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일섭과 하버마스의 서신 1 : 『의사소통행위이론1 : 행위합리성과 사회합리화』에 관해
*이 글은 가상의 서신이며 텍스트 소개를 주목적으로 합니다. 인용된 문헌은 일부 요약도 있으나 그대로 본문을 옮겨온 경우도 있습니다. 텍스트 출처를 확인하고 싶은 분은 댓글이나 메일로 메일주소를 알려 주시면 각주가 포함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streetphila@naver.com
**텍스트 :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1:행위합리성과 사회합리화』장춘익 역(나남, 2006).
**이 글은 2013년 5월 18일 웹진 미르 http://www.themir.net에 먼저 공개된 것이다.
2013.04.01.月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1990년대 한국사회에서 당신의 사상은 많은 파급을 미쳤다. 특히 철학, 사회학 분야에서 심했는데, 어떤 대학원 철학과에서는 대학원생 모두가 당신을 공부했어야 했다는, 다소 과장된 증언마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이런 광범위한 관심들이 오로지 당신의 독자적인 영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신이 80년대에 ‘재기발랄한 자극’이라고 치부한 파리발(發) 포스트모던 급진 철학에 대한 당신의 대결구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80년대 초반 당신의 미국 강의에 기초한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은 이런 대결구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흥미로운 저작이었다. 여기서 보여주는 비판은 수용적 비판이라는 방식을 취한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의 전반을 아우르면서 평가를 위한 핵심을 드러내고 판정을 내리는 방식이다. 여기서 판정은 인본주의와 반인본주의의 사이에서 그 강도가 달라진다. 같은 포스트모던 사상가라도 로티에 대해서는 관대한 반면 푸코나 데리다에 대해선 가히 비정한 비판을 당신은 가한다. 여기서 비정한 비판이란 경멸의 의식에까지 이를 수 있는 비호감을 말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신의 이런 비판의식이 비단 포스트모던 사상가에게 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학적, 사회학적 전통상에 있는 사유의 선배들에게도 예외가 없다는 점을 『의사소통행위이론』이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비호감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사소통행위론의 구축을 위한 단서들은 모두 그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당신의 사상의 궤적을 추력하려면 『공론장의 구조 변동』과 같은 초기 저작을 기점으로 삼아야 하지만, 현재 나의 관심은 당신의 전기(傳記)적 사상이 아니라 당신이 주도적으로 해명하고자 한 문제의식을 살펴보는 데 있다. 주석가에게는 불성실한 이런 태도는 적어도 현대의 마지막 사유의 거장이면서 열린 사유의 여유와 겸손함을 견지하는 학자에게는 그리 불공정한 접근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의사소통행위이론』은 당신의 대표작이면서 그러한 문제의식을 포괄적이고 심층적으로 드러낸 노작이다. 먼저 이 책의 전반적 기획과 의도에 관해 설명을 부탁한다.
2013.04.03.水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오늘은 미군정 하에서 공식적 통계로만도 1만 5천 여 명의 양민이 학살된 제주의 4.3 항쟁일이라고 들었다. 한국은 눈부시고 역동적인 경제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이면엔 국가의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관련된 독립영화(‘지슬’)가 선댄스 영화제에서 최고 작품상을 받고, 흥행에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데, 독일에서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4.3과 관련해 내가 언급한 ‘경제 발전’과 ‘국가의 폭력’이란 어휘는 내가 『의사소통행위이론』을 구상한 동기와 관련성은 없지만, 이른바 내가 ‘체계’라고 지시하는 경제체계와 국가(관료)체계가 생활세계를 체계의 근본 추동력인 도구적 합리성으로 억압하는 양상에서 이 어휘들은 상황적 유사성에 접근한다. 독일과 한국의 역사적 배경과 맥락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서독이 냉전체제 동안 미국의 52번째 주의 위상을 가졌던 양상이 그대로 한국에서도 이어지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에서 개별국의 시장 기능과 행정 기능의 확대는 보편화된 현상이다. 이러한 체계 복잡성의 증가와 함께 일어나는 사회병리 현상에 관해, 신보수주의처럼 국가의 기능을 시장에 넘겨주는 방식이 아니면서, 반근대주의처럼 이러한 체계의 확대를 제한하지 않고(근대적 생활양식의 포기 없이) 이러한 체계 복잡성의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이성의 잠재력이 구조적으로 분화된 생활세계 속에 새겨져 있다는 주장이 이 책의 배경을 이루는 동기다. 이 책의 전반적 기획에 관해서는 소제목이 생략된 아래의 목차를 참고하기 바란다.
I.서론 : 합리성 문제에 대한 접근방식들
예비적 고찰 : 사회학에서 합리성 개념
1.“합리성” : 잠정적 개념 규정
2.신화적 세계이해와 근대적 세계이해의 몇가지 특징
3.네 가지 행위 개념에서 살펴보는 행위의 세계연관과 합리성 측면들
4.사회과학에서 의미의 문제
II.막스 베버의 합리화이론
예비적 고찰 : 학문사적 맥락
1.서구적 합리주의
2.종교적-형이상적 세계상의 탈주술화와 근대적 의식구조의 출현
3.사회적 합리화로서의 근대화 : 개신교 윤리의 역할
4.법의 합리화와 현실진단
III.제1중간고찰 : 사회적 행위, 목적활동, 그리고 의사소통
예비고찰 : 분석적 의미론과 행위이론
1)~6) 베버 행위이론, 성공/이해지향적 언어사용, 타당성 주장, 화행의 분류 외
IV.루카치로부터 아도르노로 : 물화로서의 합리화
1.서구 맑스주의 전통에서의 막스 베버
2.도구적 이성 비판
V.미드와 뒤르켐에서의 패러다임 전환 : 목적활동에서 의사소통행위로
예비고찰
1.의사소통이론을 통한 사회과학의 기초
2.신성한 것의 권위와 의사소통행위의 규범적 배경
3.신성한 것의 언어화가 갖는 합리적 구조
VI.제 2 중간고찰 : 체계와 생활세계
예비고찰 : 뒤르켐의 분업이론에 의거해서 본 사회통합과 체계통합
1.생활세계의 개념과 이해사회학의 해석학적 이상주의
2.체계와 생활세계의 분리
VII.파슨스 : 사회이론 구성의 문제
예비고찰 : 이론사에서 파슨스가 차지하는 위치
1.규범주의 행위이론으로부터 사회에 대한 체계이론으로
2.체계이론의 전개
3.근대성이론
VIII.결론 : 파슨스에서 베버를 거쳐 맑스로
예비고찰
1.베버의 근대성이론에 대한 회고
2.맑스와 내부식민지화 명제
3.비판적 사회이론의 과제
2013.04.05.木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이 책은 합리성에 관한 사회학적 개념규정과 이를 보완할 논증이론, 합리화된 근대세계의 이해를 위한 비교로서 신화적 세계 이해에 관한 연구 성과의 검토, 사회학적 행위 개념을 통한 세계연관과 그 의미에 관한, 서론 같지 않은 무거운 논의로 출발한다. 내 생각에 이 책의 서론은 본론을 모두 읽은 후에 보는 것이 이해에 용이하다고 본다. 본격적 논의를 위한 방법론적 고찰에 그치지 않는 이 서론은 마치 헤겔의 『정신현상학』 서론 처럼 그 자체로 독립적인 성격도 있다고 본다. 일단 서론에 대한 얘기는 생략하고, 바로 베버에 관한 얘기를 듣고 싶다. 당신은 베버의 이론이 갖는 새로운 통찰의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베버의 이론 구성에 들어 있는 오류가 의사소통적 이성 개념의 해명을 위한 계기를 제공했다고 한다. 베버의 오류란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그런 계기를 제공했는가?
2013.04.07.日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내가 베버의 합리화이론을 먼저 검토한 것은, 역사철학적 합리성 개념과 사회진화론의 기능주의적 개념을 벗어나, 분화된 사회형태에 맞춰 합리성 개념을 세운 장본인이 바로 베버이기 때문이다. 베버에 의해 서구의 합리성 개념이 보편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데, 인성의 측면에서 이 계기의 추동력은 종교 합리화에서 일어나며, 사회체제의 면에서 합리화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국가기구의 관료화에서 일어난다. 신칸트 학파의 영향을 받은 베버의 종교사회학 논문집은 개신교를 통한 직업적 성공이 구원의 은총과 절충할 수 있는, 탈주술화된 목접 합리성의 유형을 추적한 결과물이다. 형이상학적 근거에서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은 관렴론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진화론의 개념을 차용한 유기적 사회진화론은 자연주의의 오류라는 전통적 비판에 직면하므로, 오직 사회 현상의 정신사적 맥락에서 합리성 개념을 끌어낸 점에서 베버의 숙고된 작업이 의의가 있다.
베버는 사회 합리화의 보편화 경향이 서구의 전유물로 보진 않지만, 서구 유럽에서 분명하고 일관되게 표출된 일련의 흐름으로 본다. 불교에서도 경전과 의식, 집례, 명상의 유형에서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역사가 보여준 변화만큼 역동적이지는 않다. 더군다나 발전하는 자본주의의 비상에 면죄부를 주어 세속의 욕망을 종교적 소망과 결합시키는 칼뱅주의의 성과는 시대 침투적이다. 종교가 전부였던 시대에 세속적 동기를 탈주술화된 종교로 합리화하는 정신적 훈련과 성과가 서구에서 물밀듯이 일어난 과정을 베버는 철저히 포착함으로써 개신교가 사회적 합리화에 담당한 역할을 충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합리화 이론에서 법의 발달은 모호한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법의 합리화는 목적합리적 경제행위와 행정행위의 제도화이지만, 이 행위의 하부체계들이 도덕적-실천적 토대(합리적 동의, 정당화 관념 일반)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 베버는 법의 합리화를 목적합리성의 측면에서 고찰함으로써 근대적 법체계를 도덕적-실천적 가치영역에 귀속시키지 않았고, 초기 자본주의 기업가들의 조직적 생활방식과 유사하게 규범적 정당성이라는 추상적 가치척도 아래 합리화될 수 있는 생활질서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근대적 법이 목적합리적 행위의 제도화를 위한 기능을 담당한다고 해서, 이런 설명이 법적 구조가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즉 베버는 법을 규범적 정당성의 영역에 귀속시키지 않음으로써 법실증주의에 매몰되고 말았다.
법의 정당화 요구에 부응했던 최초의 철학자들, 곧 로크에서부터 루소, 헤겔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표현되는 자연법 이론은 법적으로 조직된 국가 및 사회의 헌법을 세우기 위한 설명 틀인데, 합리적 정당화 원칙에 근거한 자연법은 도덕적-실천적 합리화의 의미에서 개신교 윤리보다 훨씬 진보한 것이다. 이 자연법 이론의 맥락에서 ‘자연’과 ‘이성’은 어떤 형이상학적 내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의가 정당한 힘을 가지려면, 즉 합리적이려면, 충족시켜야 할 형식적 조건들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이런 탈전통적 정당화의 형식적 속성을 베버는 실질적 가치로 오인함으로써, 토의적 합의의 개념이 자연법에 있었음을 보지 못하고 이를 형이상학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다. 도덕적-실천적 토대에서 벗어난 합법성은 그에게서 결단주의 내지 절차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베버는 도덕과 법의 진보를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의 부분적 합리화의 유형 속에 배치하지 못함으로써 이 진보에 관한 자신의 평가에 일관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나는 이러한 베버의 이론구성 자체에 들어 있는 오류를 밝혀 냄으로써, 베버가 수행한 현실진단의 체계적 내용이 우리 자신의 시대를 분석하기 위해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먼저, 베버의 행위이론상에 놓인 기본 개념에서 협착지점을 찾아내려 한다. 왜냐하면 이 지점이 베버가 행위체계의 합리화를 목적합리성의 측면 외에 다른 측면에서 탐구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즉, 그가 세계상의 합리화와 근대에 특징적인 문화적 가치영역들의 분화를 서술할 때 사회합리화의 전체 복합성을 포착할 수 있는 개념틀, 즉 서구 합리주의의 도덕적-실천적 현상들과 미학적-표출적 현상들 역시 포함하는 개념틀을 가지고 서술하면서도 말이다. 이 문제는 베버의 행위이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이어, 의사소통적 행위의 기본개념으로 돌아가 의사소통적 이성의 개념을 해명하는 작업을 더 추진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2013.04.08.月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이 책에서 드러난 당신의 베버 인식에 관해서는 평가가 양극단으로 갈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베버에 관해서 잘 알지 못하는 필자로서 우매한 질문 몇 개를 던지고 다음 문제로 넘어가고자 한다. 당신은 실증적 제정에만 근거하는 합법성은 그 바탕의 정당성을 가리킬 수 없다고 하면서, 합법성에 대한 믿음이 독립적인 정당화 유형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합법성에 대한 믿음의 인습화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신의 베버 인용에서 보여주듯, 베버는 사회의 합리적 분화가 시민들로 하여금 법적 정당화의 작업, 곧 그 실정성의 토대까지 고려해야 하는 수고를 배제한다. “사회적 분화와 합리화의 진전은 합리적 기술과 질서의 실질적 당사자들이 절대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지극히 통상적으로, 그것들의 합리적 토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의미한다.”(베버, 1968 a) 법 적용의 당사자들이 법의 정당화에 대해 토의적 참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현대 사회에 얼마나 가능할까? 법적 기술은 다른 사회 부문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전문화되고 특수화된 영역이 아닐까? 자연법 이론에서와 같은 정당한 동의의 절차는 법 정초 시점이나 가설적인 사고 실험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닐까? 또한 당신은 법적 추론(reasoning) 과정과 입법(legislatin) 과정을 혼용하는 것은 아닌가?
다음 장의 제 1 중간고찰에서 당신은 오스틴의 화행론을 원용하면서 상호작용에 적합한 발화수단적 행위(목적론적 행위에 적합한 유형으로서 화자가 청자에게 어떤 효과를 노리는 것)와 상호이해에 적합한 발화수반행위(어떤 것을 말함으로 행위를 수행하는 것으로서 주장, 약속, 명령, 고백 등)를 논의한다. 당신은 전략적 상호작용을 위한 화행은 의사소통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롭지만, 발화수단적 행위의 비선언적 목표추구(의도의 위장)는 언어에 내재된 의무형성의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한다 한다. 상호이해와 동의의 충족을 위해서 목적은 공개되어야 한다는 것이지만, 상호작용적 화행과 의사소통적(상호이해) 화행이 경합을 하거나, 이 둘의 구분이 모호한 언어 양상도 있지 않을까? 화행의 수용가능성의 조건을 언어적 타당성에 대한 상호주관적 인정으로 보는 당신은 타당성 주장의 수용가능성을 위해 추가적 제재조건이 필요없다고 하면서 규범적 타당성 주장의 효력은 청자의 비판을 견딜 수 있는 합리적 근거여부에 있다고 한 후 화행이론과 사회학적 행위이론의 연결 문제를 제시한다. 이 연결의 중간지점에서 ‘물화로서의 합리화’ 개념과 연관되어 베버는 루카치에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에 이르는 서구 맑스주의의 전통과 조우한다.
곁가지 같은 관심사이지만, 사실상 『의사소통행위이론』1권에서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 바로 ‘물화’의 문제를 다루는 IV장이다. 특히 비판이론 1세대와 운명적 연결 관계에 있는 당신은 이 선배들에게 마저 예리한 비판의 날을 거두지 않지만 아도르노에 대해서는 다소 신중한 유보와 기대가 아직도 당신에게 남아 있음이 엿보인다. 어쩌면 묘한 삼각관계가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그리고 당신 사이에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의사소통행위이론과 관련해 당신에게 아도르노의 사유는 어떤 자극을 주었으며, 이성의 회의주의에 빠진 아도르노를 당신은 어떻게 구제했는가?
2013.04.09.火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베버의 법 이론에 관한 당신의 질문은 우매하지 않지만, 지금 여기서 적절히 다룰 수 있는 질문이라 보진 않는다. 다만 화행이론에 관한 제 1 중간고찰에 관해 결론적으로 짧게 언급하고 당신의 최대관심사인 마지막 질문을 중점적으로 다루겠다.
의사소통행위를 위한 화행에 있어서 타당성 주장은 분석철학의 방법, 곧 문장의 의미론적 분석에서 해명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담화의 맥락에는 근본적 배경으로서 묵시적 지식이 있기 때문이며, 이 배경 지식은 우리가 원한다고 의식적으로 만들거나 의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식이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깊숙이 위치한 지식에 대해 상대적이다. 설(J. R. Searle)은 일상에서 작용하는 세계상 지식의 이러한 층을 청자가 화행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이해하고 의사소통적으로 행위할 수 있기 위해서 친숙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배경으로서 새롭게 발견한다. 이로써 설은 화행을―자신의 발언으로 객관세계, 사회세계, 주관세계 안의 어떤 것에 관계하는―화자의 시각에서 분석하는 이론가에게는 미답의 상태로 머물렀던 대륙에로 시선을 돌린다. 의사소통 참여자들이 어떤 것에 관해 견해를 주고받을 때 맥락을 이루는 생활세계의 지평으로 돌아감으로써만 비로서 우리의 시야가 달라져, 행위이론이 사회이론에 접목될 수 있는 지점이 눈에 들어온다. 사회 개념은 의사소통행위 개념에 상보적인 생활세계의 개념에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면 의사소통 행위는 일차적으로 사회관계의 원리로서 관심을 끌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합리화의 과정도 다른 위상을 획득한다. 사회합리화는 베버가 생각한 것처럼 명시적으로 인지된 행위태도에서보다는 묵시적으로 인지된 생활세계의 구조에서 수행된다. 이 주제는 제 2 중간고찰에서 다시 다뤄질 것이다.
베버의 행위이론의 비판을 통한 목적론적 행위로부터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실제 행위에서 문제시되지 않은 채 전제되는 공동의 배경지식으로서 생활세계와 관계되는 사회합리화의 개념을 겨냥한다. 베버는 화폐와 권력이란 매체를 목적합리적 행위의 해명을 위한 준거이자 고리로 파악했지만 언어를 대체할 의사소통이라는 매체를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그는 생활세계의 합리화 영역을 소홀히 취급했다. 상호이해지향적 행위를 기본 개념으로 하는 관점에서 볼 때, 합리화는 먼저 생활세계의 구조변화로, 즉 지식체계의 분화를 통해 일상의 의사소통에 영향을 미치고, 그리하여 문화적 재생산 및 사회통합, 그리고 사회화의 형식들에 파급되는 과정으로 나타남에도 말이다.
루카치는 베버가 사회합리화로 파악했던 근대 세계의 발전을 물화의 개념으로 접근한다. 교환가치의 증식 과정이 생활세계에 침투하면서 사회관계의 물화가 유발된다. 사회는 개개인에 대해 외부적인 것이 되며―체계이론 역시 예측하는 것처럼―불투명한 체계로 압축되고 추상화되어 자립화되고, 개개인은 그런 사회의 “환경”으로 전락한다. 루카치는 이런 시각을 베버 및 호르크하이머와 공유한다. 그러나 루카치는 그들과 달리 저 전개과정이 실천적으로 저지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론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근거들에 의해 내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그런데 루카치는 결정적 오류를 범한다. 그는 저 “실천”을 다시금 이론 쪽으로 끌어들여서는 철학의 혁명적 실현으로 상정한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형이상학이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보다 더 많은 역량을 이론에 기대해야 한다. 루카치는 혁명적 투쟁을 조직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역사 객관주의로부터 나오는 도구주의적인―스탈린주의의 테러에서 정체가 드러난―결론을 내리는 것조차 꺼리지 않는다. 벨머(A. Wellmer)가 옳게 정리하듯이, "베버의 추상적 합리화 개념 뒤로 가 자본주의적 산업화 과정에 특수한 정치-경제적 내용들을 밝혀내려 했던 루카치의 시도는 맑스 이론의 철학적 차원에 다시 효력을 부여하려는 좀 더 광범위한 노력―핵심적인 관점에서 객관적 관념론으로 복귀함으로써 좌절되어 버린―의 일환이었다.“
루카치의 이러한 관념적 물화 극복에 대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경험적 반박을 가하는데, 그 형태는 상품형식이 주체성의 심리적 동기와 문화를 장악하는 것을 보여주는 파시즘과 대중문화에 관한 이론으로 전개된다(사회합리화의 도구로 활용되는 파시즘과 문화산업). 이들은 상품물신주의 비판이라는 접근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발달된 자본주의 사회의 안정성을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루카치의 물화이론을 사회심리학적으로 급진화한 것인데, 이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산력을 증가시키면서도 동시에 주체의 저항을 잠재우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루카치가 여전히 타당하다고 믿는 논리학에 의하면, 의식의 물화과정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 속에서 자기지양으로 나가야만 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헤겔의 논리학을 밀쳐두고, 루카치의 예측과 어긋나는 증거들을 경험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객관적 이성이 변증법적 개념들로 재건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골수 실증주의자”인 베버와 같은 생각이다.
헤겔의 논리학을 실존주의적으로 거부하는 아도르노는 와해된 객관적 이성에 대해 아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긍정하는 것도 아닌 묘한 거리를 취한 채 주관적 이성을 사정없이 비판한다. 이 역설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확신 때문이다. 헤겔과 함께 정점이자 종점에 이른 “위대한” 철학은 이성의 이념, 즉 정신과 자연의 화해를 더 이상 자기 자신의 힘으로 체계적으로 전개하고 정초할 수는 없다. 그런 한에서 그런 철학은 형이상학적-종교적 세계상과 함께 몰락한 것이다. 우리는 맑스가 천명했던 철학의 실현 시점을 과거에 한 번 놓쳐버렸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철학은 인간적 사회상태의 약속을 일깨워주는,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회상의 장소이다. 그런 한에서, 사유가 물화를 초월하는 부정의 힘을 얻을 수 있는 진리가 철학의 잔해들 속에 묻혀있는 것이다. “시대에 밀려난 것으로 보였던 철학이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의 실현의 순간을 놓쳤기 때문이다.” 『부정의 변증법』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루카치가 근대 과학과 칸트에게서 발견한 물화된 의식구조를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근원철학에까지 소급시킨다. 이들은 물화된 의식구조의 바탕에 놓여 있는 것을 “도구적 이성”으로 보고, 의식의 물화를 산출하는 메카니즘을 인류사의 인간학적 토대에, 노동을 통해 자신을 재생산해야 하는 유(類)의 생존형식에 위치시킨다. 이로써 그들은 사유를 재생산 연관으로부터 분리한 것을 부분적으로 철회한다. 도구적 이성은 주체-객체 관계의 개념들로 구상된다. 교환모델에 척도가 되는 주체와 주체 사이의 상호관계는 도구적 이성을 구성하는 데에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다른 한편, 그들은 보편적 화해를 길잡이로서, 자연의 부활을 통한 인간의 해방을 단서로 함으로써 해명될 수 있을 진리의 개념을 암시한다. 도구적 이성에는 결코 내재할 수 없는 규정들을 해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처음부터 도구적인) 이성 전에 있는 이성에 의지해야만 한다. 이렇게 진리를 향한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원초적 이성의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미메시스의 능력을 든다. 그들은 이 능력에 관해 명료하게 파악되지 않은 한 조각의 자연에 대해서처럼 말할 수 밖에 없는데, 그들이 세워야 하는 미메시스 이론은 그들의 개념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도구적 이성비판은 미메시스라는, 유태-기독교의 신비주의적 이미지같은 암호화된 귀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계몽의 변증법』은 역설적 사건이다. 그것은 이성의 자기비판에 진리의 길을 제시하며, 동시에 “이 완성된 소외의 단계에서도 아직 진리의 이념에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위대한 철학적 전통의 굴절된 계승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이 토의적 사고를 포기하고 “자연에 대한 추념”으로 철학을 퇴행시킨 대가는 1930년대 초 이들이 비판적 사회이론을 등장시키면서 표방했던 “유물론적 학제간 연구”, 곧 사회과학과의 연결을 포기함으로써 치루게 되는 이론적 목표의 상실이다. 나는 초기 비판이론의 이러한 좌절이 이런저런 우연 때문이 아니라 의식철학의 패러다임 소진 때문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나는 의사소통이론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도구적 이성 비판과 함께 중단된 계획으로의 복귀를 허용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이 전환은 비판적 사회이론의 방치된 과제들을 다시 수용할 수 있게 한다. 노정된 의식철학의 한계에 관해, 이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게는 이런 한계를 넘어서는 동기들이 있었다. 도구적 이성비판의 최전선에서도 그들은 역시 화해의 이념에 따르지만 이 이념의 해명을 포기한다. 부정의 변증법으로 개념화되는 도구적 이성의 비판은 이론의 수단을 가지고 작업하면서도, 자신의 이론적 타당성 주장을 부인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형이상학으로의 퇴락에 대한 두려움은 근대 주체철학의 지평에서 움직이는 한에서만 적절한 것이다. 그들은 주관적 이성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관한 세부적 분석 없이 관념론적 인식론과 자연주의적 행위이론의 기본생각들을 결합하는 식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
아도르노가 화해의 이념으로 제시하는 미메시스의 능력은 바로 의사소통행위로의 동기를 유발한다. 왜냐하면 미메시스의 성취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편입될 때 비로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메시스적 능력은 인지적-도구적으로 규정된 주체-객체 관계의 개념틀을 벗어나기 때문에, 그것은 이성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으로, 충동으로 여겨진다. 아도르노는 이것의 인지적 기능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미학이론에서 그는 예술작품이 미메시스의 해명적 힘에 어떤 점을 빚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그러나 미메시스적 성취의 합리적 핵심은 우리가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을―즉, 객체들을 표상하고 그것들을 가지고 열심히 작업하는 주체를―버리고 언어철학의 패러다임을―즉, 상호주관적 이해 내지는 의사소통의 패러다임을―택할 때, 그리고 인지적-도구적 부분 측면을 포괄적인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편입시킬 때 비로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긍정은 한편으론 아도르노가 묵시적으로 의사소통적 자유의 개념을 제시한 점에서도 보강된다. 미드와 마찬가지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개인화가 사회화의 길을 거쳐서만 가능하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개인의 해방”은 결코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아니고, “사회가 원자화로부터 구원되는 것”, 즉 “집단화와 대중문화의 시기에 최고조에 이를 수 있는” 주체들의 개별화로부터 구원되는 것이라는 견해이다.
의사소통적 이성을 통해 규정된 주체성은 주체가 자기보존을 위해 자신을 탈자연화하는 것에 저항한다. 의사소통적 이성은 도구적 이성과 달리 맹목화된 자기보존에 저항 없이 포섭되지는 않는다. 의사소통적 이성은 표상하고 행위하면서 객체들과 관련을 맺는 자기보존적 주체나 혹은 환경에 대해 경계를 설정하는 자기유지적 체계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소속원들의 해석성과들을 통해 구성되고 의사소통적 행위를 통해서만 재생산되는 상징적으로 구조화된 생활세계에 관계된다. 화해와 자유의 유토피아적 관점은 개인들의 의사소통적인 사회관계 속에 들어있다. 그것은 인류의 언어적 재생산메카니즘 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물화의 문제는 절대화된 목적 합리성, 야만적으로 된 도구적 이성이 자기보존을 위해 봉사하는 데에서 비롯되기보다는, 고삐 풀린 기능주의적 체계보존의 이성이 의사소통적 사회관계 속에 들어있는 이성의 요구를 물리쳐버리고 생활세계의 합리화를 공전하게 만드는 것에서 비롯된다.
루카치에서 아도르노에 이르는 베버의 합리화이론의 수용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사회합리화는 계속 의식의 물화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이런 파악이 봉착하게 되는 역설들은 이 주제를 의식철학의 개념적 수단으로는 만족스럽게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화의 문제를 다시 잡아서 한편으로 의사소통행위의 개념들로, 다른 한편으로 조절 매체들을 통하여 진행되는 체계형성의 개념들로 새롭게 제시하기 전에, 나는 V장에서 이 기본 개념들을 이론사의 맥락에서 전개한다. 합리화 내지 물화의 문제가 칸트와 헤겔에 의해 규정되고 맑스에서 베버를 거쳐 루카치와 비판이론에 이르는 “독일적인” 사회이론적 사고의 노선에 자리하고 있다면, 내가 중시하는 패러다임 전환은 미드(G. H. Mead)와 뒤르켐(E. Durkeim)에서 시작된다. 미드(1863~1931)와 뒤르켐(1858~1917)은 베버(1864~1920)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학의 창시자 세대에 속한다. 두 사람은 베버의 합리화이론을 수용하면서도 의식철학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기본 개념들을 발전시킨다. 미드는 사회학에 의사소통적 기초를 놓음으로써, 뒤르켐은 사회통합과 체계통합을 서로 관련시키는 사회적 연대이론을 통해서 말이다.
2013.04.11.木 : 구일섭이 하버마스에게
훌륭한 통찰이 담긴 좋은 얘기 잘 들었다. 정당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사회적 합리화를 생활세계에서 찾으려는 당신의 노고는 어떻게 보면 상식적인 발상 같은데, 근래 한국의 상황은 이런 상식과 한참 어긋날 뿐만 아니라, 어느 때 보다 고조된 전쟁의 위기감은 당혹스럽다. 재벌 세습과 정권의 인준된 세습도 그렇지만, 스스로를 인질로 삼을 뿐만 아니라 동족의 삶을 파탄시키는 것을 무릅쓰고서라도―그 아무리 험악한 정치적 수사일지라도― 자위권을 연출하는 양상에는 세계가 놀라워 하며 주시하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바처럼,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 보다는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더 강한 야만성이 한반도에서 표출되고 있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이 이 책에서 다루는 논의는 어떻게 보면 체제 경쟁의 한참 후방에서 일어난 한가한 담론으로 비춰 보일 수 있다. 당신 스스로도 이 책을 비롯해, 다른 여러 저작을 통해서 다양한 논점에서 논쟁을 불러 일으켰듯이 말이다. 그러나 지성은 비관하더라도 의지는 낙관하자는 흔한 좌우명처럼 언어적 유토피아에 대한 당신의 염원은 어렵고 불안정한 시대를 견디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내포한다. 겨울의 추위와 시대의 강풍이 몰아치는 4월을 보낸 후 축제의 계절에 『의사소통행위이론2 : 기능주의적 이성비판을 위하여』에 관해 얘기해 보자.
2013.04.15.月 : 하버마스가 구일섭에게
오늘 드디어 영화 <지슬>을 봤다. 1948년 한국의 제주도 해안선 5km 밖에서 마치 미국의 서부침략과 나찌의 유대인 학살을 연상시키는 사건들이 독특한 영상을 통해서 구현됐다. 2003년 한국에서 4.3 사건 관련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고 들었는데, 영상작업을 통해서 다시 이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 사정은 나름 짐작은 된다. 그러나 정권의 변화와 무관하게 이런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하루 빨리 공론화되어 비사가 아닌 역사로 각인되어야 하며, 여기서 추동력은 바로 의사소통행위, 곧 언어적 실천이다. 반가운 5월의 편지를 기다린다.
-끝-
필자소개 : 세기말, 철학과 석사과정 수료 후 현재까지 지역 생협에서 일하고 있다. 석사 학위를 위한 미완의 논문작업을 두 번 했으며, 서평을 비롯한 이런 저런 글을 발표했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이 매체에서 소개한 후 루만의 『사회의 사회』를 읽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