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블로그를 접으면서, 여기로 옮기지 못한 글이 많다. 모두 옮길 생각은 없고, 차근 차근 생각나는데로 옮긴다.
휴머니즘의 다른 얼굴 :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사하는 커다란 폭력?
2006년 1월 14일~1월 28일
페터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인간 농장을 위한 규칙Regeln für den
Menschenpark (대중의 경멸 Verachtung der Massen, 복음의 개선에 관하여 Über die Verbesserung der guten Nachricht), 이진우·박미애 옮김(2004, 한길사)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너 위대한 천체여! 네가 비추어줄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너의 행복이겠느냐!”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부 ‘짜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중에서
휴머니즘과 이념형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인본주의를 복원하기 위해 15~16세기 발흥한 문예사조라는 좁은 의미에서 벗어나서 휴머니즘을 볼 때, 근대 역사는 물론 현대의 일상적 어휘 속에 산재한 휴머니즘을 베버식의 이념형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왜냐하면 이념형(Ideal Type)은 결과로서 주어진 특정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적 개념인데, 이 개념에 휴머니즘을 적용하기에는 이 주의가 지시하는 바가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청교도 정신이 경제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기술한 경험주의적 문화과학의 첫 결실인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전제된 이념형이 금욕주의였던 것처럼, 하나의 이념형은 단지 경제 질서라는 하부구조 위에 놓인 정신적 구조물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배태된 구체적 사회를 이해해 들어가기 위한 방법론적 실마리, 방법론적 도구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휴머니즘은 어떠한가? 기독교를 필두로 한 금욕주의는 물론이고 사회주의, 민주주의, 동학, 유교,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양의 탈로 장식된 자본주의마저도 인본주의적 성격, 인간주의적 면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모든 주의들이 최소한 휴머니즘의 변종(變種)이라도 될 소지가 있다.
물론 서구의 역사 속에서 인간주의라는 표어가 두드러지게 부각된 시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시민 보다 높아지려는 사람들의 목을 치는 단두대 처형이 만연하기 전, 천부인권을 근거로 자유·평등·박애를 외친 프랑스 대혁명의 경우와 같이− 특정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으로서의 인간주의는 너무도 포괄적이어서, 소박하게 좋은 뜻으로 사용해 쉽게 주어에 연결할 수 있는 보편화된 술어에 가깝다. 마치 골고루(전 역사를 통틀어) 퍼져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제 1부인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 하이데거의 휴머니즘 서한에 대한 답신’은 원래 슬로터다이크가 1997년 여름 바젤-엘마에서 연속적으로 행한 강연문인데, 이 강연의 후폭풍이 2년 후 독일의 공론영역을 뒤흔들 정도로 논란을 일으킨 글이다. 의사소통행위이론을 통해 전후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지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하버마스까지 이 논쟁에 가세해 대결할 정도로 ‘악명’을 높이고 현재 독일 학계에서 각광받는 '철학자'로 자리잡은 슬로터다이크는 이 휴머니즘이란 오랜 표어를 놓고 전면전을 펼친다. 그에게 이렇게도 낡고 공허한 인간주의가 왜 문제가 되는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싸울 만한 주제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런 공격은 피아가 불분명한 전선의 연막 속에서 무작위적으로 행하는 발포가 아닐까?
사람은 여전히 그 어떤 원숭이 보다도 더 철저한 원숭이-니체
이 책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리고 인간혐오주의로 보이는 듯한 니체의 저 표현(소제목)처럼 슬로터다이크는 인류의 역사를 인간 길들이기의 사회사로 볼 것을 제시한다. 그의 이런 제시는 니체의 모호한 서사시에 나온 한 구절을 니체 철학의 전체흐름에서 해석한 것일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슬로터다이크 자신의 문제 의식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서구의 역사에서 인간을 가축보다 더 정교하게 훈육시키는 가장 탁월한 수단은 바로 철학의 고전적 텍스트를 ‘읽는 행위’들이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인간은 길들여지는, 단순히 강제적일 뿐만 아니라 열렬히, 자발적으로 길들여지는 존재가 되었는가? 휴머니즘의 핵심, 즉 옹호되어야 할 인간성 자체에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인가?
슬로터다이크는 인간성을 괄호친 채, 그것이 요구되어지는 요인을 찾기 위해 고대 로마의 원형 투기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러한 요인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세차게 내려치는 상대의 창검을 방패로 막으며 숨을 벌떡인 채 반격을 노리는 격투로 매순간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하는 두 노예에게 열광하는 군중의 함성 속에서 비인간화의 진행을 목도하는 반성이 일어난다. 즉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선결규정으로 인간성의 요건이 충분해지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 상황으로 인간을 몰아넣는 사태 속에서 반사적으로 인간화의 요구가 나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성은 비인간성의 전도된 거울인 셈이다. 야만으로 들끊는 사람들의 몸부림과 절규를 물리치고 그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그들의 야만성에 저항하는 적절한 방법이 바로 읽기 행위라는 것이다. 읽는 행위를 통해 생성된 자기 의식은 투기장의 열기를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이른바 교양의 탄생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철학을 이러한 휴머니즘을 목표로 문자적 계몽을 해온 유서깊은 미디어의 하나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그의 제안은 서양 철학 전반을 실패한 이성의 기획으로 간주한 니체의 주장과 일치한다. 이들에 따르면 문자적 계몽은 기껏해야 왜소한 덕의 계발에 다름 아니었다. 이것은 차안의 인간으로부터 인간 밖의 피안으로 나가려는 초월적 관렴론이나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의 최하부단위로 인간을 규정해 놓는 원시적 유물론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 인간이 인간으로부터의 연속성 상에서 내재적으로 자신을 극복해 전혀 다른 개체로 될 가능성, 이른바 니체의 위버맨쉬Übermensch(초인이란 번역은 부적절해서 그대로 음역한다)에 근접할 창조성은 왜소한 덕의 장막을 뛰어 넘는 것이기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탄식한 것이다.
“모든 것이 작아지고 말았구나! 곳곳에 한층 더 낮아진 문들뿐이구나. 나와같은 사람도 아직은 그 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겠다. 그러나 그러려면 허리를 굽혀야 하리라. 오, 나 언제쯤, 더 이상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는, 저 왜소한 인간 앞에서 더 이상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는 내 고향으로 돌아가는가! ”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3부 ‘왜소하게 만드는 덕에 관하여’ 중)
왜소한 덕의 계발과 연루된 서양 철학의 흐름에서 슬로터다이크가 이 책에서 크게 비중을 두는 철학의 거장들은 플라톤,홉스,스피노자,헤겔·맑스,니체,하이데거이다. 이 책의 제 2부 ‘대중의 경멸 : 현대 사회의 문화투쟁에 관한 시론’에서 슬러터다이크는 홉스를 필두로 이 근대 철학의 대가들을 다소 거칠게 훑고 지나가는데, 여기서 그가 주도적으로 바탕에 깔고 있는 관점은 대중의 퇴행성을 주장한 엘리아스 카네티의 대중개인주의다. 대중을 ‘새까말 정도로 빽빽한 사람들’의 운집이라며 ‘경멸’하는 카네티에게 대중은 미디어의 부산물일 뿐이며, 오직 미디어를 통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피동적 객체에 불과하다. 언뜻 보면 개개인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이질적 구성으로 보이는 고독한 군중은 미디어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어서, 마지막까지도 그 개개인에게서 주도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개인적인 특성이 아니라, 미디어가 만들어 놓은 ‘공동의 특성’이다(p97-98). 이렇듯 카네티의 대중관을 통해 볼 때 스피노자와 니체를 제외한 저 거장들의 정치철학은 대중에게 아부하는 이론으로 격하되며, 그 중에서 하이데거는 다소 독특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근대 철학의 대가들을 다루기 전에, 저자는 제 1부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에서 인간 사육정치의 고전적 모델이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발원하며 그 극점은 하이데거의 저작에서 우뚝 서 있음을 보여주는 논의를 펼친다. 이것을 먼저 검토한 후에 근대 철학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살펴 본다.
인간 사육 정치의 극점과 발원지, 그리고 그 사이의 간주곡
2차 대전이 끝나고 한 발신자(장 보프레)가 전란의 참혹함이 묻어나는 필체로 휴머니즘의 복원이 가능한지 묻는 서한에 하이데거는 퉁명스럽게 응답한다. 그에 따르면 애시 당초 휴머니즘이란 사유의 운동으로 만든 개념이 아니라 단지 성급하게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 본질에 관한 물음을 회피하는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와같이 하이데거가 휴머니즘 따위로 인간 존재에 관해 물음을 던지는 방식 자체를 거부하고 그의 고유한 존재론으로 인간과 동물, 인간 자체와 이성적 동물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를 부과해 그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두는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오히려 휴머니즘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극단화시킨다고 슬로터다이크는 해석한다. 그 기능이란 말을 통한 친교 행위인데, 교육을 통해서 가능했던 이 기능이 하이데거에 이르러 하나의 존재론적 각성이란 의식(儀式)으로 되살아 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침묵이 말을 대신해서 존재의 부름을 기다린다.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말을 걸도록 우리가 정좌한 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길들이기의 진일보한 형태이다. 다만 이런 길들이기는 어떠한 종파도 구성하지 않고 내면에만 침잠하므로 인도주의로 치장한 채 인간중심적 폭력으로 치닫을 수 있는 휴머니즘의 변종(저자는 이런 변종으로 볼세비즘,파시즘,아메리카니즘을 든다)과는 대립되는 ‘존재론적 순종’행위다.
존재에 순응하는 인간이 있는 장소로 하이데거가 비유하는 개념은 빈터(Lichtung)이다. 존재의 목자와 이웃이라는 상징으로 그려진 인간이 빈터에서 존재의 집을 짓는 것은 단지 언어의 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슬로터다이크는 이 정주의 방식, 인간을 포함해 가축을 집에 묶는 것을 훈육과 사육의 문제로 본다(p.63). 환경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동물로 존재하는데 실패한 인간은 집에 안착함으로써 창밖의 세상을 관조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게 된다. 명상이 동반되는 산책 역시 정주의 방식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론의 본질은 창 밖을 내다보는 명랑한 시선......산보도...등 뒤에 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전형적 운동”(p.65). 건실한 가정의 미래를 위해 방치된 대지로 보이는 빈터에서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 거기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결정과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니체가 폭로한 이 위험은 인간을 다루기 쉬운 가축의 성향으로 사육· 선택하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는 단지 읽기를 통해 교육시키는 권력이 문제가 아니라 선택을 내리는 배후 권력의 움직임이 큰 문제가 된다(p.70). 바로 휴머니즘이란 표어를 걸고 문자 계몽에 자발적으로 나서는 인간들의 선택자적 역할이 다른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슬로터다이크의 진단이다. 즉 미디어로 표명되기도 하는, 인간을 길들이는 추진력과 야수화 경향 사이의 투쟁, 대사육자들과 소사육자들간의 거인투쟁에서 거둔 문명화의 승전이 장기적으로 인류의 유전적 형질 변환으로까지 치닫을 수 있다는 것이다(p.73).
그런데 놀랍게도 이러한 인간 사육의 고전적 모델이 플라톤의 대화편인 ‘정치가’(Politicus)와 ‘국가’(Politeia)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드물어서 귀한 사색 전문가인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사육자적 능력은, 좋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자발적이고 조종 가능한 인간 특성을 세밀하게 조율해 효과적으로 배합하는 기술이다(p.78). 이로서 플라톤이 말한 좋은 국가가 성립된다. 포퍼도 열린 사회의 적을 산출한 ‘전범’으로 플라톤을 끄집어 냈지만, 슬로터다이크는 집단적인 선택과 배제로 자신을 보호하는 집단의 자발성을 포퍼가 간과했다고 본다. 근대의 현실적 광장과 현대의 전자적 네트 속에서 자신의 동원능력을 경험하는 카네티 식의 대중을 포퍼가 몰랐다는 것이다.
근대 세계를 인정투쟁, 곧 타자에 대한 자기 승인을 위한 보편화된 투쟁의 무대로 본 헤겔의 해석에 저자는 거부된 인정이란 의미의 ‘경멸’을 보편화된 형식의 하나로 슬그머니 집어 넣는다. 왜냐하면 대중들 사이에 경멸을 배제한다면 대중들 사이에 관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p.110). 인정 자체가 현실적으로 희소한 자원이기 때문에 인정의 거부도 불가피한 사회 형식일 수 밖에 없으며,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인정에 대한 욕망만을 부추기는 평등주의는 아부 이론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한편, 국가가 독점한 폭력의 위협에 인간이 공통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조건에서 홉스는 인간 평등에 대한 근거를 찾는다(p.116). 그의 주저인 ‘리바이던’ 도입부에서 인간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는 홉스에게 인간은 위협의 공포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심리학적 동질성의 기반 위에 있다. 슬로터다이크는 평등주의를 위한 이러한 토대를 ‘저급한 인간 본성’이라고 깎아 내린다. 그러나 당대 귀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절대 왕권의 성립을 위한 이론적 전개를 위해 홉스가 ‘리비이던’ 도입부에서 방법론적으로 고안한 기계론적 인간관을 평등주의의 근대적 근거로 폄하하는 슬로터다이크의 인용은 다소 자신의 논지를 위해 선취 해석한 면이 있다. 이런 해석은 죽음 앞에서 인간은 평등하다고 외친 프랑스의 거지 시인 비용을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박하다.
이에 비해 스피노자는 대중에게 아부하지 않는 반저널리스트로 부상된다(p.120). 그는 다수의 평민(vulgus)이 지향할 수 밖에 없는 탐욕에 직면해서 자기 통제의 방안으로 이성을 대체할 수 있는 상상력을 제시한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다수에게 제시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로 보충함으로써, 하나의 상상을 다른 상상으로 대체함으로써, 대중이 조금 덜 비합리적이고 조금 덜 감정의 노예가 됨으로써 조금 덜 손상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의 탐구다(p.121). 과대 포장된 인간 교양을 축소시키고 대중에게 위선적이지 않은 다수 이론을 창안한 것으로 저자는 스피노자를 평가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헤겔과 맑스를 함께 묶어서, 히틀러의 수평주의를 비판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다룬다. 이들은 ‘가장 비참한 빈곤으로부터 솟구쳐 오를 수 있는 자기 구원적 계급 분노의 환영’(p.129)에 빠져 혁명을 ‘정언명법’으로까지 오판해, ‘인류학적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원한감정을 질투로 해석하며 맑스를 졸렬하게 비판하는 일부 영미 윤리학과 영미 경제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저급한 해석이다.
다만 전통적 계급 이론의 망에서 걸러지지 않는 대중의 거대한 욕망이 오락산업을 비롯한 문화산업에서 대체 충족되고 있는 현실은, 청년 맑스의 급진적 실천 원칙이 사회에서 실현되기가 얼마나 불투명한지 보여준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인간이 굴욕당하고 압박당하며 경멸받는 존재가 되는 모든 관계를 전복”하라는 청년 맑스의 열정적 촉구에 슬로터다이크는 경멸로 가득찬 현실을 인정하라며 냉랭하게 응답하는 것이다.
마무리 : 휴머니즘의 지평은 어디까지?
이 리뷰는 제 2부 ‘대중의 경멸’까지만 다룬 것이며, 2부에 있는 대중과 파시즘의 친화성에 대한 논의와 저자가 자기 찬양의 현대적 효시로 평가하는 니체의 복음서와 관련해, 언어의 기능을 나르시즘으로 파악한 제 3부 ‘복음의 개선에 관하여:니체의 다섯 번째 복음서(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관한 논의는 생략한다.
슬로터디이크가 이상의 비판에 대한 대안으로 어떤 모델을 제안하려는지 명확하지 않다. 대안의 제시 자체도 이미 만연되어 있지만 실현되지 않는 계몽주의에 대한 저자의 냉소 때문에 거부될 것이다. 다분히 예술의 차원에서 차이의 다양화를 옹호하는 면에서 그의 철학이 아도르노나 벤야민과 흡사한 면이 있지만 문제제기 이상의 의의가 있는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가 문학과 수사학의 접목을 꾀하며 비유와 수사를 사용해 간결하고 극적으로 저술한 작품들이 실로 방대하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라는 논문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비평 ‘벤야민의 이름’(국내에서 ‘법의 힘’으로 번역된 책에 수록)처럼 슬로터다이크 자신이 일으킨 논란이 앞으로 어떻게 수습될지 불투명하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저자들을 실체없는 유령들으로 격하시킨 데리다처럼, 슬로터다이크에게 휴머니즘이란 실체없는 유령의 아부에 불과할 뿐인가?
적어도 휴머니즘의 지평이 길들이기와 교육의 문제를 넘어 생명공학을 비롯한 현실의 주요 사안과 맞닥뜨리지 않는 한, 인간 사육의 대명제로서의 휴머니즘은 끝났다(p.39)는 것이, 철학을 이론과 실천이 아닌 비유와 수사로 얼룩진 한편의 드라마로 연출시킨 슬로터다이크의 실존적 문제 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