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경제 담론의 함정

단상 Vorstelltung 2014. 10. 21. 08:4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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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한국사회에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농축수산/가공/생활재 물품 직거래의 형태로 고도 성장을 이룬 생협의 사업에 주목한 정부가 관련 부서를 만들고 대응할 정도이며 재선에 성공한 서울시장은 집권 초기부터 서울시를 사회적 경제의 요람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나 자신도 이런 환경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상 내부에서 그 전개과정을 관찰한다는 것은 일면적인 것이지만, 어차피 맹점없는 관찰이 불가능한 이상, 제한된 시각으로부터 다른 관찰 지점으로의 창구를 제시할 수 있도록 이 글이 하나의 발판이 되기를 희망한다.

 

19세기 말, 사회학의 기초를 세운 에밀 뒤르켐은 전통사회와 근대사회의 사회조직 방식에 관해 각각 유기적 연대와 기능적 연대라는 개념을 적용한다. 유기적 연대로 조직된 사회의 특성은 규범력 강한 집합의식이 사회의 핵심가치로 자리매김할 뿐만 아니라 이 가치에 기반해 사회의 재생산이 이루어진다. 예를 든다면 중세 서구의 기독교와 조선시대의 유교를 들 수 있다. 유교적 신분질서가 낳은 사농공상은 가치중심적 직업 분화의 사례다. 이에 반해 기능적 연대로 조직된 사회는 특정 가치가 물질적 삶의 교환관계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차단시키며 효용에 기초한 기능연관이 행위조정의 역할을 맡는다. 여기서는 빵장수의 이기심이 빵장수의 양심 보다 중요하다. 하버마스는 기능적 연관으로 조직되는 현대사회에서 합리성의 가능성을 확보하고자 생활세계와 체계의 개념을 도입한다. 이를 통해 예전부터 생활세계에 내재되어 있던 의사소통행위의 잠재력이 기능연관을 중심으로한 행정 체계와 경제 체계의 생활세계내 침투를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잠시 영화의 한 장면으로 가보자. 시드니 루멧 감독의 <네트워크>(1976)는 해고를 앞둔 한 뉴스 앵커가 벌이는 소동으로 시작한다. 시들어 가는 뉴스 앵커에서 독설적 사회평론가로 돌변해 방송 점유율을 끌어올리던 하워드 빌은 방송계를 장악하려는 거대기업의 음모를 폭로하다가 방송사를 소유한 회장과의 단독 면담에 들어간다.

정신착란의 증세마저 보이지만 그의 재능을 다른 주제의식으로 살리고자 회장은 압독적인 연설로 하워드를 전복시킨다. 그것은 세계는 수지타산을 엄밀힌 맞추는 회계장부로 기술되는 다국적 기업의 총총한 그물망에 의해 돌아가며, 하워드가 할 일은 이렇게 다국적기업의 세계경영으로 네트워크화된 세계를 선전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방송, 그 중에서도 보도 부문이 시청률의 등락에 좌지우지될 뿐만 아니라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급진 조직의 테러마져 기획상품으로 산입되는 것을 보여준다. 거대산업의 그물망에 이 산업을 타파하고자 하는 시도도 잠식되고 마는 것이다.

 

한국의 생협 전체의 사업고를 모두 합친다고 해도 관련 산업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은 미미하나 여전히 10~20%대의 높은 성장율과 100 만을 넘어서는 조합원 확보는 무시할 수 없는 규모다. 경제사업 뿐만 아니라 특정한 목적사업을 수행하는 생협을 포함한 사회적 경제의 결사체들은 시민사회단체라는 제 3의 섹터에서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맡고 있다. 심지어는 경제사범으로 수감중인 재벌총수까지 감옥에서 사회적 기업을 공부하고 몇몇 대기업이 지원사업(펀딩)의 방식으로 이 분야에 뛰어들고 있다. 유행처럼 번지는 이 현상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경영과 관련된다. 막강한 자본력과 공격적 경영기법으로 무장한 거대기업에 의해 재래시장의 매출이 반토막나는 일이 강 건너의 일일까? 시장에서 경쟁하는 이상, 생협은 대업의 경영기법을 일부 수용할 수 밖에 없다. 둔화되는 성장세를 비용절감으로 극복하고자 도입되는 업무위탁, 사업다각화를 위한 다양한 자회사의 설립, 감정노동을 불사한 끊임없는 서비스 경쟁 등은 시장에서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움직임이지만, 이것은 경제체계의 네트워크로부터 생협을 포함한 사회적 경제의 결사체들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생활세계와 밀접한 결사체 내부에 이미 체계가 침투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광범위하게 네트워크화된 체계와 상호침투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생활세계와 체계의 구분이라는 하버마스의 개념틀이 유효할 수 없으며, 따라서 전혀 다른 관점에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하버마스의 이런 구분이 적절치 않다면, 체계의 생활세계내 침투라는 명제도 성립되지 않는다. 사회적 경제의 단위들이 추구하는 활동이 사회적 통합(사회화)과 사회적 재생산에 일정한 몫을 담당한다면, 이것은 이익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 기업과는 존립 근거가 다르다. 그러나 조직의 운영을 위한 도구로 기업체와 유사한 경영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사업집행을 위한 예산을 세우고 손익계산서를 짜는 것은 공공부문 뿐만 아니라 친목회에서도 통용되는 방식이다. 이와 관련해 피터 드러커는 영리조직이든, 비영리조직이든 맡은 과업의 진정한 성공을 위해선 강력하고도 효율적이며 목적의식이 뚜렷한 경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의 결과물이 사회적  회계다. 이것은 현재 비영리단체의 경영측정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유기적 연대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규범은 고정불변의 인습적인 속성이 강한 반면, 현대사회에서 이런 규범은 타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현대사회에서 규범으로서 가장 보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주제는 인권이다. 한국사회에서 아직까지도 인간의 기본권에 대한 요구들은 충실히 응답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더해 인권의 보호막이라고 할 수 있는 물질적 삶의 조건은 곡예비행을 하고 있다. 근로인구의 절반 이상이 불안정 노무조건의 비정규직 상태에 있고 해마다 자영업의 생존율은 하락하고 있으며 늘어나는 노령인구에 대한 부양이 사회적 부담으로 가중되고 있는 반면 재벌중심 대기업의 국내시장 지배력은 더욱 확대되고 깊어지고 있다. 강력한 체계를 갖춘 시스템화된 사업모델로 목적지향적 사업을 뒷받침 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경제가 대기업의 명분만 살려주는 장식으로 그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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