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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비주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서양 철학사에서 '경멸'이라는 단어를 사회적 주제로 부곽시킨다. 경멸이란 인간이 인간에 대해 갖는 불쾌한 감정이다. 경멸의 대상인 후자의 인간이 불쾌를 유발할 수도 있지만, 경멸을 느끼는 전자의 인간이 불쾌를 생산할 수도 있다. 경멸이 발생하는 원인을 이 양자의 어떤 지점에서 명확히 갈라 규명하려는 것은 심리학적 탐구를 포함한 경험과학이 떠맡을 문제지만, 2,000년 전에도 있었던 이런 감정이 새삼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래서 고대 철학사에서부터 경멸은 한 무리의 사유 집단이 걷잡을 수 없는 수효의 군중을 교양화시키기 위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경멸을 비로서 사회적 주제로 파악한 철학자는 니체이다. 차라투스트라가 지상의 인민에게 쏟아내는 비극적 서사시는 인민에 대한 경멸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슬로터디예크가 말하듯, 경멸을 가린채 대중에게 아부하는 헤겔이나 마르크스에 비해 니체야 말로 솔직한 철학자인 셈이다. 그러나 이게 다인가? 경멸의 베일 너머에는 또한 질투심이 도사리고 있다. 집시여인인 에스메랄드를 사랑하는 노틀담의 꼽추 콰지모도를 경멸하는 부주교 클로드에게도 질투심이 유발된다. 질투심은 한편으로 증오로 치닫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차이가 있는 두 인간을 동화시키도록 촉구할 뿐만 아니라, 질투를 유발하는 인간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욕망의 샘이다. 이런 점에서 차라투스트라와 토니오 크뢰거는 유사한 점이 있다. 즉 이들의 질투심에는 어떤 동경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 동경의 대상은 차라투스트라에게는 운명애이며 토니오 크뢰거에게는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일상의 부르조아적 시민의 생활세계이다.

토니오가 동경의 대상으로 삼은 북구의 사람들에 비해, 자신과 같은 예술가들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는 대중을 경멸하면서도 대중 속에서 예술의 의미를 찾는 시민 예술가로 자신을 정립시키려 한다. 시민 계급이란 자신의 지위를 주어 받은 것이 아니라 투쟁하고 쟁취한, 생성해 만들어낸 사회적 창작물이다.  토니오가 고난을 모르고 양심이 없는 지중해 연안 사람을 혐오하고 거센 바닷바람에 단련된 북구 사람을 동경하는 이면에는, 그의 고향에 대한 애증 섞인 정서도 있겠지만, 이러한 사회성의 배경도 있다. 자신과 같은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시민사회에서 변화의 움직임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는 촉수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는 작용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가가 일상의 사회를 벗어나 자신만의 천상으로 비상하는 것은, 마치 신, 자유, 불멸성과 같은 칸트의 선험적 이념이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유의 비행을 감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쩌면 칸트처럼 소박하게도, 토니오는 이 거친 물결이 흐르는 강의 양안에서 굳건한 다리를 세우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예술가에게 다리라는 건축물이 가능한 것인가?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소명, 아니 저주를 부여받은 예술가에게 견고한 다리는 모순된 건축물이다. 이런 건축은 예술가가 개입할 수는 있으나 전담할 수는 없는 문제다. 왜냐하면 현실에 강하게 밀착되어 자기 소리를 분명히 내는 시끄러운 무리배들이 예술가들에게 떠밀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28살의 나이에 발표한 이 자전적 단편에서 토마스 만의 유년과 청년 시절의 소외된 의식과 이를 극복하는 과정, 그리고 책임있는 예술인의 상에 대한 의지와 더불어, 젊은 작가의 특권인 방랑의 유희를 읽을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마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연상시킨다. 오직 방향없고 배설적인 경멸로 가득찬 『호밀밭의 파수꾼』에 비해 이 작품에서는 어떤 숭고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조짐이 드러난다. 인생의 특정한 시절,  한때의 비상함으로 추억되는 빛바랜 <젊은날의 초상>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바다의 물결 소리가 내게까지 올라옵니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있는 한 세계가 들여다 보입니다. 그 세계는 나한테서 질서와 형상을 부여받고 싶어서 안달입니다."(107-108)

텍스트 :  토마스 만 단편선, 안삼환 외 역(민음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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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학생과의 간담회

주장 Behauptung 2008. 7. 29. 09:01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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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월요일은 굶주리는 북한동포를 위한 점심 단식과 모금회 및 북한상황에 대한 정보 교류회가 있다. 2주째 참석하는데, 지난 시간에는 민간의 탈북청소년 학교인 셋넷학교 교장과의 간담회 및 동영상 시청이 있었고, 오늘은 지난 4년 전 탈북해 한국에 온지 1년이 됐고 현재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20대의 여학생과 간담회가 있었다. 탈북한 청소년들이 정말 영화 하나를 찍을 정도의 소재로 삼을 만한 체험을 겪었다는 교장의 말처럼, 오늘 온 탈북 학생도 만만찮은 여정을 들려줬다. 국경도시에서 살던 이 학생은 4년 전 이 도시의 역전에서 중국 브로커의 꾀임에 넘어가 다른 북한 청소년과 함께 중국 농촌에 팔려갔다. 여기서 탈출해 다시 다른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태국까지 도보로 산길을 이용해 도주했다가 탈북 4년만에 한국에 올 수 있었다. 하나원에서 3개월간의 적응훈련을 받은 후 보잘것 없는 정착금을 받고 생활하다가 한국친구에 속아 정착금을 사기당한 경우도 있었다. 중국에서 공안에 발각될까 숨어지내고 도망다니는 불안한 생활로 인해, 탈북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심장이 약하며, 자살 충동도 있을 정도로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이지만 현재 상담 치료를 받고 교회생활을 하면서 안정된 편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요즘 현안인 촛불집회와 관련지어, 북한에서 체제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없냐는 내 질문에 대해 학생은 단호하게 그런 경우는 바로 죽는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정치를 '받는다'고 하며, 공개 처형장까지 일명의 예외없이 유치원생도 동원되어 처형을 봐야 한다고 하니 김일성 체제가 얼마나 무섭게 인민의 숨통을 조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식량위기는 94년 김일성 사후에 심각해 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장에는 먹을게 충분하지만 그것을 구매할 돈이 인민에게 없으며, 급여로 지급되던 돈도 끊겨 대부분의 인민은 장사를 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한다. 굶기지는 않던 위대한 지도자가 사라지자 그 주변의 빈대같은 도적떼들이 세습권력의 피를 빨아먹고, 다수 인민의 삶을 궁지로 몰아 넣는 양상이다.

솔직히 이런 모임에 별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어느때 부터 굶주림의 문제는 특수한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보편적 차원의 문제로 보아서, 아프리카 빈민과 북한 주민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못된 체제로 고통받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당장 북한은 우리 면전에 있는 국가고, 탈북한 주민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는 추세에서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수용할지 준비하지 않는다면, 탈북 인민은 또다른 외국노동자로 분류될 소지가 있다. 물론 이런 말을 한다고 외국인 노동자가 탈북민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향후 언제 있을지 모를 통일시대를 생각한다면 외국인 노동자와는 다르게 이들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 당국의 금강산 사건 처리과정이나, 북한당국이 베이징 올림픽 때 북한 경찰과 군대를 풀어 이들이 탈북 북한 주민을 잡아오면 평생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소문을 볼 때 통일의 길은 까마득하다. 그러나 탈북한 북한인들과 남한인의 관계는 인도주의적 관계가 아니라 내국민간의 사회적 관계다.  점점더 수효가 늘어나는 이들의 흡수는 우리에게 북한인에 대한 새로운 관계정립을 요구한다. 통일을 염두한다면 더욱더 피할 수 없는 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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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열대 중

단상 Vorstelltung 2008. 7. 9. 12:5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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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신세계의 도시들은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이것들은 중간적인 단계를 거침이 없이 첫 생성기로부터 바로 노쇠기로 접어드는 것이다...유럽의 어떤 도시들은 천천히, 그리고 평화스럽게 쇠퇴하고 있으나, 신세계의 도시들은 영원한 청춘을 간직할 수 없는 하나의 고질(固疾)과도 같은 계속적인 고열을 지니고 있다"

(레비 스트로스, Tristes Tropiques, 제 11장 상파울로)

빔 벰더스의 '파리텍사스'에서 그려지는 미국의 황량한 들판과 기계적 도시는 바로 구도시 '파리'와 신대륙 '텍사스'의 무미건조한 결합을 보여줍니다. 빔 벰더스는 이런 도시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한 시선을 노출합니다. 이에 비해 서울은 왕조의 전통과 식민지 잔재, 미국문화라는 혼재된 시대의 퇴적층에 이제 재개발의 쇠말뚝이 곳곳에 박히는 기이한 도시의 면모를 보여 줍니다. 명박산성은 점점 높아지고 확대되는데, 산성에 들어가기엔 지불해야할 높은 통행세를 감당못할 대중의 삶은 외곽으로 몰려가는 현장이 MB 시대 서울의 모습입니다. 청춘을 잃어버린 늙은 도시의 몸체에 성형만이 능사인 아름다운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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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풍경(14~15일)

단상 Vorstelltung 2008. 6. 17. 10:2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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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의 흔들림은 이 정권의 흔들림이면서 우리 내면의 흔들림이기도 하다. 촛불에는 소망이 담겨 있지만, 자신의 몸을 녹이면서 타오르는 불꽃은 결국 자신의 소모로 꺼지고 만다. 그러나 타오를 때의 촛불은 얼마나 맹렬한가? 이 촛불 속에서 우리는 지나쳐도 좋을 만큼 상상을 할 수 있다.

촛불을 조명을 받으며 연단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4집까지 낸 시민가수는 조용필의 '그대는 왜 촛불을 드셨나요'를 멋지게 부르고 자신이 집회에서 즉흥으로 지은 노래도 발표한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64세의 우렁한 노인은 방송국을 침탈하려는 고엽제 전우들에게 촛불을 든 시민을 지지해야 할 때라고 외친다. 맹인견의 마직만 훈련단계는 불복종이라며, 촛불집회에 관련해 학생들을 단속하라는 교육청의 지시를 수행하는 교육자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고 양심적인 한 현직 교감은 외친다. 홍제동에서 온 정정한 노인은 MB에 대한 탁핵보다는 소환에 시민들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거리행진을 나갈 때, 선두차에 오른 진행요원이 시청광장에서 나오는 끝없이 나오는 행렬을 보며 '국민은 위대하다'고 말할 때, 내 옆에 있던 50대의 시민은 핀잔을 준다. '이 정도 나온 걸로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노무현 때부터 잘못됐다'고 한다. 수능을 150일 앞둔 일산의 고3 수험생은 단체급식을 받는 자신들 뿐만 아니라 군인 오빠들도 걱정된다고 호소한다. 인천에서 온 시민은 MB가 광우병이 발병하면 수입을 중당한다고 했는데, 변형 프리온의 잠복기가 10~15년인데, 잠복기가 지난 후 발생하는 병을  MB가 어떻게 책임질 수 있냐고 말한다.

불꿏들은 거대하가 피어 오르지만 그 사연들은 동일하지는 않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조원은 자신들이 소고기를 먹을 처지는 안되지만, 언젠가 자신들도 안전한 소고기를 먹을 날을 만들기 위해 이 대열에 동참했다고 한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지젝은 끝, 종말이라는 개념을 기독교에 바탕한 서구의 주요한 이념으로서 유한성의 허구라고 말한다. 하나의 촛불은 꺼질지라도 촛불은 끊임없이 생산될 수 있다. 그러나 생산된 모든 것이 다 소비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동기나 목적이 없다면 소비는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가 활동이라면 목적은 지향점이다. 지향점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은 활동이 아니라 여가다.

촛불의 흔들림은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질서에 대항하는 하나의 시발점이라고 해도 좋다.

촛불의 흔들림은 태고적부터 있었다. 삶을 위협하는 자연의 공포는 이제 사회의 공포와 결합되어 있다. 흔들림은 이런 폭압적 질서에 균열을 내는 활동이며, 어둠을 드러내는 불밝힘이다. 촛불을 든 손이 멈추지 않는 한 불은 훨훨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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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 자위권의 발동

주장 Behauptung 2008. 5. 7. 08:52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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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데이비드에 가기 전, 부시와의 부드러운 첫만남을 위해 서둘러 쇠고기 협상을 종결짓도록 쇼를 하는 저 프랜들리한 대통령. 내수용과 수출용에 큰 차이가 있다며 수정안이 필요하다는  김창준 전 연방하원의 말 속에서도, 협상 자체가 얼마나 졸속으로 치뤄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광우병에 대한 인지 자체도 무뇌아적이지만, 협상 과정 자체도 이런 코메디가 없다. 이명박이 부시에게 프랜들리한건 그의 개인 일이라 뭐라 할 수 없겠지만, 이때문에 국민들이 기만당하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자연인이 아니라 거대한 국가기관인 이명박의 프랜들리한 개인적 성품 덕에 대다수 국민이 광우병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면, 이것은 국가가 국민에게 가하는 중차대한 범죄행위다. 그렇다. 이 촛불집회는 인민의 자위권에서 나온 것이다. 대운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환경을 파괴한다면, 쇠고기협상의 졸속 타결은 국민의 건강을 사지로 몰아 넣는다. 여기에 보험민영화, 상수도와 같은 공공사업의 민영화, 사교육 열풍고조를 망라한 자연파괴와 인간파괴의 선봉에 선 이 정권을 인민이 거부하는 것은 인민의 기본적인 자위권에서 발동한 것이다. 예기치 않게 쇠고기 문제가 정국의 최대이슈로 급부상한 현상황이지만,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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