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만 번역되어 출판된 <아이네이스>의 최근 번역본(김남우 역)에 대해 완역본이 언제 나오는지 출판사에 문의했더니 전화만 돌리는 점을 볼 때 기약할 수 없다는 예감이 들어 도서관에서 천병희 완역본을 대출했다. 축약되지 않은 번역어가 웬지 말의 조임쇄가 풀린듯한 느낌을 준다. 예를 들어 에네앗은 아이네아스, 펠가마는 페르가마(성채), 다나웃은 다나이족(그리스인), 앙키사는 앙키세스, 그래웃은 그라이키아 식. 디도의 화염을 바라보며 칼타고의 해안을 떠난 아이네아스 함단은 역시 폭풍을 만나 시킬리아 섬의 에뤽스에 정박한다. 이곳에는, 뤼비아에 당도하기 전 바다에서 여윈 아이네아스의 아버지 앙키세스를 기억하는 다르다누스(트로이야 왕가의 선조로 윱피테르와 아틀라스의 딸 엘렉트라 사이의 아들)의 후손인 아케스테스가 있었는데, 여기서 앙키세스를 추모하는 장례식 경기를 치른 후 만난 아버지의 환영이 예언하는 바에 따라 아이네아스와 그의 함대는 튀르레니아 해안, 이탈리아 본토 서남부 쿠마이에 상륙한다. 여기서 아이네아스는 죽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무녀 쉬뷜라의 안내를 받고 저승길로 내려가는데(6부), 이 부분은 단테의 지옥 기행의 도입부를 연상시킨다. 스틱스 강과 카론의 등장도 동일하다. 자살한 이들이 저승에서 헤매이고 있다는 설정(디도를 포함해)도 마찬가지다.
앙키세스는 쉬뷜라의 동굴로 왜 아들을 불렀을까? 마치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민족을 이뤄 번성하리라 축복하듯이, 여기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에게서 펼쳐질 찬란한 로마의 역사적 인물들을 보여주는데, 왜 굳이 이전에 환영으로서 얘기해줘도 되는 것을 저승에까지 아들을 불러서 말하는 것일까? 바로 저승에는 레테의 강을 마시고 새롭게 태어날 로마의 위대한 인물들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베르길리우스의 로마 건국신화에 대한 이중적 견해가 보인다. 위대함의 뒤에 남은 무상함.
"저들은 모두 천 년 동안 수레바퀴를 굴린 후에야 레테의 강으로 무리지어 나오도록 신의 부름을 받은 것이란다. 그것은 물론 저들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지상으로 돌아가, 육신을 다시 보고는 육신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란다."(6권, 748~751)
세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동일한 기일에 맞춰 제정된 책의 날(4월 23일)을 즈음에 교육방송에서 세익스피어의 햄릿 기행을 위해 덴마크의 바이킹 선단을 소개한 부분을 봤다. 10세기 경 바이킹의 화물선과 군선을 옛 방식대로 제작한 배들과 아이네아스 유민이 타던 기원 전 10세기 경의 배들이 얼마나 차이가 날지 궁금했다. 바이킹의 배가 보여주는 바처럼 아마도 덮개도 없는 조악한 구조물이었겠지만, 날카로운 선수와 우람한 용골은 거친 바다를 빠른 속도로 헤쳐가기에 적합해 보인다. 유일 신의 뜻에 따라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광야를 헤매는 유대인과 신들의 분노와 간계, 도움으로 라티움을 향하는 트로야 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