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한겨레에서 한국 중년의 등산복 유행에 대한 문강형준의 칼럼을 읽고 공감가는 부분이 있어 패이스북에 공유할까 하다가 말았는데, 오늘 누군가 공유한 걸 보았다. 여기엔 예감했던 논조의 비약을 질타하는 댓글이 보인다. 등산복 차림을 사회 양극화와 연결시키는게 말이 되는지, 각자 산에 오를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로 불평등 사회에 맞서자는 결론의 과감성 등. 하지만 나는 중년이 어렵게 산을 올라야 하는 것이 사회적 현실도 어렵게 맞설 수 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지적에 상당히 공감한다. 산을 오르는 것이야말로 남한의 중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적이면서도 비교적 건전한 문화다. 물론 산을 오르다 보면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산악회의 소음이 거슬리기도 하고 등반 불륜도 벌어진다고 하지만, 이런 일은 오늘날의 일만도 아니다. 하물며 등산을 좋아하는 것이 오늘날의 문화만도 아니다. 다만 아웃도어 용품의 범람 속에서 등산용품(옷과 장비)의 수요가 높아진 점은 다르다. 또한 산에 오르는 사람들 중엔 명품 아웃도어를 걸친 사람도 있지만 무상표의 복장으로 가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제대로 복장을 갖추지 않은 사람도 있다. 등산용품과 관련해 산에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양극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등산을 하는 중년들이 서민이라는 일반화는 잘못된 것이지만, 통계적으로 조사를 해본다면 서민의 범주(부동산을 포함한 순자산 3억대 이하)에 속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직장생활은 점점 더 가파러지고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은 정점에 향하며 노년을 코 앞에 둔 중년이 산을 오르는 것은 이 첨예한 현실을 나름대로 극복해 보고자 하는 잠깐의 위안인 셈이다. 이들을 투쟁의 거리로 이끌어 내는 것은 영화 <콜래트럴>에서 맥스의 어머니가 빈센트에게 말안듣는 맥스에 대해 푸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난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