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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와 아르노의 서신

책들 Bücher 2015. 4. 23. 19:0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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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헴름 라이프니츠/앙투안 아르노, 『라이프니츠와 아르노의 서신』 Leibniz : Correspondance avec Arnauld 이상명 역(아카넷, 2015)

 

얼마 전 정치권을 강타한 성완종 리스트 파문은 녹취파일을 둘러싸고 언론사 간에도 번졌다. 유족의 뜻에 따라 45분 가량의 음성파일을 문자 형태로만 전면 공개한 K신문사에 대항해 음성파일 전체를 전격 공개한 T방송의 보도사장은 공개사유에 대해 육성이 갖고 있는 현장성을 든다. 이는 문자의 방식이 음성에 비해 의미의 진정성과 연관성을 포착하기에 제한적이라는 의중을 보인다. 죽음을 앞둔 제보자를 통해 단독 입수한 타언론사의 특종 녹취파일을 가로채 전격 공개한 것은 절도형태의 보도행태로 보이나, 문자가 음성에 비해 의미전달이 제한적이라는 말은 언뜻 일리가 있어 보이면서도 철학적 논쟁을 유발할 만한 논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이와 관련해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에서 음성중심의 로고스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일상적인 상황에서 발언의 뉘앙스가 의미전달의 방향을 상반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예를 들어 반어법적 화술), 문자는 음성에 비해 제한적이며, 음성 또한 문자에 비해 제한적이다(예를 들어 음성은 사라지지만 문자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단, 루만처럼 커뮤니케이션으로 사회를 바라볼 것을 제안하는 입장에서 문자는 음성에 비해 진화한 커뮤니케이션 매체이며, 문자와 음성의 교차비교에서 볼 때 의미손실의 양이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음성상의 미세한 움직임은 연극대본의 지문처럼 처리할 수도 있다. 지금 이런 얘기로 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 책의 역자가 부분적으로만 번역되어 알려진 이 서한집을 완역한 이유로 이 서한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 자료일 뿐만 아니라 이 서한이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히는데 있다. 내 생각에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과 상관없이 이런 책은 진작 완역되는 것이 맞으며,  중요부분만 번역하는 편집본은 마치 교향곡의 주제부분만 뽑아서 편집음반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괴하다. 이것은 음성 대 문자에 대한 교차 비교 식의 문제도 아니다.

 

역자는 이 서한집이 철학의 본래적 성격인 논쟁의 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소개한다. 하지만 이 논쟁의 양상이 순수히 논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다방면의 재능으로 미래가 총망되는 젊은 학자 라이프니츠는 이 서한집의 첫 번째 서신에서 아담의 개체적 개념에 대해 서술하면서 데카르트주의자이자 당대의 신학과 논리학에서 널리 인정받던 예수회 노학자 아르노 신부에서 자신의 형이상적 가설을 소개한다. 라이프니츠는 아담의 개체적 개념에 아담의 후손에게 일어날 모든 일들이 포함된다는 명제를 가설적 필연성으로 제시한다. 가설적 필연성이란 어떤 명제가 성립하려면 이 명제를 성립시키기 위한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조건n) 노아의 방주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르노는 이 명제를 절대적 필연성의 그것으로 오인하다. 아르노에 따르면 아담의 개체적 개념에는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어서, 신이라고 해도 이를 변경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담의 개체적 개념은 확정되어 있어서 여기에 어떤 변화, 자유의 틈도 없이 아담의 후손들에게 일어날 모든 일들이 포함되어 있어, 이는 잘못된 명제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적 논쟁의 양상으로 보이지만, 아르노 자신이 라이프니츠와 일면식도 없었을 때 그의 최초의 편지를 무시한 적이 있고(답장을 하지 않음), 이후 그를 한번 만나봤던 기억과 아르노 자신이 신학적인 문제와 뒤엉킨 분쟁으로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도피하도록 자신을 돕던 헤센-라인펠스의 영주 에른스트를 경유해 라이프니츠의 편지를 받는 입장에서 그는 라이프니츠를 아예 무시할 수 없었으나(답장을 하지 않는 식으로), 퉁명스러운 첫 답신을 하고 만다. 완역된 이 서한집은 바로 이런 철학외적 상황을 생생히 보여준다.

 

만약 아르노와 라이프니츠의 서신 사이에 에른스트 영주라는 다리가 없었다면, 애초에 라이프니츠가 출판을 염두한 이 서신은 진행되지 못했을 수 있다. 두 철학자 간의 서신이면서도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하는(그렇지만 내용적으로 서신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는) 제 3자를 통해 이 서신이 관찰/중계된다는 점(단지 전달이 아니라)은 이 서신이 갖는 매우 독특한 위상이다.

 

이 서신에서 아담의 개체적 개념과 마찬가지로 아르노를 격분시키는 라이프니츠의 새로운 개념은 공존의 가설이다. 세계를 연장과 실체로 분리해 이해하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반대해 라이프니츠는 실체에 의한 일원론을 성립시키기 위해 공존의 가설을 도입한다.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되는데, 신체와 영혼의 상응론과 동식물의 영혼론이다. 인간에게서 신체와 영혼은 전혀 별개의 존재방식인데, 이 둘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지 않으면서도 상응한다는 것이다. 상호작용없이 각자 독립적으로, 자기충족원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는 신체의 고통을 영혼이 잘 인식(표현)할 수 있는 것은 신체의 고통이 영혼에게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창조의 순간에 “모든 개체적 실체는 항상 그에게 일어날 모든 사건을 함축하고, 자신의 방식에 따라 전 우주를 표현”(147)하기 때문이다. 즉 태초에 이미 사고의 연쇄가 운동의 연쇄와 일치하도록 창조되었다(148). 이런 생각은 라이프니츠 후기의 예정조화설을 예고한다. 두 번째, 동식물의 영혼론은, 동식물이 무한 분할되는 연장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그렇게 된다면 한낱 현상에 머물고 만다) 실체적 형상의 존재방식(모나드)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며, 라이프니츠는 동식물의 파괴될 수 없는 부분에 실체적 존재인 영혼이 있다고 주장하면서(222) 당대 생물학의 새로운 발견을 조심스럽게 내세운다(최초의 미생물학자 레이우엔훅의 후추에 스며든 물방울.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놀랍게도 많은 동물을 관찰할 수 있다고 말함. 220쪽). 이에 대해 만약 동물이나 식물이 절단되어 분리된다면 영혼이 어디에 있겠냐고 묻는 아르노의 질문에 라이프니치는 무한 영혼론으로 응수한다. 세계 자체가 모나드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미세한 영혼들은 불멸하며(200), 영혼으로 충만되어 있는 것이 바로 자연의 완전성이라는 것이다(220).

 

언뜻 보면 이 서신에서 나타난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만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범신론에 근접해 있으며(270), 실체 일원론을 내세운 스피노자와 흡사해 보이지만,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적 가설은 이제 기초공사가 시작된 것이며, 그에게 스피노자는 비판의 대상이다(306). 아르노의 답신 중단으로 그리 방대한 분량으로까지 확대되지 않은 이 서신으로 라이프니츠가 밟는 형이상학적 도정의 중요 단면을 아르노라는 노련한 비평자의 관점에서 투과해 볼 수 있다. 즉 그는 파우스트를 단련시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역할을 담당하지만, 이 악역을 충실히 이어가지는 못한 채, 라이프니츠가 그런 종류의 지지받기 힘든 사변을 중단하고 카톨릭으로 귀의하도록 에른스트 영주에게 권유한다(239).

 

기독교의 권위가 생사여탈까지 좌지우지하는 시대에서 라이프니츠는 이 시대와 정합적으로 모순되지 않는 형이상학을 구축하고자 한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방법으로 신에게 봉사하는 방식이다.

 

“미래는 우리에게 의존되어 있는 만큼, 미래가 신의 추정적 의지 혹은 신의 명령과 일치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313)

 

*웹진 <미르> 구일섭의 서신 코너에 동시 게재 : http://www.themir.net/archives/category/book-2/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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