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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는 『실천이성비판』 서문에서, 도덕법칙의 연역이 불필요한 외적 조건은, 이성의 실천적 사용이 이성의 이론적 사용과는 달리 당장의 행위를 위해 요구되는 조건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A7)(주1)
. 여기서 이론이성과 구분되는 실천이성의 극명한 차이는 행위에서 드러나는 데, 이것은 이론이성에서는 문제이었던 것이 실천이성에서는 확정된다는 것이다(A7). 즉, 칸트는 가상적인 그의 논적들에게 이론이성으로 신의 존재, 자유, 영혼의 불멸성을 증명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식의 반어적 어법으로 자문하는데, 이러한 이념들은 도덕적 사용에서 정초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확정적 응답이다(A7).

칸트에게서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이 각각 대상으로 삼는 자연세계와 도덕세계는 구분되면서도 양립가능하다고 할 때, 이 ‘양립’의 구체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판단력비판』에서 동일한 상태를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볼 수 있는 초월적 의미의 취미판단 논의와도 상관있지만 다른 맥락에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유에 의한 근본원인의 규정은 오직 도덕세계에서만 가능하지만, 이 도덕의 세계 내에서와 자연의 세계 내에서 공통적으로 추론의 인과계열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양립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최고 존재를 가정하는 권리는 만물의 체계적 연관을 위해 인과성에서 유추한다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밝혔듯이(B728), 범주는 두 세계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논리적 도구상자다. 이러한 추론의 인과성은 칸트의 도덕철학에서도 볼 수 있으며, 그 형식화의 절정은 『도덕형이상학』에서 이루어진다.  

『실천이성비판』의 분석학 1장의 1절 “순수실천 이성원칙들의 연역” 절에서 칸트는 순수이성이 경험으로부터 독립해 의지를 규정하는 실천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것도[경험으로부터 독립한 순수이성의 의지 규정], 우리에게 있어서 순수 이성이 실천적임을 입증하는 사실에 의거해서, 즉 의지를 행위로 규정하는 윤리성의 원칙 안에 있는 자율에 의거해서 말이다.-또 분석학이 동시에 제시하는 바는, 이 사실은 의지의 자유와 불가분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아니 의지의 자유와 한가지이며, 그럼으로써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는, 감성세계에 속하는 것으로서는, 다른 작용하는 원인들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인과법칙에 종속함을 인식하되, 그럼에도 실천적인 일에 있어서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곧 존재자 그 자체로서는, 사물들의 예지적 질서에서 규정되는 그의 현존재를 의식하고, 그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특수한 직관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인과성을 감성세계에서 규정할 수 있는 역학적 법칙들에 의거해 그러하다는 것이다.”(A72,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주2)  

여기서 순수 예지계의 근본법칙인 순수한 실천이성의 자율은 비록 경험적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만(그렇지 않다면 타율이 되므로), ‘감성세계의 법칙을 깨뜨림 없이, 실존해야 할 도덕법칙’으로 칸트는 규정한다(A74-75). 이 절에서 나아가 칸트는, 실천이성 최상의 원칙의 연역에 관해, 그 객관적 실재성과 관련해서는 그 확실성을 포기하지만, 능력의 연역 원리로 쓰인다고 말하면서, 도덕법칙이 사실상 ‘자유에 의한 인과법칙’임을 천명하며, 이 법칙에 의해 초감성적 자연이 가능함을 말한다(A82-83)(주3). 

같은 장의 제 2절 ‘실천적 사용에서 순수이성의 권한’에서 칸트는 감성세계 너머에 인과성의 법칙을 세우는 일이 어떻게 도덕의 원리에서 가능한지 묻는다(A95). 이 물음은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과 관련해서만 연역할 수 있었던 인과성과 같은 개념의 실재성이 도덕적 사용의 대상인 예지체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칸트는 그러한 사용이 전혀 무리가 아니라고 말한다(A95). 왜냐하면 인과성의 개념은 대상과 대상을 규정하는 실체성의 범주가 아니라 대상과 대상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관계성의 범주이므로 이미 감관의 대상에 적용되기 이전에(논리적 선행), 오성에 그 자리가 마련된 것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A95). 달리 말해 인과성의 개념은 경험적 대상에 적용되는 것이나, 경험적 대상이 없더라도 가능한 오성의 순수한 선험적 능력이다. 그런데 왜 능력인가? 

이론적 인식에서 오성은 대상과 관련을 맺고 있는 한편, 순전한 실천적 사용과 관련해서 오성은 또한 욕구능력과도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욕구능력을 칸트는 의지라고 지칭하며, 이 의지의 개념에는 자연법칙에 의해서는 규정될 수 없는 원인성의 개념이, 자유의 개념과 함께 함유되어 있다고 말한다(A97). 이 원인성은 그 객관적 실재성을 경험적 직관에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사용에서 정당화된다. 즉 원인이라는 개념은 『순수이성비판』상 범주의 선험적 연역에서 대상 일반과 관련하여 제시되기도 하지만, 이 개념은 원래 순수 오성에서 생겨난 것으로 ‘근원상 일체의 감성적 조건들로부터 독립적’이므로 ‘순수예지 존재자로서의 사물들에’(auf Dinge als reine Verstandeswesen) 적용된다(A97). 칸트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자의 개념을 ‘예지원인’(causa noumenon)이라고 하는데(A97), 이 개념은 이 개념의 실재성을 규정하는 도덕법칙과 관련해서만, 즉 실천적으로만 사용할 권한을 갖고 있다고 칸트는 말한다(A98). 여기서 객관적 실재성이란 비록 이 개념에 맞는 직관은 없더라도 우리 마음의 준칙에서 드러나는 바처럼, 현실적 적용을 할 수 있음을 말하며, 바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이 개념이 예지체(Noumenen)(주4)와 관련해서 충분한 권리(Berechtigung)를 보유하는 점이 도출된다(A99). 즉 순수 오성의 개념(인과성 외에 다른 오성의 범주들도 포함해서)이 실천적인 것과 관련해 그 객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권한(Befugnis)으로 정당화된다. 칸트가 이 절의 마지막에 드는 바처럼, 신의 존재를 유추(Analogie)에 의해 이끌어내어 가정하는 권한은 오직 도덕적 사용과 관련해서 의미가 있지, 그 이상으로 신의 존재를 인식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성의 월권이다.


각주

1)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텍스트는 백종현의 번역본(아카넷, 2002)에 의존했으며, 부분적으로 Weischedel판 Kant Werke Band 6 을 참고했다.

2)칸트, 백종현 역『실천이성비판』(아카넷, 2002), p.108-109.

3)자유에 의한 도덕 법칙의 인과성은 칸트의 법철학에서 더욱 분명히 제시된다. 도덕법칙의 직접적 적용을 받지 않더라도 법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서의 외적 사실 행위의 관계에서, 의지와 사실행위 간에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행위자의 내적 마음의 동기와 상관없이 법개념의 외적 사실 행위의 관계는 무력해 진다. 칸트는 한 발 더 나아가, 법의 대상인 권리관계의 규명에 있어 수학적 엄밀성까지 지향하는데, 이는 불분명한 권리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피하기 위함이다(이충진, 『이성과 권리』2.법칙과 권리(철학과 현실사, 2000), p.60-61, 72참조).

4)Noumenen은 기존에는 가상체로 옮겨 왔다고 하나, ‘예지[오성]적으로 생각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백종현은 Noumenen을 예지체로 옮겼다.(칸트, 백종현 역, 『실천이성비판』, p.42 각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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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유추에서 인과법칙

칸트 Kant 2009. 12. 9. 15:24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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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분석론>은 우리의 모든 선천적 인식이란 순수한 오성자신의 능력, 곧 개념을 이용한 인식으로 이루어짐을 증명하려는 논의이며, 여기서 제시되는 오성의 4가지 원칙은 모든 자연법칙이 예외없이 종속하는 것이다(B198). 이때 원칙이란 종합적 판단의 최상원칙을 말하는데, 이들 원칙은 12범주를 4가지 판단형식으로 묶은 것으로 분량, 성질, 관계, 양상을 지시한다. 이중 분량과 성질에 관한 논의는 각각 ‘직관의 공리’와 ‘지각의 예료’에서 다뤄지며, 관계에 관한 논의는 ‘경험의 유추’에서, 양상에 관한 논의는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에서 다뤄진다. 여기서 유추란 힘의 표출로부터 비롯되는 역학적 관계를 다루는 것을 의미하며(주1)
, 이중 제 2의 유추에서 다뤄지는 인과율에 관한 논의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면서도(주2), 많은 주석가들로부터 다양한 해석을 촉발시키는 논란의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는 제 2 유추의 다양한 해석에 관한 부분은 생략하고(주3), 원전에 기반해 제 2유추에서 논의되는 인과율의 의미에 관해 다루는 것으로 제한한다.

제 2 유추에서 칸트가 제시한 인과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초판의 ‘산출의 원칙’ : "발생하는(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은, 그것이 규칙에 따라 후속하는 것을 전제한다."(A189)

재판의 ‘인과의 법칙에 따른 시간적 후속의 법칙' : "모든 변화는 원인과 결과의 결합법칙에 따라 발생한다."(B232)

 미묘한 의미의 차이가 있는 초판과 재판의 원칙을 간단히 결합시킨다면, 발생하는 모든 것은 시간적 후속에 의한 인과의 법칙에 따른다고 제시할 수 있다. 여기서 시간적 후속이란 시간의 경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시간에 존재할 수 있는 사건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의 경과가 아니라 시간의 순서, 곧 역학적 선후로 이해해야 한다(B248-249). 왜냐하면, 칸트가 예를 드는 바처럼, 실내의 온기가 따뜻해지는 것이 난로 때문이라고 해도, 원인으로 간주되는 난로의 등장과 결과로서 간주되는 실내의 온기상승이 동시에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는 원인을 일으킨 실체로서의 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의 선후관계, 즉 그 필연적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순서의 규정, 곧 필연적 관계의 규정은 지각의 대상인 사건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지각하는 주관에 있는 것인가? 칸트에 따르면 시간의 순서가 사건에 있냐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건 자체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감을 거쳐 수용된 현상으로서의 사건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관에 있는 것인가? 엄밀히 말하면 이러한 시간의 후속에 대한 결정은 현상들의 개별 위치를 연속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오성의 선천적 조건에 기인한다(B210). 이러한 선천적 조건에 의해 비로서 타당한 경험적 판단이 가능하며, 여기서 타당성이라는 진리검증은 바로 인과관계의 규명에서 완료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성의 중차대한 능력은 바로 대상 일반의 표상을 가능케 하는 것이고, 이러한 표상은 바로 시간순서의 부여에 의한 인과관계의 규정으로 가능한 것이다.

 “모든 경험을 위해 또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 오성은 필요한 것이다. 오성이 기여하는 첫째의 일은 그것이 대상의 표상을 판명하게 한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대상 일반이라는 표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여를 하는 것은, 오성이 현상에 또 그것의 현존에다 시간 순서를 줌에 의해서다. 왜냐하면 오성은 선행현상에 관계해서, 결과로서의 각 현상에 선천적으로 규정된 시간상의 위치를 승인하기 때문이다. 위치 없이는 현상은, 그것의 모든 부분들의 위치를 선천적으로 규정하는 시간 자신과 합치하지 않을 것이다.”(B244-245)(주4)

인과법칙을 주관적 심리의 연상물로 축소시킨 흄의 회의론에 대해 칸트의 인과론은 타당한 반격인가? 인과를 규정하는 오성의 능력도 주관에 있음으로 해서, 역시 주관적 심리로 격하될 위험은 없는가? 그러나 칸트의 주관은 직관의 선천적 형식인 내감, 아직은 순수하지 않은 종합 일반인 구상력, 선험적 통각이라는 삼중의 과정을 거쳐 선험적 종합판단을 수행하는(B197) 논리적 기관이지 심리적 구성물이 아니다. 즉 인과율은 오성이 대상에 부여하는 선험적 능력이다.(주5)


각주
1)유추의 의미에 관해서는 박정하, “칸트의 인과 이론에 대한 연구 : 『순수이성비판』의 ‘제2유추의 원칙’을 중심으로”(서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p.27-28참조. 참고로 이 논문은 제 2 유추의 해석과 관련해 칸트의 인과론이 개별인과법칙을 문제삼지 않고 보편인과법칙만을 문제삼고 있다는 관점에서 칸트의 인과이론을 세밀히 다루고 있다.

2)칸트에게서 합리론의 독단이라는 선잠을 깨워『순수이성비판』의 작업에 매진케 한 근본적 동인은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인과론을 부정한 흄의 『인간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1739)이었다. 이러한 인과론의 부정은 비단 합리론의 위기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과학의 존립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방어가 필요했으며, 이런 점에서 인과론을 제시하는 제 2 유추론의 위상이 드러난다.

3)제 2 유추론의 해석에 관한 선행연구는 박채옥,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의 인과성과 자유”(전북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3장에서 다뤄진다. 이 논문에 따르면 제 2 유추의 해석에 관한 논쟁은 벡크, 유잉, 클레베, 브로드, 타카르트, 버드, 스트로슨에서부터, 셀라스, 퍼트남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4)칸트, 최재희 역 『순수이성비판』(박영사, 1997), p203-204.

5)능력이라는 말은 오성의 타당한 작용과 아울러 오성의 정당한 권리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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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이율배반에서 인과성과 자유

칸트 Kant 2009. 11. 24. 17:5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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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전개한 이성의 체계적 비판작업은 도덕철학으로 귀결된다. 비록 이론이성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는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선험적 자유로 시발하는 도덕론의 윤곽이 드러나지만, 그의 도덕철학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는 것은 『도덕형이상학정초』(1785)와 『실천이성비판』(1788)에서 부터이며, 그의 최종 저술인 『법이론의 형이상학적 단초들』(1797, 이것은『도덕형이상학』에 포함된다)에서 그의 도덕철학은 법철학으로 종지부를 찍는다(주1). 이미 57이라는 늦은 나이에 제 1 비판서를 내놓은 칸트가 고령이 될 때까지 도덕의 문제에 고심했다는 것은 그의 제 1 비판서가 도덕철학을 위한 예비작업의 성격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순수이성비판』은 단지 이런 식으로만 한정할 수 없을 정도의 인식론적 중요성과 아울러, 학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담보하기 위한 문제의식도 지닌 저서다. 이 저서에 한정시켜 칸트의 도덕론에 관한 유력한 주제를 든다면, 이율배반의 대립쌍처럼 ‘자연과 자유의 문제’로 풀어갈 수 있다. 여기서 자연은 인간 주관의 두 형식인 감성과 오성의 작용에 의해 이해된 자연이며, 자유는 인간 주관의 경험을 벗어나 있는 개념으로서 이성에 의해 다뤄지는 자유이다. 그렇다면 왜 자연과 자유의 문제가 아니라 인과율과 자유의 문제가 논제가 되는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험적 분석론의 제 2 유추에서 드러나는 인과율 뿐만 아니라 실체성과 상호성 등 다른 범주들도 필요하지 않는가?  

칸트가 수학과 자연과학의 명제에 관한 판단에 새롭게 도입한 선험적 종합판단(주2)이란 개념은 형이상학(주3)의 명제에서도 사용된다. 따라서 제 1 비판서에서 다루는 선험적 종합판단에 관한 논구는 곧 수학과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도덕 일반에 관한 논구로 확장된 것이다. 비록 칸트의 철학에서 현상계인 자연의 세계와 가상계인 도덕의 세계는 엄격히 구분되는 관계이지만 두 세계의 이해에는 선험적 종합판단의 형식이 사용되는 공통점이 있다. 즉 동일률적인 분석판단의 방식으로 이해되지 않고 발생론적인 선험적 종합판단의 방식으로 이해된 자연에서, ‘선험적’(transzendental)이란 논리적으로 경험에 앞서 경험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말한다. 이 조건은 주어진 질료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으로 질서지우는 감성의 작용, 감성에서 직관에 의해 주어진 질료를 12 범주의 형식으로 질서지우는 오성의 작용을 말한다. 여기서 오성은, 감성의 직관으로부터 주어진 현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범주를 사용해 판단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성에 사용되는 범주는 단지 자연의 대상을 인식하는 데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철학에도 그대로 사용된다. 이들 범주 중 인과율은 흄의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대적하기위해 중시되는 범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혀 상이한 자연과 자유를 매개하는 고리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특히 주목된다. 여기서는 제 3 이율배반을 통해 드러나는 인과율과 자유의 문제를 보자.  

제 1 비판서의 선험적 변증론에서 칸트는 우주론과 관련된 선험적 이념(주4)의 4가지 이율배반을 다룬다. 선험적 변증론은 이성이 경험에 제한된 인식을 벗어난 문제를 다룰 때 빠지게 되는 모순을 보여주는 논의인데, 이런 모순은 4가지 이율배반의 형태로 제시된다. 제 1의 이율배반은 공간적 시초의 있음 또는 없음에 관해, 제 2의 이율배반은 세계 내에서 합성물을 구성하는 단순체의 있음 또는 없음에 관해, 제 4의 이율배반은 세계 내의 모든 것에 있어 궁극적 원인으로서의 최고 존재(신)의 있음 또는 없음에 관해 다룬다. 그리고 제 3의 이율배반은 세계에서 자유의 있음 또는 없음에 관해 다루는데, 여기서 자유의 대립항으로 자연이 설정되며, 이 문제를 다루면서 칸트가 제시하는 범주는 인과성(Kausalität)이다. 우주론의 선험적 원칙의 문제, 즉 주어진 피제약자에서 제약의 총체, 곧 무제약자에 이르는 계열을 다룸에 있어 인과성은 이성이 답할 수 있는 유력한 범주로 규정된다(B441). 그렇다며 제 3 이율배반에서 인과성은 어떻게 다뤄지는 알아보기 위해 제 3 이율배반의 정립과 반정립의 명제와 이에 대한 해석을 살펴 보자.  

정립
자연의 법칙에 따른 인과성은, 세계 전체의 현상을 도출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현상의 설명을 위해서는 자유에 의한 인과성이 요구된다.

반정립
자유란 것은 없으며, 세계내의 모든 것은 자연법칙에 따라서만 발생한다.

정립의 명제는 인과율만으로 자연법칙을 성립시킬 수 없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배진적으로 전제된 계열을 추적해 가는 추리가 무한히 진행된다면 원인상의 계열은 완료될 수 없기 때문이다(B472). 이에 반해 반정립의 명제는 이러한 자연법칙의 개시로서의 자유를 자연법칙으로부터의 해방으로(B475), 인과법칙에 대한 위반으로 규정한다(B474). 앞서 밝혔듯이, 칸트는 초험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이성이 빠질 수 밖에 없는 오류를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이라는 형태로 보여주려는 것인데, 이런 모순점이 그의 자유에 근거한 도덕철학을 정립하기 위한 초석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칸트는 이율배반을 통해, 본성상 경험 세계 밖으로 문제를 확장하려는 이성을 한계지우려는 계획을 회의적 방식으로 진행한 것이지만,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 인해 초험적 이성의 본성에 활로를 열어 주는 여지도 남긴 셈이다. 왜냐하면 이미 반정립의 해석에서 칸트가 자유를 자연법칙으로부터의 해방(Befreiung)이라고 말한 점은 도덕의 문제가 자연법칙에 구속될 수 없다는 점을 예고하기 때문이다. 분명 우주론적 문제와 관련해 자연법칙의 인과계열의 시초에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결코 결정될 수 없는 문제이며, 어느 쪽으로 결정된다면 그것은 독단에 불과하다. 우주론에서 대두되는 자유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순수이성의 선험적 이념인 영혼의 불멸성, 신의 존재 문제도 순수이성이 피할 수 없으나 증명불가능한 문제다. 그러나 도덕의 세계에서 영혼의 불멸성과 신의 존재와 같은 선험적 이념은 도덕적 행위의 촉진을 위해 요청되며, 자유라는 이념도 요청되기는 하지만 도덕을 위한 근거로도 주장된다.  

각주
1) 『순수이성비판』의 재판(1787년) 머리말에서 칸트가 실천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면서도(B XXII) 자유의 무모순성(증명불가능하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자연적 기계성과 양립 가능하다고(B XXIX) 서술한 점에서 칸트는 도덕론에 적극 가담하고 있음을 보인다. 또한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을 발표하기 30년 전인 1767년에 법철학 강의를 하였으므로 전비판기에 이미 도덕과 법철학에 대한 고민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2)선험적 종합판단이란 종래의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을 아우르는 칸트의 독창적 개념이다. 수학적 명제의 경우(대표적으로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두 직각의 합이다’) 종래에는 주어에 이미 객어의 의미가 함축된 분석명제로 인식되었지만, 칸트는 수학에서도 선험적 종합판단이 작용하고 있다고 봤다. 예를 들어 18세기 중반에 이미 알려진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두 직각보다 작다”는 공리로도 모순없는 정리의 체계를 세울 수 있었다. 또한 ‘두 점 사이의 직선은 두 점 사이에서 가장 짧은 거리다’라는 명제의 경우 주어부에 해당하는 ‘두 점 사이의 직선’에서 술어부의 ‘두 점 사이의 가장 짧은 거리’라는 의미를 포함하지 않으며, 이 경우 직관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서 술어부의 의미를 끌어낼 수 있다. 따라서 경험과 상관없이 보편타당하며(선험적), 술어부의 의미가 주어부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으므로 (종합적) 선험적 종합판단의 명제가 된다. 이에 비해 형이상학적 명제(예를 들어 ‘인간의 본질은 자유다’)는 마찬가지로 선험적 종합판단의 명제이나 직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상 선험적 종합(synthetic a priori)에 관해서는 S.E.Stumpf, Philosophy : History and Problem(McGraw-Hill, 1989), p.304-306,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해서는 가라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p.104 참조.

3)칸트에게서 형이상학의 의미는 경험가능한 대상의 세계 너머에 있는 것(영혼의 불멸, 자유, 신적 존재 등)에 관한 학을 의미하므로(A VII 참조), 아리스토텔레스가 원래 자연학 너머에 있는 학으로 규정했던 metaphysic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4)오성의 개념에서 발생하는 선험적 이념(transzendentale Ideen)이란 경험할 수 없는 것으로서(B377), 오성의 개념에서 오성의 순수한 개념이 범주이듯이 이성의 순수한 개념이다(B368). 그러나 선험적 이념은 범주와 달리 객관적 연역이 불가능하며, 이념에 합치되는 객관에 관한 관계를 가질 수도 없으며 다만 이성의 본성에서 도출된다(B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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