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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28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햄릿, 맥베스, 리어왕, 오셀로) 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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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은, 선과 악의 결정적 싸움에서 결국 죽음 앞에서 공통적으로 무너지고 마는,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의 벽을 세운다. 악의 편에 있는 사람(맥베스, 던컨, 에드먼드, 고너릴, 리건, 그리고 이아고), 악의 편에 조정당하는 사람(오셀로), 악에 맞서 싸우는 사람(햄릿, 코델리아, 데스데모나) 모두가 죽음의 파도에 휩쓸리고 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구성은 선과 악이라는 대립 구도 자체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라는 점을 인간의 순간적 격정을 통해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셰익스피어는 악에 대한 분명한 응징을 결과함으로써 서슬퍼런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면서도 이로인한 선의 찬란한 승리를 보여주진 않는다. 상처투성이인 정의의 판정승일 뿐이다. 그래서 비극이지만 이런 비극이 왜 세익스피어 당시의 관객들에게 호응을 일으켰으며 현대에 와서도 현실감있게 느껴질까? 그때는 희극의 유행이 사그러들면서 비극이 새로운 양식으로 부상하는 시기였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 만연되어 있는 비극적 상황때문은 아닐까? 9시 뉴스를 보면 참담하다. 쇼킹하고 발칙한 사건의 발굴에 혈안인 매스 미디어는 비극의 연출자이면서도 자질구레한 쇼와 재담으로 비극적 현실을 천박하게 무화시키는 희극의 연출자이기도 하다. 두 딸로 부터 버림을 받아 황야를 배회하는 리어왕이 자신의 비탄한 심정을 잊으려고 하는 듯 어릿광대를 붙여 다니듯이, 미디어는 분열된 제왕의 권위를 행사한다.

물론 그렇다. 만연된 죽음과 그 암울한 그림자에 짓눌려 암울하게 지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런 현실을 말초적 방향전환으로 웃고 넘기는 것은 집단적 광증이다.

어차피 삶이란 죽음을 앞둔 시한부의 지속일 뿐이지만 죽음을 대하는 삶의 태도와 죽음의 형태는 다양하다. 카를로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는 이런 비극적 현실을 내용으로 삼으면서도 이런 현실로부터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미지의 남자가 밑줄을 그어대는 텍스트는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이다. 주로 연인간의 사랑에 관한 담론이 주류를 이루는데, 사랑이 절박한 이유는 죽음의 한계때문이기도 하다. 문학은 삶과 죽음의 바탕위에서 끊임없이 이것을 의식하면서도 도피하려고 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도피가 불가능함을 알았을 때 주인공이 맞닥트린 절망감은 독자에게 동정과 공감, 번민의 부질없음을 일으킨다.

봉그랑의 밑줄은 미로처럼 텍스트 사이를 뚫고 지나가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남겨둔다. 어쩌면 이 흔적은 콩스탕스에게만 보여주려고 남긴 밑줄이 아닐지 모른다. 사랑하고 싶어하는 콩스탕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언어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사랑을 노래하는 책의 언어는 그사람의 언어가 아니라 '너'의 언어로 된다.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밑줄 긋는 이는 콩스탕스라는 여자의 연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고래적부터 그리고 펼쳐질 미래에도 죽음이 아가리를 벌린 채 생명을 삼키는 대지위에서도 사랑의 빗물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거기에 살짝 손을 갖다만 대도 쉽게 전염되어 버린다. 콩스탕스처럼.

(2004.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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