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또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스쳐 지나가는 계절의 전환기, 어제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대통령은 한반도에서 '군사행동'은 자국의 동의없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전쟁이 전쟁터로 유력한 국가의 동의 아래 진행된 일은 드물다. 이 땅에서 또다시 전쟁만은 일어나지 않도록 외교에 힘쓰겠다는 의지를 어떻게 보면 미국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표현으로 변형한 것이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인정투쟁의 연속상 상에서 영토를 놓고 연합국에 협박을 했고, 그것이 외교적으로 해결되지 않자 침공을 했다. 북조선에게 그러한 인정은 절대적 세습권력의 존속이며 안정적인 국가체제는 수단에 불과하다. 한국이, 미국이 그러한 인정을 용인할 수 있을까? 일당독재와 권위적인 지배체제의 중국과 소련에게 그만한 옥동자와 완충제가 또 있을까? 문대통령의 연설대목은 거대 강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줄타기를 해야하는 현실에 대한 깊은 탄식의 표현같다.
늦여름, 모스크바를 목전에 두고 아우스터리츠의 회전 만큼 중대한 보르지노 전투가 준비된다. 모스크바까지 침공을 당하면 러시아의 절반을 프랑스에 내어주는 상황이 되므로 프랑스의 거침없는 공격에 대비해 러시아군은 견고한 진지를 준비하게 되지만, 톨스토이에게도 볼콘스키에게도 20만 군대가 격돌하는 진지전은 이미 전세를 타고 있는 프랑스군을 잠시 정체시키는 효과에 불과할 뿐인 것으로 인식된다. 러시아군 내부에서도 전투도 하기 전에 상당한 손실을 예감할 정도였다. 피에르에게 보여주기 위해 전선을 시찰한 베니그센은 적에 대한 기습 공격을 위해 숲속 평지에 매복해 있던 1개 군단을 비어 있는 좌현 진지로 보내 버린다. 수세적인 전술을 쓰는 쿠트조프가 진지를 비우라고 명령할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쟁은 전쟁을 일으킨 국가가 승리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해도 승리를 이어갈 수 있는 가능성은 전쟁의 기간에 반비례한다. 그 사이에 일어나는 전쟁의 대규모 참상을 막기 위해선 어떠한 괴물과도 협상을 해야하는 것일까.
이 소설에서는 역사적 인물들과 허구인물들이 자유로이 등장하고 서로 소통한다. 문학은 단지 허구의 산물이 아니라 폭력적인 언어조작이라고 했던 해리 이글턴의 지적처럼. 재미있는 부분은 보르지노 전투를 앞두고 전선을 찾아온 피에르와 만나면서 볼콘스키가 동료와 대화를 하고 있는 클라우제비츠를 우연히 목격한 것. 군사고문단으로 프러시아에서 파견된 클라우제비츠가 보르지노의 협소한 지형 보다는 넓은 지형에서 전투를 치뤄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볼콘스키는 넓은 지형인 벌거숭이 산에서의 패배를 거론하며, 전쟁의 승리는 무수하고 가변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끝없이 진격하는 불굴의 정신이라고 피예르에게 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