난과 승리의 길이 예비된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믿는 것, 그것은 결단이고 나아가 신앙일지도 모른다.

김용옥은 구약에 기반을 둔 유대교의 야훼신앙을 민족 편협적인 성황당 종교라고 폄훼하며 그런 류의 신앙은 세계에 보편적으로 산재해 있다고 하면서, 러셀의 서양철학사에 근거해 플라톤의 심신 이원론을 바울이 끌어들이면서 유대교의 뿌리에서 기독교가 혁명적으로 불거져 나온 것으로 본다. 다른 맥락에서 니체도 바울을 기독교의 산파로 보지만, 유대 철학자 야곱 타우베스는 정치적 맥락에서 바울을 본다. 루터 보다 더 급진적이고 근본적으로 유대교의 전통을 뒤엎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 대해 두리뭉실하게 존립과 타협의 줄타기를 하는 유대교 지도부와 달리 로마의 황제 숭배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보를 서한의 형식으로 바울이 전개했다는 것이다. 종교가 사회현실 및 권력과 관련을 맺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사회를 개혁하는 일, 그리고 이것이 성공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불교는 이런 일에 초연한 인상을 불러올지 모르지만 인상일 뿐이다.

하지만 전례 혹은 의식은 훈련이자 무장으로서 실행력에서 지식을 넘어선다. 타우베스는 전례학에서 신학을 도출하는 방식에 경도됐다(바울의 정치신학, 조효원 역 그린비 2013, 94면).

J. Habermas, A.e.G.d.P., s.15. : 만들어진 신, 인간과 공진화한[커뮤니케이션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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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땅에 일하러 온 것이지만, 예상보다 혹독한 업무조건에 놓이다보니 일만하러 여기에 온 것인지 의문이 들면서 다시 공부의 길을 찾아보자는, 하지만 생업을 놓지 않으면서, 아니 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래도 돌파구를 마련해 보자는 생각이 요며칠 강하게 들었다. 그것이 학위처럼 타인의 인정을 받는 식의 공부이든, 자기만족에 그치는 것이든간에, 일단 조금식이라도 시도해 보자는. 시간도 없고 눈도 침침해 졌지만, 시간을 만드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도 일종의 다짐과 의지일지도 모른다. 일단 시작은 언어와 주제를 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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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입국 후기 2023.03.07

여행 Reise 2023. 3. 15. 17:1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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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독일에 온지 일주일이 되어간다. 처음 온 것도 아니고, 비록 도착 후 가는 도시는 매번 달랐어도 여전히 관문은 프랑크푸르트 공항과 중앙역이다.

한 달 전, 급작스럽지만 그래도 싼 비행기표를 구한다는게 경유편인 폴란드 항공이었다. 원래는 한번 이용해 본 적이 있던 역시 경유편인 네덜란드 항공을 예약했다가 무료수하물 제공이 없어서  취소하고 잡은 것이 폴란드 항공이었는데, 막상 프랑크푸르트 공항 도착시각이 밤 10시 40분이었다. 공항에서 70여 km 떨어진 도시를 뭐 어떻게든 가는 것은 되겠지만, 열차가 그 시간대에 없다면 문제였다.

폴란드 항공의 일반석 무료 수하물은 위탁이 1개 23kg, 기내는 8kg 이내였다. 출국 며칠 전 갑자기 가져갈 무거운 짐이 생겨서 위탁수하물로 가져갈 짐을 줄여서 23kg로 맞추긴 했지만 기내로 가져갈 짐은 도저히 8kg 내로 줄일 수 없었다. 출국일 당일 인천공항의 폴란드 항공 부스에서 발권을 할 때 아무래도 기내로 가져갈 짐의 부피가 눈에 띄여서 직원이 중량을 재보자고 했고 8kg가 추가되어 적지않은 추가 운임을 내야 했다.

짐을 붙이고 잠깐 대기하다 탑승했다. 이륙 후 안정궤도에 진입하자 음료와 식사가 제공되었고 이후 바로 기내는 소등되었다. 무려 10시간 가량이나. 식사 후 잠깐 잠들긴 했으나 어두운 기내에서 10시간 이상을 몽롱한 상태에서 버텨야 했다.


비행기는 우크라이나 남동부의 격전지를 비켜가는 경로를 취함에 따라 시간이 더 걸리는 것으로  보였다. 유럽에 진입하자 점등이 되고 음료와 식사가 나왔다. 인천에서 12시 30분에 출발해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 현지 시각 18시에 도착했다. 13시간 30분의 긴 비행이었다.

공항 부지는 매우 광할하지만 시설은 다소 노후해 보이는 바르샤바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기 전 입국심사를 받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짧은 머리의 남성 심사관은 앞선 사람들에 비해 짧게 내 여권을 살펴본 후 질문도 없이 도장을 쾅 찍어줬다. 그리고 기내 수하물과 소지품 통관 심사가 이어졌는데, 특이하게도 폴란드 경찰이 가방을 직접 뒤지기까지 했다. 면세 담배 한 보루는 허용이 안되는지 뭐라 지적을 했지만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경유편 출국 대기실 한 가운데 흡연장이 넉넉히 있는 점이 편리했지만 갈아탈 비행기가 소형이라서 그런지 승객들을 가득 실은 버스편으로 비행기까지 이동해야 했다.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국적으로 보이는 60대 여성이 통로에 앉고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는데, 20시 40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22시 40분까지 2시간 비행중 내가 한번 화장실을 가려고 하자 이 여성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투덜댔다. 이후 공항에 도착해 위탁수하물을 찾으러 갈 때, 이 비행편이 유럽내의 짧은 경유이고 승객들도 대부분 독일인이나 폴란드인으로 위탁 수하물을 찾으러 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다시 만원 버스를 타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어느 구석지고 음산해 보이는 입국장 입구에서 버스는 승객들을 하차시켰다. 계단을 올라 입국장에 들어서는데 살짝 놀랐다. 입국심사대가 없이 바로 공항 밖으로 나가는 출구가 펼쳐진 것이다. 그러니까 바르샤바의 입국심사로 독일입국심사는 완료된 것이다.

여권을 들춰보니 2년전 네덜란드항공 경유편으로 귀국할 때도 출국도장은 암스테르담에서 한번만 찍혔다. EU의 실체는 마트 뿐만 아니라 이런 데에서도 직감할 수 있는 셈이다.

우선 나가기 전에 위탁수하물을 찾아야 하는데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1층의 배기지 컨베이어는 대부분 멈춰 있는 것으로 보여 지하로 내려갔다. 여기서 내 옆에 앉았던 그 러시아계 여성을 볼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른 비행기를 타고 온 것으로 보였다. 20분 정도 기다린 끝에 수하물이 나왔고 출구에서 살짝 헤매는 나에게 한 20대 초반의 건장한 소녀같은 직원이 친절히 출구를 안내해 줬다.

공항을 빠져 나가는 5유로 상당의 전철표를 끊고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서 내려 근방의 예약한 숙소로 갔다.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각, 방에 짐을 풀고 맥주나 한잔 하러 근처의 아이리쉬 펍에 가려다 앉을 자리도 없이 사람이 많아서 근처 매점에서 맥주 2병을 사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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