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선적인 독서의 흐름이 역사에 닻을 내리고 있다. 서양사에 대한 깊이있는 개론서를 찾다가 서양사 수업에 교재로 구입했던 책을 펼쳤는데 아직 읽기에 부족함이 없다. 역사책도 분명 오래될수록 고고학적 발견에 밀려 퇴물로 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유행에 쉽게 흔들리는 분야는 아니다. 90년대 초반 유럽 13개국의 상이한 저자들이 공동편찬한 교과서는 융합과 대립의 소용돌이로 흘러온 유럽사 저술에 매우 적합한 방식이다. 한중일 공동의 교과서 저술은 지리상 거리보다도 깊은, 이질적인 이들의 역사적 공통개념의 부재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다. 아직은 EEC(유럽경제공동체)에 머물러 있던 시점에서 저술된 유럽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병행해 읽는다.
왕조 중심의 단조로운 통사로 진행되는 정사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순으로 되어 있으며 각 임금의 재위기간 중 있었던 중요한 일들을 때로는 간략하게 때로는 상세하게 기술하는데, 정사에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일들도 가끔 보이고(용의 출현이라든지), 농경중심에 접어든 사회답게 일기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오며, 특히 지진에 대한 기록은 매우 자주 나타난다. 사실상 방폐장 논란이 있던 경주는 역사적으로도 활성단층임 점이 누누히 지적된 것이다.
비교적 안정된 농경문명을 이룩한 신라는 북으로는 말갈, 서로는 백제, 남으로는 왜의 침입에 시달렸다. 특히 왜의 침입이 매우 빈번히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이점이 일본 세력이 이미 남쪽 해안지대에 자신들의 지배영토을 구축했다는 임나일본설의 빌미가 된다. 그렇게도 자주 그들이 바다 건너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조선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거나 어느 정도 이들이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는 거점 교통로가 확보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져 들게 한다. 왜병의 침입이 너무 빈번해서 14대 유례 이사금은 백제와 협력해 일시에 바다 건너 일본을 공략해서 다시는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했지만 음흉한 백제를 신뢰할 수 없으며 당시 신라의 조선술이 해상 침략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신하의 지적을 받고 왕은 단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