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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읽은 조지프 콘래드의 <로드 짐>과 <암흑의 핵심>은 세기말적 음산함이 런던의 안개처럼 자욱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 소설 또한 마찬가지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아이러니컬한 테러 시도를 풍자적으로 보여주지만 그 방식은 역시 음산하다. 우크라이나 근방 폴란드계인 콘래드의 가족을 추방한 범슬라브주의는 콘래드를 죽음 일보 직전까지 밀어 붙였고 바다로 내몰았다. 한때 레닌이 유배당했던 시베리아 동부에 부모를 따라 유형에 처한 어린 콘래드가 차례로 부모를 여의면서 그가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는 방안은 저항이 아니라 프랑스로의 이민이었다. 소설에서 블라디미르라는 러시아 대사관 간부가 이중스파이 벌록에게 그리니치 천문대 폭파를 지시하는 것은 콘래드의 개인적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중에게 뚜렷한 동기도 없는 테러로 공포를 일으키고 사건이 다소 어뚱하게 보이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단지 어설픈 스파이의 행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어떤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고뇌하는 인간을 보여주는 점에서 로드 짐과 벌록 부부, 그리고 이민자 콘래드는 유사한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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