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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과 예수의 닮은 꼴

단상 Vorstelltung 2009. 11. 4. 10:4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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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영삼의 <동학1 : 수운의 삶과 생각>을 읽고 있다. 수운은 19세기 초반, 가세가 기울어진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20대에는 장사꾼으로 삼남일대를 누비다가, 30대에 들어서 제철사업에 잠깐 뛰어들었다가 망하고, 본격적인 수행생활로 들어간다. 삼십대 후반 용담에서 득도를 하고 강론을 펼치면서 수많은 도인들이 수운에게 모여 들었다. 시기적으로는 이제 20세기를 문턱에 둔 시기이지만 조선 말기의 향촌, 더군다나 영남 일대는 여전히 유학을 숭배하는 사대부의 지배하에 있었다. 동학도와 유학도의 관계는 마치 예수와 바리새인의 관계와 비슷하다. 수운은 30대의 나이에 예수와 흡사한 창도의 과정을 겪고, 제자를 거느렸으며, 관의 탄압을 받고 순교했다. 수운에게 도통을 받은 해월은 어떻게 보면 베드로와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동학은 농민전쟁과 결합되어 혁명으로 나갈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다르지만, 몇백년에 걸친 탄압을 견디고 로마의 국교로 수용된 기독교에 비해 동학의 고난기는 매우 짧다. 동학은 천도교라는 제도 종교로 수용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울을 모시고 있어 신분에 귀천이 없다는 동학의 주장은 신분질서가 아직도 강하게 자리잡았던 조선 말기에는 너무도 혁명적이었지만, 이제는  이런 주장은 인류 보편의 가치를 종교적으로 세우려는 주변부의 역사적 사건으로 남을 뿐이다. 굳이 동학에 기대지 않더라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이미 프랑스 혁명에서 선언되었으며, 근대법은 이런 혁명의 정신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종교적 코뮤니즘으로서 동학이 보여준 실천들은 귀감이 된다. 500년을 내려운 유교지배체제를 거부했다는 사실 자체가 혁명적 사건이다. 

동학은 유학의 외부에 있으면서도 유학의 내부에서 분출한 것이다. 유학이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고립의 길로 나갈 때,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학은 동학이나 유학에게 위협의 사상으로 인식되어 졌다. 동학은 이 서학과 동학의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수운은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감지해서 인간이 곧 하늘이라는 근대적 주체 선언을 비로서 자생적으로 한 것이다. 그것이 종교적 체험의 형태로 시작된 점은 시대적 한계이지만, 몰락하는 조선이 스스로 변혁하지 못한 채 끌고가는 신분사회의 모순을 깨뜨리기 위해 인민이 들고 일어서는 것을 정당화시켜 주는 이념으로서 작용한 것이다.   

병인양요를 거치면서 동학은 이필제라는 모사꾼에 휘둘려 수운을 필두로 억울하게 숨진 동학교도의 복권을 위한 교조신원운동으로 변란에 가담한다. 병인양요는 강화도에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8,000명의 천주교도가 학살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프랑스가 강화도에 함대를 파견한 데서 시작된다. 이후 한강 하구를 점령한  소규모 프랑스 군대를 포수를 앞세운 관군이 몰아낸다.  작은 승리에 도취된 애국주의는 결국 망국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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