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김용철'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1.08.22 삼성 : 나라를 먹여 삼키는 기업 3

삼성 : 나라를 먹여 삼키는 기업

책들 Bücher 2011. 8. 22. 16:19 Posted by 산사람
반응형

슬슬 소설책 읽기가 시들시들해 지면서 도서관 서가의 사회과학류를 서성거리다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 초판 10쇄)와 이삼성의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한길사, 2010, 1판 4쇄)를 대출했다. 김용철의 책은 이제 면책을 받고 잔뜩 힘이 들어간 눈매와 몸체를 뒤뚱거리는 삼성 족벌 2세의 당당한 위풍에 가려 잊혀질만한 시대의 에피소드로 전락해 가는 감이 있지만, 대기업에 국가와 생활세계가 매수당하는 현실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란 점에서, 이 분야의 영원한 고전이라 불러도 좋을 내부 고발서이다. 삼성의 60여개의 계열사가 구조본이라는 법적 실체도 없는 회장의 비서실에 의해 좌지우지되며, 주요 계열사가 이재용에서 출발하는 순환출자로 꽁꽁 묶여 있는 체제는 현대판 친권체제, 중앙집권식 기업 운용 방식이다. 고중세 세계의 왕국에서 가신과 제후를 묶는 접착제가 칼자루와 작위/영지였다면 삼성은 철저히 돈이다. 삼성전자로 대표되는 주요 계열사가 벌어들인 실적의 일부는 세탁되어 행정/사법/입법에 전방위적으로 흘러간다. 흥미로운 에피소드 하나.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정부의 타이틀에 대한 논의는 삼성 구조본의 회의에서 '참여정부'라는 이름으로 먼저 나왔고 이후 청와대에서 이를 채택했다고 한다. 삼성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 실세 이학수가 노무현의 부산상고 선배였으며, 노무현이 '학수선배'라 잘 따랐다는 얘기. 이런 인맥으로 이학수는 2002년 당시 구조본에서는 드물게도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도 괜찮겠다는 의견을 드러냈다. 어떤 정부든 길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참여정부의 정책 일부가  삼성경제연구소의 영향을 받았으며, 삼성전자 사장 진대제는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입각하기도 했다. 법원 퇴직 후 변호사로서 삼성 에버랜드 사건의 변호를 맡았던 이용훈은 이후 참여정부의 대법원장이 되는데, 삼성의 지배구조 및 경영권 승계와 맞물린 에버랜드 사건이 결국 대법원까지 올라오게 되자 이용훈 대법원장은 삼성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냈다. 참여정부가 이 정도인데 이명박 정부는 더 말할 것도 없다(이명박과 삼성의 연결고리는 삼성가의 인연깊은 가신인 천신일 세종나모 회장). 국가 예산 규모의 매출을 올리는 이 족벌 그룹이 대한민국을 언제까지 쥐락펴락할까.  

이삼성은 이 책에서 자신의 문제틀을 방대한 동아시아 역사 학습의 바탕에 투영시킨다. 저자는 예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통인데 왜 동아시아의 역사에 빠져든 것일까? 저자는 통일신라 이후 조선의 몰락 시기 까지 지속되어온 한반도의 중화주의(중원의 오리지널 중국을 숭상하는 주의)라는 이념의 숭배대상이 이제 미국으로 바뀐 시점에서, 이런 이념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적절한 것인지 묻는다. 중국은 중원으로 대표되는 한(漢) 민족만의 중국이 결코 아니라, 중원을 둘러싼 노마드 세력과 엎치락 뒤치락한 복합적 단위의 국가라는 것이다. 하,상,주에 이은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은 원래 서쪽 끝에서 노마드 족과 다툼을 벌였던 나라다. 중국이란 정주민인 한족과 유목인인 노마드가 역사를 동틀어 전쟁과 경제적 공생, 문화의 형태로 끊임없이 상화작용을 하지만,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처럼 결코 합일될 수 없는, 끊임없는 내적 분열의 봉합상태이다. 통일신라 시대를 전후해 한반도의 영남중심 집권세력이 정주민인 한(漢)민족의 중국을 숭상하고, 중원 주변의 노마드를 오랑캐로 배척함에 따라 전란을 입기도 했다. 여진과 원, 청이 그렇다. 하지만 흉노라는 노마드가 기원전 3세기에 중국 변방을 흔들기 시작한 이후, 2천여 년간 중국의 통일을 한족과 양분한 이들은 바로 몽골과 만주리안과 같은 노마드였으며, 역사의 후대로 갈 수록 노마드의 지배기간이 길어졌다. 그만큼 이 변방족들이 한족을 흡수하면서도 안정적으로 통일된 중국을 관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티벳의 독립요구에 미친듯 발끈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역사의 지형 위에서 저자는 앞으로 남한의 외교가 친미를 유지하면서 동북아의 평화를 지켜 나갈 수 있는지 의문시한다. 하지만 과거의 그 거대한 동아사아의 역사지형이 현재의 동북아 질서를 이해하고 선견하는데 참고 이상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저자는 혹시 역사의 심원한 단층을 너무도 가볍게 넘겨 뛰려는 것은 아닐까? 산업혁명과 1,2차 세계대전은 전혀 새로운 현실을 한반도에 안겨 준 것이 아닐까? 위태위태한 달러의 불안 앞에서 힘의 균형이 중국으로 쏠리는 세계정세에서 하나의 돌파구를 이 책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