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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결과들 : 바울과 근대, 메시아적인 것의 변용
5장 이 세계 안에 있는 낯선 자들 : 마르치온과 그 후계자들
132~134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소망과 믿음을 제치고 남는 이유는, 고전적 의미에서 사랑은 결핍이기 때문(플라톤, 심포지움). 타인의 존립근거. 완벽한 상태에서도 존재하는 약함, 결핍을 포함하는 구원의 존재론, 홀로 완벽함이 아닌, 공동의 결핍에 따른 공동성
134~135 바울로부터의 두 갈래 길 : 국교주의와 마르치온주의. 하나르크의 /마르치온/ : 구약의 신은 신약의 신이 아님. 이런 주장을 펼친 마르치온의 신약복음서에 대한 응답이 기독교 정경의 탄생임
136 파문에 대한 바울의 불안, 창조주 하느님의 악마적 특성은 구원과 관련 없음. 왜냐하면 창조주는 악을 창조하기도 하기 때문(이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구약신봉의 유대교를 비난하는 근거임).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
137 생존을 위한 교회의 대응 : 구약과 신약의 조화 간구. 이는 교조주의적인 알레고리적 해석도입으로 이어짐. [신약 항목과 일대일로만 대응, 유비되는 구약의 항목]
138 루터 : 율법(잔혹한 신)과 복음(사랑을 베푸는 신)의 분리
139 마르치온주의 교회의 급진적 사명 : 금혼을 통한 인구소멸(세계종말). 이는 독신자인 바울의 영향을 받음
142 신약에서 창조는 무의미. 창조와 구원을 잇는 실은 아주 미약함
145 하지만 바울에게서 창조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한 몸임

6장 절대를 향해 결단하는 열심당원들 : 칼 슈미트와 칼 바르트
147~148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 개신교(마르틴 라데, 아돌프 폰 하나르크)와 독일 유대인(헤르만 코헨)의 문화 프로테스탄티즘은 붕괴(하느님과 인간세계의 조화를 누리던 빌헬름 황제 시대라는 건설시대 Gründerzeit 의 종말)
149 변증법적 신학(교회적 변증법)의 주요변수 출현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문화 프로테스탄티즘(여당)에 대항한 또 다른 야당은 에른스트 트뢸치, 페르디난드 에브너
150~151 이 시기의 관련 문헌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프란트 로렌츠바이크 /구원의 별/. 그리고 발터 벤야민과 칼 슈미트. 카톨릭의 변종으로서 슈미트는 켈젠의 법실증주의[세속주의] 비판
152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 2판 :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의 붕괴 속에서 태어난 변종
슈미트의 /정치신학/ : 예외상태(비상사태)를 결정하는 주권자 상정. 이는 베버의 애매모호한 카리스마 개념에 대한 비판에서 나옴.
153~155 정상상태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예외의 개념은 키에르케고르의 산물. 이 개념은 당대의 유행 현상으로서 슈미트, 로렌츠바이크, 에브너에게 영향을
미침.
155~156 : /정치신학/ 3장 : 근대 국가론의 중요개념을 신학 개념으로 환원(유비). 법학에서 예외상태는 신학에서의 기적. 근대 법치국가의 이념은 이신론으로 수반,형이상학적 신학인 이신론은 기적 개념의 예외상태를 거부함에 따라 질서에 대한 주권자의 직접 개입을 거부.
156~157 슈미트를 본 대학으로 초빙한 한스 켈젠도 신학과 법 사이의 유비를 형식적 차원과 정신분석적 차원에서만 인식. 이에 반해 슈미트는 법학 개념이 신학에서만 의미와 일관성을 가질 수 있다고 봄
158~159 형이상학적 이행이나 종합, 타협(세속화)을 거부하고 양자택일의 결단을 촉구하는 슈미트
162 정신의 역사에서 신학적 은유들의 정치적 잠재력 관찰(타우베스) gegen 슈미트의 법학적 개념들의 신학적 잠재력
163 반혁명의 묵시가 슈미트 : 국가권력의 [안정성]에 대한 기독교의 관심은 카오스[무정부주의]를,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걱정하는 억제자(카테콘)의 충동

https://youtu.be/7OR7sT4FVCU?si=qk_VKGzDXMPfFsOO

https://youtu.be/d7rDQXO5SN4?si=fy0GARE_JZvhhh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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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 야콥 타우베스, 조효원 역 [바울의 정치신학]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그린비 2013.

로마서에서 바울은 주사위 놀이같은 신의 자의적 선택론(예정설)의 비유로 도공과 도자기의 예를 든다. 도자기는 도공에게 자신을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따질 하등의 권리가 없는 것이, 만든 자의 판단과 선택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자기가 의식을 가진 것이라면, 더군다나 최근 식물에게서도 소통을 관찰할 수 있다는 연구가 나온 마당에 최소한 푸념으로라도 자신의 제작자에게 따져 물을 여지가 없지는 않다. '나를 왜 이렇게, 아니 도대체 나를 왜 만들었냐'고. 이런 물음 자체도 창조자가 거부한다면, 창조에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심각한 결함이라도? 선택받지 않을 자는 도대체 왜 창조를 했던 것일까?

로마서에서 예정설의 전거를 마련한 바울은 혹시 이 역설적 상황을 타개하려고 고민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로마서 7:19-20) 공력으로도 불가능하다면, 창조의 실수를 수정하려는 방안의 하나로 그의 구원관이 마련된 것은 아닐까? 도대체 '내'가 신에게 선택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선택을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는 창조주의 의중을 자신을 위해 전용한 것으로, 임의로 판단한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선택을 받음에도 한정된 유효기간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다 단순한 하나의 논리적 귀결이 필요했을 것이며, 그래야 선택된 민족 편협적인 구원관을 벗어나 보편적인 종교로 나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원초적 죄와 속죄(대속), 그리고 구원으로 이어지는 완결구도다.

타르소 출신의 로마시민이자 유대인 바울의 신학적 전략을 이런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물론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관과는 동떨어져 있다.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벤야민의 신학정치 단편, 니체와 프로이트의 반그리스도적 바울론을 통해 타우베스가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단절된 것으로 판결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불화를 해소할 수 있다는 해석, 메시아적인 것의 도래라는 파국과 창조의 덧없음에 관한 벤야민과 바울의 공감, 죄의식과 원한감정으로 바울을 몰고가는 니체와 프로이트의 부정적 바울 해석에 대한 진중한 평가다.

나는 타우베스의 바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참조해 바울의 신학적 전략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는지 묻는다. 인간의 연약함에 따른 사랑의 절대적 필요성을 드러내는 고린도후서 11장에 근거해 타우베스는 바울의 천재성을 발견한다(133-134쪽). 이것은 비단 구원에 대한 인간적 방법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토록 바울이 율법을 죄와 동일시할 정도로 부정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다시 도자기와 도공의 비유로  돌아가 보면, 사도는 토기장이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는지 묻는다(로마서 9:20-21). 이 물음은 창조자가 의도적이자 일방적으로 피조물의 '용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확언이다. 그렇다면 창조에 실수란 것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 결정과 행위에 실수를 물을 수 없더라도, 책임은 없는 것인가? 이것이 감히 인간이 신에게 요구할 수 없는 것이라해도 요청, 설득할 여지는 없는 것인가? 불완전하고 죄의 상태에 있는 신체를 타고 난 인간이 저마다의 연약함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마치 파국을 몰고 올 메시아의 재림이 계속 연기되듯이, 신에게 어떠한 조치도 기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람들 간의 사랑의 연대만이 개별인간의 약함을 이겨낼 수 있는 최후의 실천적 방안이다. 창조의 불완전함이 새로운 약속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인 바, 그 교리적 매개는 신체를 타고 났지만 부활한(죽음을 이겨낸), 그래서 신이 된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충만으로 열방은 구원의 문턱에 다다를 수 있다.

저마다 사랑의 빚 외에 타인에게 질 빚이 없다면 법은 완성되는 것(로마서 13:8-9)일 뿐만 아니라 필요없는 것으로 전락한다(아감벤에 의하면 법의 작용정지katargeín). 있지만 있지 않은 것과 다름 없는 법의 역설적 상태로 말이다. 법의 이러한 '마비상태'는 법의 문을 끈질긴 인내로 닫으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카프카의 시골사람에게도 볼 수 있다. 시간과 함께 죽어가는 현존질서의 현실적 근거인 법, 법의 작동은 그래서 또한 죽음의 법이다(고린도전서 15:56). 하지만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어디까지가 이 세계의 끝, 나아가 시간의 끝이 어디인지 기약할 수 없는 한 법의 문은 닫혀 있더라도 언제든 열려질 수 있는 상태다. 시간의 끝 혹은 세계의 끝에 대한 사고는 칸트가 선험적 변증론에서  이성이 경험을 넘어선 것을 사고할 때 빠지게 되는 이율배반처럼 그 사고 자체가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소멸하면서도 썩어가는 것을 사랑하려고 했다는 타우베스에 대한 역자의 해석(304쪽)과는 다른 관점에서, 자기 삶의 종점에 다다른 이 유대철학자는 혹시 자신의 유한성을 시공의 유한성으로 해석하고 싶은 형이상학적 욕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무한생성론을 주장하는 니체에게 인류의 역사란 허공을 가르는 모기의 비행처럼 가느다랗고 미약한 순간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에게도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는 덧없는 것일 뿐일까? 아니면, 바울에서 마르치온과 벤야민, 그리고 타우베스로 이어지는 메시아주의는 경험 밖의 문제설정으로 경험세계에 영향을 미치려는 가상적 실천의 전략일까? 이런 전략은 아도르노의 미학적 방법과 얼마나  다를까? 탈가치화로 종교가 쇠퇴하는 시점이라해도  메시아주의는 그래도 교회와 신도라는 기반이 있다. 비록 지지의 양상은 다를 지라도. 이런 점에서 그들의 신학은 순수한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정치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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