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A.) Vernunft
B. Selbstbewusstsein
텍스트 : G.W.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아카데믹판 h.v. G.J.P.J. Bolland(Leiden A.H. Adriani, 1907)
A.Bewusstsein
I.Die sinnliche Gewissheit oder das Dieses und das Meinen
II.Die Wahrnehmung oder das Ding und die Täuschung
III.Kraft und Verstand, Erscheinung und uebersinnliche Welt S.117-
B. Selbstbewusstsein
IV.Die Wahrheit der Gewissheit seiner Selbst
a.Selbstständigkeit und Unselbstständigkeit des Selbstbewusstseins ; Herrschaft und Knechtschaft S.151-
b.Freiheit des Selbstbewusstseins ; Stoicismus, Skepticismus und das unglückliche Bewusstsein S.164-
C.(AA.) Vernunft
V.Gewissheit und Wahrheit der Vernunft S.194-
(A)Beobachtende Vernunft S.205-
a. Beobachtung der Natur S.207-
b. Die Beobachtung des Selbstbewusstseins in seiner Reinheit und seiner Beziehung auf äussere Wirklichkeit; logische und psychologische Gesetze. S.258-
c. Beobachtung der Beziekung des Selbstbewusstseins auf seine unmittelbare Wirklichkeit; Physiognomik und Schädellehre. S.265-
*게시된 번역과 해설은 AI를 바탕으로 제가 수정•편집한 것입니다. 다른 번역이나 해설 제안 적극 환영합니다.
Die psychologische Beobachtung findet kein Gesetz des Verhältnisses des Selbstbewusstseins zu der Wirk-ㅣlichkeit oder der ihm entgegengesetzten Welt und ist durch die Gleichgültigkeit beider gegen einander auf. die eigentümliche Bestimmtheit der realen Individualität zurückgetrieben, welche an und für sich selbst ist, oder den Gegensatz des 'Fürsichseins' und des
'Ansichseins' in ihrer absoluten Vermittlung getilgt enthält. Sie ist der Gegenstand, der jetzt der Beobachtung geworden, oder zu dem sie übergeht.
심리적 관찰은 자기의식과 현실, 혹은 그에 대립하는 세계 사이의 관계에 관한 어떠한 법칙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리고 양자가 서로에 대해 보이는 이러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관찰은 실재적 개별성의 고유한 규정성으로 되돌려진다. 이 개별성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an und für sich selbst)이며, ‘자기-존재(Fürsichsein)’와 ‘즉자-존재(Ansichsein)’의 대립을 자기 안에서 절대적으로 매개하여 소거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제 관찰의 대상이 되었으며, 혹은 관찰이 이 대상으로 이행해 간다.
[이 문단은 ‘관찰하는 이성’—그중에서도 심리적 관찰—의 최종 귀결을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문장. 지금까지 전개된 논증이 어디에 도달했는가를 헤겔 자신이 정리해 주고 있음
(1) 명시적 결론: 심리적 법칙은 성립하지 않는다
문장은 심리적 관찰이 자기의식과 현실의 관계에 관한 법칙을 찾지 못한다고 단정. 이는 아직 못 찾았다는 뜻이 아니라,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임. 앞서 밝혀졌듯, 현실은 개인에게 항상 이중적 의미를 가지며,
개인은 현실을 허용·차단·전도할 자유를 지니기 때문에👉 법칙적 관계는 애초에 성립할 수 없음
(2) “Gleichgültigkeit”의 의미
여기서 무차별성(Gleichgültigkeit)이란 현실이 개인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과 자기의식 사이에 필연적 귀속 관계가 없다는 것을 뜻함. 현실은개인을 규정할 수도, 규정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언제나 개인의 자기 관계 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3) 관찰의 퇴각이자 전진
관찰은 이제 외적 조건, 환경, 보편적 세계에서 물러나
‘실재적 개별성 자체’로 되돌려짐.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퇴각이 아니라, 관찰이 새로운 대상으로 넘어가는 전환임
(4) “실재적 개별성”의 결정적 규정
헤겔은 이제 개별성을 이렇게 규정 : 개별성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며, 그 안에는 Ansichsein / Fürsichsein의 대립이 더 이상 갈라져 있지 않음. 즉, 외적 세계(즉자)와 주관적 의식(대자)의 대립은 👉 이미 개별성 안에서 매개·지양되어 있음. 그래서 세계와 개인, 주어진 것과 행위, 객관과 주관을 다시 갈라 세워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미 시대착오적임
(5) “관찰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관찰하는 이성이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인식했음을 뜻하면서 동시에 다음 단계로의 이행을 알림. 관찰은 더 이상 성격, 환경, 심리적 인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 개별성이 스스로를 실재화하는 운동,
👉 곧 행위(Tat)를 보게 됨
(6) 『정신현상학』 전체 속에서의 자리
이 문단은 정확히 말해 ‘관찰하는 이성’의 종언이자 ‘행동하는 이성’의 서두에 해당함. 이제 헤겔은 인간의 진리는 그가 무엇인지를 설명받는 데 있지 않고, 그가 무엇을 행하는지에 있음. 다음 절에서 등장하는 Tat, Zweck, Verantwortlichkeit는 이 결론의 직접적 전개임]
상동 265-266
Das Individuum ist an und für sich selbst. Es ist 'für sich', , oder es ist ein freies Tun; es ist aber auch 'an sich', oder es selbst hat ein ursprüngliches bestimmtes Sein, — eine Bestimmtheit, welche dem Begriffe nach dasselbe ist, was die Psychologie ausser ihm finden wollte. 'An ihm selbst' tritt also der
Gegensatz hervor, dieses Gedoppelte, Bewegung des Bewusstseins und das feste Sein einer erscheinenden Wirklichkeit, zu sein, einer solchen, welche an ihm unmittelbar 'die seinige' ist. Dieses Sein, der 'Leib' der bestimmten Individualität, ist die Ursprünglichkeit derselben, ihr Nichtgetanhaben. Aber indem das Individuum zugleich nur ist, was es getan hat, ist sein Leib auch der von ihm 'hervorgebrachte' Ausdruck seiner selbst, — zugleich ein 'Zeichen', welches nicht unmittelbare Sache geblieben, sondern woran es nur zu erkennen giebt, was es in dem Sinne ist, dass es seine ursprüngliche Natur ins Werk richtet.
개인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an und für sich selbst). 그는 대자적(for itself)이며, 다시 말해 자유로운 행위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즉자적(an sich)이기도 한데, 다시 말해 그 자신이 하나의 원초적이고 규정된 존재를 지니고 있다. 이 규정성은 개념상 심리학이 개인 외부에서 찾고자 했던 바로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 자신 안에서, 한편으로는 의식의 운동으로 존재하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현현하는 현실로서의 고정된 존재로 있는 것, 곧 즉각적으로 ‘그 자신의 것’인 그러한 현실로 있는 것이라는 이 대립, 이 중복성이 드러난다. 이 존재, 곧 규정된 개별성의 ‘신체(Leib)’는 그 개별성의 원초성이며, 그 자신의 ‘행해지지 않은 (Nichtgetanhaben)’이다. 그러나 개인은 동시에 오직 자기가 행한 것일 뿐이므로, 그의 신체는 또한 그 자신이 산출해 낸 자기 자신의 표현이며, 동시에 더 이상 단순한 사물로 머무르지 않는 하나의 ‘기호(Zeichen)’이다. 이 기호를 통해 그는, 자기 자신의 원초적 자연을 작동히키는 방식 속에서 자신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한다.
[이 문단은 ‘실재적 개별성’이 무엇인가를 가장 정밀하게 규정하는 대목으로, 바로 앞의 결론을 존재–행위–신체(Leib)의 관계 속에서 다시 한 번 심화함
(1) an und für sich selbst의 구체화
문단의 출발점은 선언적임 : Das Individuum ist an und für sich selbst.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말이 추상적 종합이 아니라는 점임
* für sich → 자유로운 의식, 행위, 자기결정
* an sich → 주어진 규정성, 원초적 성격, ‘자연’
헤겔은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개인 자신 안에서 동시에 성립하는 것으로 규정
(2) 심리학 비판의 결정적 전복
중요한 문장이 여기에 있음 : 그 규정성은 개념상 심리학이 개인 밖에서 찾고자 했던 바로 그것임. 즉, 심리학은 성격·기질·능력을 👉 개인 밖의 원인(환경, 자연, 체질)으로 설명하려 했지만, 헤겔은 👉 그 ‘원인’은 이미 개인 안에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행위 속에서만 현실적이라는 것.
(3) 개인 내부의 ‘대립’
그래서 개인 안에는 다음의 긴장 구조가 있음
* 의식의 운동 : 자유, 기획, 반성, 목적
* 고정된 현존으로서의 현실 : 이미 그러한 것처럼 보이는 자기 자신
이 둘은서로 다른 두 존재가 아니라, 한 개인 안에서 드러나는 이중성임
(4) ‘Leib’의 결정적 의미
여기서 Leib(신체)가 등장. 신체는 단순한 생물학적 몸이 아니라, 개별성의 ‘원초성’, ‘이미 그러한 것’임. 그래서 헤겔은 Nichtgetanhaben→ 아직 내가 만들어내지 않은 나라고 말함. 이는 출발점, 재료, 가능성의 영역임
(5) 그러나: 신체는 동시에 ‘산출물’
문단의 후반부에서 논증은 전도됨 : 개인은 오직 자기가 행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신체는 단순히 주어진 자연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통해 표현된 자기 자신이 됨. 여기서 신체는 사물(Ding)이 아니라, 기호(Zeichen)임. 즉, 그 사람의 걸음, 태도, 말투, 행동의 방식 자체가👉 그 사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표상이 됨
(6)이 문단의 결정적 의의
이 문단에서 헤겔은 다음을 동시에 성취
1. 심리학적 환원(내면 원인 설명)을 원천적으로 무력화하고
2. 개인을 자유로운 행위자로만 이해하는 공허한 자유주의도 거부하며
3. 개별성을👉 행위 속에서 자기 자연을 실현하는 통일체로 파악
이로써 다음 문장은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됨 : 개인의 진리는 성격도, 환경도, 심리 상태도 아니라 그의 행위다.
다음 문단에서는 이 신체 = 표현된 행위라는 통찰이
어떻게 책임, 귀속(Zurechnung), 윤리적 평가로 이어지는지가 전개됨]
상동 266
Betrachten wir die hier vorhandenen Momente in Beziehung auf die vorhergehende Ansicht, so ist hier eine allgemeine menschliche Gestalt, oder wenigstens die allgemeine eines Klimas, Weltteils, eines Volks, wie vorhin dieselben allgemeinen Sitten und Bildung.
Hierzu kommen die besonderen Umstände und Lage innerhalb der allgemeinen Wirklichkeit; hier ist diese besondere Wirklichkeit als besondere Formation derㅣ
Gestalt des Individuums. - Auf der anderen Seite, wie vorhin das freie Tun des Individuums und die Wirklichkeit als die 'seinige' gegen die vorhandene gesetzt war, steht hier die Gestalt, als Ausdruck
'seiner' durch es selbst gesetzten Verwirklichung, die Züge und Formen seines selbsttätigen Wesens.
여기 존재하는 여러 계기들을 앞선 관점과의 관계에서 살펴보면, 여기에는 하나의 보편적인 인간적 형상, 혹은 적어도 어떤 기후, 세계 지역, 민족에 공통적인 보편적 형상이 있으며, 이는 앞에서 보았던 동일한 보편적 인륜과 교양에 상응한다. 여기에 더해, 이러한 보편적 현실 내부에서의 특수한 사정과 처지가 결합된다. 이로써 이 특수한 현실은 개인의 형상이라는 특수한 형성태로서 존재한다. 한편 다른 측면에서 보면, 앞서 자유로운 개인의 행위와 그 행위에 의해 ‘자기 자신의 것’이 된 현실이 주어진 현실에 맞서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형상이 개인이 스스로 정립한 자신의 실현의 표현으로서 나타나며, 그것의 윤곽과 형태들은 개인의 자기활동적인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문장은 앞선 논의와 대비시키면서 개별 인간의 ‘형상(Gestalt)’이 어떻게 일반성과 개별성, 주어진 것과 스스로 산출한 것의 긴장 속에서 이해되는가를 정리하는 대목
1. 앞선 관점과의 대응
앞의 논의에서는
일반적인 것 : 한 사회, 민족, 시대에 공통적인 풍속(Sitten)과 교양(Bildung)
개별적인 것 : 그 안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행위하고, 그 결과로 생긴 현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는 방식
이 두 층위가 대비되어 있었음
2. 여기서 새롭게 강조되는 일반성
이제 헤겔은 이를 ‘형상(Gestalt)’의 차원에서 다시 봄
먼저 일반적인 인간 형상이 있음. 이는 추상적 ‘인간 일반’일 수도 있고, 최소한 특정 기후, 대륙, 민족이 공유하는 인간 유형일 수도 있음 → 앞서 말한 일반적인 풍속과 교양이, 이제는 신체적·표현적 형상으로까지 확장
3. 개별적 조건과 구체적 현실
여기에 더해, 개인이 처한 특수한 상황, 환경, 사회적 위치가 결합됨. 그 결과, 일반적 인간 형상은 이 개인만의 특수한 형상, 즉 구체적으로 형성된 현실적 개체가 됨. 이때 개별적 현실은 우연한 외피가 아니라, “특정한 형상으로 조직된 현실”로 파악됨
4. 형상의 다른 한 측면: 자기 정립
동시에, 이 형상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님. 앞에서는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가 주어진 현실에 맞서는 ‘자기 자신의 현실’로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형상 자체가
개인이 스스로 설정하고 실현한 자기 자신의 표현으로 이해됨. 즉, 얼굴, 몸, 태도, 표현 등은 단순한 자연적 표지가 아니라 자기 활동성(selbsttätiges Wesen),
곧 개인의 내적 본성이 외적으로 응결된 흔적임
5. 핵심 요약
이 문단의 요지는 다음과 같음
인간의 형상은 일반적 인간·민족·시대의 규정과 개인의 특수한 상황, 개인이 스스로 산출한 자유로운 자기실현, 이 세 가지가 겹쳐진 결과임. 따라서 형상은 단순한 자연적 외양도, 순전히 주관적 산물도 아니라, 정신이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객관화한 표현]
상동 266-267
Aber die so wohl allgemeine als besondere Wirklichkeit, welche die Beobachtung vorhin ausser dem Individuum vorfand, ist hier die Wirklichkeit desselben, sein angeborener Leib, und in eben diesen fällt der Ausdruck, der seinem Tun angehört. In der psychologischen Betrachtung sollte die an und für sich seiende Wirklichkeit und die bestimmte Individualität auf einander bezogen werden; hier aber ist die 'ganze' bestimmte
'Individualität' Gegenstand der Beobachtung und jede Seite seines Gegensatzes ist selbst dieses Ganze.
그런데 앞서 관찰이 개인 바깥에서 발견했던 보편적이면서도 또한 특수한 현실은, 여기에서는 바로 그 개인 자신의 현실, 즉 그의 타고난 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몸 안으로, 그의 행위에 속하는 표현이 떨어져 들어간다. 심리학적 고찰에서는 즉대자적으로 존재하는 현실과 규정된 개별성이 서로 연관되어야 할 것이었으나, 여기서는 ‘전체로서의 규정된 개별성’이 관찰의 대상이며, 그 대립의 각 측면 자체가 이미 이 전체이다.
[바로 앞 문단과 논의를 결정적으로 전환시키는 문장
(1) “개인 바깥의 현실” → “개인의 현실 그 자체”
앞서 관찰하는 이성은 사회적 제도, 풍속, 객관적 상황 등을 개인 외부의 현실로서 파악했음. 그러나 이 단계(관상학/두상학적 관찰로 넘어가는 문맥)에서는 상황이 바뀌는데, 보편적이면서 특수한 현실은 더 이상 밖에 있지 않고 개인의 ‘타고난 몸(angeborener Leib)그 자체가 됨. 즉 사회적·역사적 현실 전체가 개인 내부, 정확히는 개인의 신체적 형상안으로 수축됨.이것이 바로 이 단락의 급진성입니다.
(2) 행위의 표현이 “몸에 떨어진다”
“그의 행위에 속하는 표현이 바로 이 몸 안으로 떨어진다”는 말은 매우 중요. 이는 행위(Tun)가 더 이상 외적 결과로만, 사회적 효과로만 판단되지 않고, 그 의미와 진리가 이미 신체적 형상에 새겨져 있다고 여겨짐. 이는 바로 관상학·두상학이 주장하는 사고방식으로서 성격과 행위의 진리는 얼굴, 머리, 체형에 나타난다는 것.헤겔은 지금 이를 기술(deskriptiv)하고 있을 뿐, 아직 비판을 본격화하지는 않음
(3) 심리학적 관찰과의 차이
헤겔은 여기서 심리학적 고찰과 명확히 대비하는데, 심리학에서는 ‘즉자적으로 있는 현실’(자연·환경·객관적 조건)과 ‘규정된 개별성’(성격, 욕구, 성향)이 서로 관련지어져야 할 두 항임. 즉, 둘은 구분되며, 관계 맺음이 문제임
(4) 여기서의 관찰: “전체 대 전체”
그러나 여기서는 다름. 관찰의 대상은 부분적 성향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규정된 개인’임. 그리고 놀랍게도,그가 자연적 존재라는 측면과 그가 자유로운 개별자라는 측면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각각이 이미 전체 개인 전체를 대표함. 이 말은 곧,
신체 = 개인의 본질 전체
개인의 내적 성격 = 개인의 본질 전체
라고 여겨진다는 뜻임. 이 점이 이후 헤겔의 결정적 비판 지점이 됨
(5) 이 문단의 철학적 위치
이 문장은 『정신현상학』에서 심리학적 설명 → 관상학·두상학적 동일화로 이행하는 결절점임. 헤겔은 여기서 관찰적 이성이 차이를 유지하며 매개하던 관계를 버리고, 전체를 즉각적으로 동일화하려는 사고의 조급함과 오류를 보여주고 있음. 곧이어 나오는 비판에서 그는 자유로운 정신을 단단한 뼈 한 조각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성의 자기모독이라고 말함. 다음으로 이어서 보면 특히 중요한 것은 “각각의 측면이 그 자체로 전체”라는 주장에 대한 해체, 그리고 왜 그것이 필연적으로 우연성과 폭력적 판단을 낳는지에 대한 것]
상동 267
Zu dem äusseren Ganzen gehört also nicht nur das ursprüngliche Sein, der angeborene Leib, sondern ebenso die Formation desselben, die der Tätigkeit des Inneren angehört; er ist Einheit des ungebildeten und des gebildeten Seins und die von dem Fürsichsein durchdrungene Wirklichkeit des Individuums. Dieses Ganze, welches die bestimmten ursprünglichen festen Teile und die Züge, die allein durch das Tun entstehen, in sich fasst, 'ist', und dieses 'Sein' ist 'Ausdruck' des Inneren, des als Bewusstsein und Bewegung gesetzten Individuums. — Dieses 'Innere' ist ebenso nicht mehr die formale, inhaltlose oder unbestimmte Selbsttätig-keit, deren Inhalt und Bestimmtheit, wie vorhin, in den äusseren Umständen läge, sondern es ist ein an sich bestimmter ursprünglicher Charakter, dessen Form nur die Tätigkeit ist. Zwischen diesen beiden Seiten also wird hier das Verhältnis betrachtet, wie es zu bestimmen und was unter diesem 'Aus-ㅣdrucke' des Inneren im Æusseren zu verstehen ist.
그러므로 외적인 전체에 속하는 것은 단지 최초의 존재, 곧 타고난 몸만이 아니라, 그 몸의 형성 역시 포함되는데, 이 형성은 내적인 것의 활동에 속한다. 이 몸은 미형성된 존재와 형성된 존재의 통일이며, 대자적 존재에 의해 관철된 개인의 현실성이다. 이러한 전체, 곧 규정된 최초의 고정된 부분들과 오직 행위를 통해서만 생겨나는 특징들 모두를 포괄하는 이 전체는 ‘존재’하며,이 ‘존재’는 의식과 운동으로 설정된 개인, 즉 내적인 것의 ‘표현’이다. 이 ‘내적인 것’은 또한 더 이상 형식적이고 내용 없거나 불확정적인 자기활동성이 아니다. 곧 그 내용과 규정성이, 앞서처럼, 외적 사정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규정된 최초의 성격이며, 그 형식이 곧 활동인 그러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두 측면 사이의 관계, 즉 이 관계를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지, 그리고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표현’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문제로 다루어진다.
[이 문단은 바로 앞에서 설정된 틀을 개념적으로 단단히 봉합하는 부분
(1) “외적인 전체”의 확장
앞 문단에서는 외적 현실 = 타고난 몸(angeborener Leib)으로 급격히 수축되었음. 그러나 헤겔은 즉시 이를 보완·확대함. 즉 외적 전체란 원초적 존재로서의 타고난 몸 뿐 아니라 그 몸이 활동에 의해 형성(Formation)된 결과까지 포함함. 즉 외적 전체 = 자연 + 역사 = 주어진 것 + 만들어진 것임
(2) “미형성된 존재와 형성된 존재의 통일”
이 문장은 매우 핵심적임
* 미형성된 존재: 자연적으로 주어진 신체
* 형성된 존재: 활동을 통해 각인된 습관, 태도, 표현
개인은 이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이 둘의 통일로서만 실재함. 그리고 이 통일은 대자적 존재(Fürsichsein)—즉 자기의식과 자유—에 의해 관철된 현실임
(3) 외적 전체 = 표현으로서의 존재
헤겔은 결정적 규정을 내림. 이 전체는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으로서 존재’임. 여기서 존재(Sein)는 중립적 사실이 아니라, 내적인 것(의식·운동·자기활동성)이 외화된 현존임. 즉, 개인의 신체적·표현적 총체는 그 사람의 내적 삶이 객관적 현실로 나타난 방식임
(4) 내적인 것의 재규정
이 문단 후반부는 특히 중요. 이제 “내적인 것”은 더 이상 내용 없는 형식적 자기활동성이나 외적 조건에 의해 내용이 채워지는 공허한 가능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체로 이미 규정된, 원초적 성격(ursprünglicher Charakter)임. 다만, 이 성격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활동(Tätigkeit)이라는 형식으로만 나타남
👉 형식 = 활동
👉 내용 = 원초적 성격
이 구분은 이후 자유와 필연의 긴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임
(5) 문제 설정: ‘표현’의 의미
마지막 문장은 명확한 문제 제기임
*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는 무엇인가?
*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말은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질문은 곧 관상학·두상학이 주장하는 직선적 표지 관계가 정당한지에 대한 문제 제기이며, 다음 문단에서 헤겔이 수행할 비판의 무대 설정임
(6)철학적 요지 (압축)
개인의 신체적·표현적 전체는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과 자유로운 활동이 통일된 결과이며, 그 존재 자체가 이미 내적 의식의 표현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표현 관계를 성급하게 고정된 표지 관계로 동일시해서는 안됨. 다음 문단에서 헤겔은 이 ‘표현’이 왜 투명한 번역이 될 수 없는지, 그리고 관찰하는 이성이 왜 여기서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지는지를 본격적으로 전개]
상동 267-268
Dieses Aeussere macht zuerst nicht als 'Organ' das Innere sichtbar oder überhaupt zu einem Sein für Anderes, denn das Innere, insofern es in dem Organe ist, ist es die "Tätigkeit' selbst. Der sprechende Mund, die arbeitende Hand, wenn man will auch noch die Beine dazu, sind die verwirklichenden und vollbringenden Organe, welche das Tun als "Tun', , oder das Innere als solches an ihnen haben; die Æusserlichkeit aber, welche es durch sie gewinnt, ist die Tat, als eine von dem Individuum abgetrennte Wirklichkeit.
Sprache und Arbeit sind Ausserungen, worin das Individuum nicht mehr an ihm selbst sich behält und besitzt, sondern das Innere ganz ausser sich kommen lässt und dasselbe Anderem preisgiebt. Man kann darum ebensosehr sagen, dass diese Ausserungen das Innere zu sehr, als dass sie es zu wenig ausdrücken; — zu sehr: weil das Innere selbst in ihnen ausbricht, bleibt kein Gegensatz zwischen ihnen und diesem, sie geben nicht nur einen 'Ausdruck' des Inneren, sondern es selbst unmittelbar; — zu wenig: weil das Innere in Sprache und Handlung sich zu einem Anderen macht, giebt es sich damit dem Elemente der Verwandlung preis, welches das gesprochene Wort und die vollbrachte Tat verkehrt und etwas anderes daraus macht, als sie an and für sich als Handlungen dieses bestimmten Individuums sind. Nicht nur verlieren die Werke der Handlungen durch diese Æusserlichkeit von dem Einwirken Anderer den Charakter, etwas Bleibendes gegen andere Individualitäten zu sein, sondern indem sie sich zum Inneren, das sie enthalten, als abgesondertes gleichgültiges Æusseres verhalten, können sie als Inneres durch das Individuum selbst ein Anderes sein als sie erscheinen, — entweder dassㅣes sie mit Absicht für die Erscheinung zu etwas Anderem macht als sie in Wahrheit sind, oder dass es zu ungeschickt ist, sich die Aussenseite zu geben, die es eigentlich wollte und sie so zu befestigen, dass ihm von Anderen sein Werk nicht verkehrt werden kann. Das Tun also, als vollbrachtes Werk, hat die doppelte entgegengesetzte Bedeutung, entweder die innere Individualität und nicht ihr Ausdruck, oder als Æusse-res eine von dem Inneren freie Wirklichkeit zu sein, welche ganz etwas Anderes ist als jenes. - Um dieser Zweideutigkeit willen müssen wir uns nach dem Inneren umsehen, wie es nóch, aber sichtbar oder äusserlich, an dem Individuum selbst ist. Im Organe aber ist es nur als unmittelbares Tun selbst, das seine Ausserlichkeit an der Tat erlangt, die entweder das Innere vorstellt oder auch nicht. Das Organ nach diesem Gegensatze betrachtet gewährt also nicht den Ausdruck, der gesucht wird.
이러한 외적인 것은 먼저 ‘기관(Organ)’으로서 내적인 것을 가시적으로 만들거나, 일반적으로 그것을 타자에게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적인 것은, 그것이 기관에 있는 한에서 바로 그 ‘활동(Tätigkeit)’ 자체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입, 일하는 손, 원한다면 다리까지 포함하여, 이들은 [행위를] 현실화하고 완수하는 기관들이며, 그 안에 ‘행위로서의 행위’, 혹은 내적인 것을 그 자체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통해 얻게 되는 외적 성질은 개인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현실로서의 '행위'[즉 ‘행적(Tat)’]이다. 언어와 노동은 개인이 더 이상 자기 자신 안에 자신을 보존하고 소유하지 않고, 내적인 것을 전적으로 자기 밖으로 내보내어 그것을 타자에게 넘겨주는 외화들이다. 그러므로 이 외화들은 내적인 것을 너무 적게 표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많이 표현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너무 많이 표현한다는 것은, 내적인 것이 그 안에서 [직접] 터져 나오기 때문에 그들과 내적인 것 사이에 더 이상 대립이 없고, 단지 내적인 것의 ‘표현’을 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곧 그것 자체를 직접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내적인 것을 너무 적게 표현한다. 왜냐하면 내적인 것이 언어와 행위 속에서 하나의 타자로 되어버림으로써, 말해진 말과 완수된 행위를 뒤바꾸고 그것들을, 이 특정한 개인의 행위로서 그것들이 즉자적으로 있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변형의 요소에 자신을 내맡기기 때문이다. 행위의 작품들은 이러한 외화성 때문에 타인의 영향에 의해, 다른 개별성들에 맞서 지속적인 어떤 것으로서 지니고 있는 성격을 잃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들 자신이 담고 있는 내적인 것과 분리되고 무관한 외적인 것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그 내적인 것은 개인 자신에 의해서도 그것들이 [본래적으로] 나타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즉 개인이 의도적으로 그것들을 현상에 있어서 진실과는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거나, 혹은 자신이 실제로 원했던 외면을 부여하기에 너무 서툴러서, 타인에 의해 자신의 작품이 왜곡되지 않도록 그것을 고정시키는[ 데 실패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따라서 행위는, 완수된 작품으로서, 상반된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즉 그것이 내적 개별성 [그 자체]이지 그 표현이 아닐 수도 있고, 혹은 내적인 것으로부터 해방된 하나의 외적 현실로서 전혀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애매성 때문에 우리는 내적인 것을, 아직도 그러나 가시적이고 외적인 방식으로 개인 자신에게 속해 있는 곳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기관에서는 그것은 오직 즉각적인 활동 자체로 있으며, 그 외적 존재는 내적인 것을 나타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행위 속에서 획득된다. 이런 대립에 따라 고찰된 기관은 우리가 찾고 있는 그런 ‘표현’을 제공하지 못한다.
[이 단락은 관상학·두상학 비판에서 결정적인 논증 구간
(1) 기관은 ‘표현 기관’이 아니다
헤겔의 첫 결론은 분명함. 입, 손, 다리 같은 기관(Organ)은 내적인 것을 표현하는 매개물이 아님. 왜냐하면 내적인 것은 기관 “속에 들어 있는 내용”이 아니라 기관을 통해 이루어지는 활동 그 자체이기 때문. 즉,
기관은 기호가 아니라 실행이다.
(2) 기관 → 행위 → 행적(Tat)
중요한 구분이 등장
* 기관 안: 내적인 것 = 살아 있는 활동(Tätigkeit)
* 기관을 떠난 결과: 행위는 하나의 완결된 행적(Tat)이 되어 개인으로부터 분리된 현실이 됨
이 순간부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은 갈라지기 시작(3) 언어와 노동의 역설
언어와 노동은 내적인 것을 가장 철저히 드러내는 동시에, 가장 철저히 소외시키는 방식임
① “너무 많이 표현한다”
* 내적인 것이 그 안에서 직접 폭발하므로 더 이상 ‘표현 ↔ 본질’의 간극이 없음. 그래서 말과 행위는 내적인 것 자체처럼 보임
② “너무 적게 표현한다”
그러나 동시에, 말과 행위는 타자에게 해석되고, 왜곡되고, 변형됨. 그 결과, 그것들은 더 이상이 개인의 이 행위”로 머무르지 않음
(4) 소외는 타인에게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헤겔의 논증은 여기서 더 날카로워지는데, 왜곡은 타인에 의해서만 생기지 않음. 개인 자신도 의도적으로 자신을 다르게 보이게 하거나, 표현 능력의 부족으로 진정한 내면을 고정하지 못할 수 있음
👉 따라서 행위의 결과는 개인에게조차 자신의 진리일 필요가 없음
(5) 행위의 이중적 의미
그래서 완수된 행위는 항상 이중적인데, 내적 개별성 그 자체일 수도 있고 내적인 것과 무관한 외적 사실일 수도 있음. 이 이중성 때문에, 행위나 기관을 통해서는
안정적이고 필연적인 ‘표현 관계’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헤겔의 결론임
(6)이 단락의 결정적 의미
이 문단에서 헤겔은 다음을 논증함
🔴 행위·언어·기관은 내면의 진리를 보증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외화가 곧바로 소외이며, 표현은 필연적으로 변형을 포함하기 때문. 따라서 관찰하는 이성이 원하던 것, 즉 “내적인 성격이 외적으로 안정적으로 드러나는 표지”는 👉 기관에서도, 행위에서도 발견되지 않음. 이제 다음 단계는 필연적임. 관찰하는 이성은 기관보다 더 ‘고정된 것’, 즉 뼈·두개골로 이동하게 됨.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헤겔의 가장 통렬한 풍자가 등장]
상동 268-269
Wenn nun die äussere Gestalt nur, insofern sie nicht Organ oder nicht Tun, hiermit als ruhendes Ganzes ist, die innere Individualität ausdrücken könnte, so verhielte sie sich also als ein bestehendes Ding, welches das Innere als ein Fremdes in sein passives Daşein ruhig empfinge und hierdurch das Zeichen desselben würde, — ein äusserer zufälliger Ausdruck, dessen 'wirkliche' Seite für sich bedeutungslos, — eine Sprache, deren Töne und Tonverbindungen nicht die Sache selbst, sondern durch die freie Willkür mit ihr verknüpft und zufällig für sie sind.
만약 이제 외적인 형상이 기관도 아니고 행위도 아닌 한에서만, 다시 말해 정지된 전체로서 있을 때에만 내적인 개별성을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 외적 형상은 하나의 존속하는 사물처럼 처신하게 될 것이며, 내적인 것을 어떤 낯선 것으로서 자신의 수동적 현존 속에 고요히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의 표지가 될 것이다. 이 경우 그 외적 형상은 우연적인 외적 표현에 불과하고, 그 ‘현실적인’ 측면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한 것이며, 그것은 마치 소리들과 음의 결합들이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자유로운 임의성에 의해 그 사물과 결합되어 우연적으로 그것을 가리키는 언어와 같다.
[ 이 대목에서 헤겔은 관상학·두상학의 논리적 전제 자체를 해체하고 있음
(1) 전제의 가정: “정지된 외형만이 표현한다면”
앞 단락에서 기관(입, 손), 행위(말하기, 노동)가 모두 표현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이제 관찰하는 이성은
마지막 가능성으로 다음을 가정 : 외적 형상은 활동하지 않을 때, 오히려 ‘가만히 있는 전체’로서 내면을 표현하지 않을까?
바로 여기서 얼굴의 고정된 윤곽, 두개골, 체형이 문제에 등장할 조건이 갖추어짐
(2) 표현 관계의 성격: ‘사물과 표지’
헤겔은 이 가정을 끝까지 밀어붙여 그 논리적 귀결을 드러냄. 이 경우 외형은 능동적 표현이 아니라 수동적 수용체가 됨. 즉, 외형은 내면을 “담고 있는” 그릇, 내면은 그 안에 “들어와 있는” 낯선 내용이 됨. 이렇게 되면 외형과 내면은 외재적으로 결합된 두 개의 사물로 전락
(3) ‘우연적 기호’로의 전락
여기서 헤겔의 비유가 나오는데, 이런 표현 관계는 의미가 소리 자체에 내재하지 않는 임의적 언어 기호와 같음. 즉 얼굴의 윤곽, 두개골의 굴곡은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고, 단지 우연적 약속에 의해 어떤 성격을 가리킨다고 믿게 됨. 이 순간, 관상학·두상학은 자연적 필연성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가장 임의적인 기호 이론을 전제하게 됨
(4) 핵심 비판 포인트
이 문단의 비판은, 관상학은 외형을 필연적 표지라고 주장하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그것은 단지 “의미를 외부에서 덧붙인 우연적 기호”에 불과함.
(5)논증의 요지 (압축)
외형을 정지된 형상으로 간주하여 내면의 진리를 읽어내려는 시도는, 외형을 우연적 기호로 전락시키며, 결국 관상학·두상학은 자신이 주장하는 필연성을 스스로 파괴하게 됨. 이제 다음 단계는 거의 정해져 있음. 이성은 의미 없는 고정된 외형들 중에서도. 가장 단단하고 변하지 않는 것, 즉 뼈와 두개골로 후퇴]
상동 269
Eine solche willkürliche Verbindung von solchen, die ein Æusseres für einander sind, giebt kein Gesetz. Die Physiognomik soll sich aber von anderen schlechten Künsten und heillosen Studien dadurch unterscheiden, dass sie die bestimmte Individualität in dem 'notwen-ㅣdigen' Gegensatze eines Inneren und Ausseren, des Charakters als bewussten Wesens und eben desselben als seiender Gestalt betrachtet, und diese Momente so auf einander bezieht, wie sie durch ihren Begriff auf einander bezogen sind und daher den Inhalt eines Gesetzes ausmachen müssen. In der Astrologie, Chiromantie und dergleichen 'Wissenschaften' hingegen scheint nur Husseres auf Æusseres, irgend etwas auf ein ihm Fremdes bezogen zu sein. 'Diese' Constellation bei der Geburt, und wenn diesem Ausseren näher auf den Leib selbst gerückt wird, 'diese' Züge der Hand sind 'äu-ssere' Momente für das lange oder kurze Leben und das Schicksal des einzelnen Menschen überhaupt. Als Æu-sserlichkeiten verhalten sie sich gleichgültig zu einander und haben nicht die Notwendigkeit für einander, welche in der Beziehung eines Æusseren und Inneren liegen soll.
이와 같은, 서로에게 단지 외적인 것들 사이의 임의적인 결합에서는 어떤 법칙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상학은 다른 저급한 기예들이나 무익한 연구들과는 달리, 의식적 존재로서의 성격이라는 내적인 것과 존재하는 형상으로서의 바로 그 성격이라는 외적인 것 사이의 ‘필연적인’ 대립 속에서 규정된 개별성을 고찰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두 계기를 그것들이 그 개념에 의해 서로 연관되어 있는 그대로 서로 관련짓고자 하며, 따라서 그것들이 하나의 법칙의 내용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점성술, 수상술 및 그와 유사한 ‘학문들’에서는 오직 외적인 것이 외적인 것에, 다시 말해 어떤 것이 그것과 무관한 어떤 것에 연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태어날 때의 ‘이러한’ 별의 배열, 또는 이 외적인 것이 신체에 더 가까이 옮겨질 경우에 ‘이러한’ 손의 선들이 한 개인의 장수나 단명의 운명, 나아가 그의 전체적 운명에 대한 외적인 계기들이 된다. 이러한 외적 요소들은 서로에게 무관하게 관계 맺고 있을 뿐이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에서 성립해야 할 그 필연성을 서로에 대해 갖지 않는다.
[이 문단은 관상학이 스스로 주장하는 ‘과학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점성술·수상술과 어떻게 원칙적으로 구별되려 하는지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 주장 자체가 왜 실패하는지를 준비하는 대목
(1) “임의적 결합에는 법칙이 없다”
첫 문장은 이 단락 전체의 원리적 선언으로서 외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자의적 연결에서는👉 법칙(Gesetz)이 나올 수 없다는 것. 법칙이 되려면, 단순한 반복이나 경험적 연상이 아니라 개념적 필연성이 필요함
(2) 관상학의 자기정당화
여기서 중요한 점은, 헤겔이 관상학의 주장을 직접 서술하고 있다는 것. 관상학은 이렇게 자신을 변호 : 우리는 점성술·수상술 같은 미신이 아니다. 우리는 내적인 것 = 의식적 성격, 외적인 것 = 존재하는 형상 사이의 필연적 대립과 통일을 다룬다.이 둘은 동일한 개념의 서로 다른 계기이므로, 그 관계는 법칙적이어야 한다.
즉, 관상학은 “우리는 외적 징조를 임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에 근거해 내면과 외형의 필연적 관계를 읽어낸다”라고 주장
(3) 점성술·수상술과의 대비
헤겔은 관상학의 자기 주장에 따라, 다른 ‘유사 학문’들과의 차이를 명확히 그림. 점성술·수상술에서는:
* 별의 배열 ↔ 인간의 운명
* 손금 ↔ 생애의 길이
이 연결은 서로 전혀 다른 영역, 서로에게 외적인 것들의 연결일 뿐임. 그래서 이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고 개념적으로 정초되지 않으며 단지 “그렇게 믿어질 뿐”임
(4) 그러나: 이 구별은 과연 성공하는가?
이 문단 자체에서는 헤겔이 아직 직접 비판을 가하지는 않응.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 전체를 보면 기관도, 행위도, 정지된 외형도 모두 표현으로 실패했다면👉 관상학이 주장하는 “내면–외형의 필연적 법칙”은 실제로는 **점성술과 논리적으로 다르지 않게 된다**는 점임. 즉 관상학은 임의성을 비판하면서도 바로 그 임의성 위에 서 있다는 것이 곧 드러나게 됨]
상동 269-270
Die Hand freilich scheint nicht so sehr etwas Au-sseres für das Schicksal zu sein, sondern vielmehr als Inneres zu ihm sich zu verhalten. Denn das Schicksal ist auch wieder nur die Erscheinung dessen, was die bestimmte Individualität 'an sich' als innere ursprüngliche Bestimmtheit ist. Zu wissen nun, was sie an sich ist, dazu kommt der Chiromante wie auch der Physiognomiker auf eine kürzere Weise als z. B. Solon, der erst aus und nach dem Verlaufe des ganzen Lebens dieses wissen zu können erachtete: er betrachtete die Erscheinung, jene aber das Ansich. Dass aber die Hand das Ansich der Individualität in Ansehung ihres Schicksals darstellen muss, ist leicht daraus zu sehen, dass sie nächst dem Organ der Sprache am meisten es ist, wodurch der Mensch sich zur Erscheinung und Verwirklichung bringt. 1)
1) Kai yàp i zeip öpyyd errı pyávo. Aristot, de An 3:8. „Manus enim est organum organorum.“ Thom. Ag. zur Stelle. -
물론 손은 운명에 대해 단순히 외적인 어떤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며, 오히려 운명과 관련하여 하나의 내적인 것으로 관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운명 또한 다시, 규정된 개별성이 그 자체로서(즉자적으로) 지니는 내적·원초적 규정성의 현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러한 개별성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를 아는 데에 있어 수상가는, 그리고 관상학자도 마찬가지로, 예컨대 솔론보다 더 빠른 길에 이르는 셈이다. 솔론은 한 인간의 생의 전 과정이 끝나고 난 뒤에야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현상을 고찰하였다. 반면 저들은 즉자적인 것을 고찰한다. 그러나 손이 개별성의 즉자적 본질을, 특히 그 운명과 관련하여 표상해야 한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손은 언어의 기관 다음으로 인간이 자신을 현현하고 실현하는 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
(각주)
1.“손은 도구 중의 도구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영혼론』 3권 8장. (토마스 아퀴나스도 해당 부분에서 인용함)
[이 단락은 이제 수상술(Chiromantie)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그것이 왜 그럴듯해 보이는지를 인정한 뒤,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내는 부분
(1) 왜 손은 더 그럴듯해 보이는가?
앞에서 점성술은 별 ↔ 운명이라는 완전히 외적인 결합이었음. 그러나 손은 사정이 다른데, 손은 행위의 기관이고, 인간의 현실화 과정에 깊이 관여하며, 언어 다음으로 인간 자기표현의 핵심 기관임.따라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쉬워짐 : 운명이 단지 외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 성격의 전개라면, 그 성격을 가장 많이 실행하는 기관인 손은 그 운명의 ‘즉자적 본질’을 드러내지 않겠는가?
이 논리는 이전 단계보다 훨씬 정교함
(2) 운명의 재정의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있음. 헤겔은 운명을 이렇게 재정의함 : 운명 = 개별성이 그 자체로 지닌 내적 규정의 ‘현상’. 즉 운명은 외부에서 떨어지는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내적 성격의 전개 형식일 뿐임.
그렇다면 성격의 본질을 안다면 운명도 알 수 있어야 함. 이 지점에서 수상술은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3) 솔론과의 대비
헤겔은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솔론을 언급하는데, 솔론의 유명한 통찰 중 하나는 “한 인간의 행복은 그의 생이 끝나기 전에는 말할 수 없다.”는 것. 즉, 인간의 본질은 생 전체가 끝난 뒤, 현상의 총체를 통해서만 판단할 수 있음.
그러나 수상가는 그럴 필요 없이 즉자적 본질을 곧바로 읽어낼 수 있다고 주장. 헤겔은 이 대조를 통해 수상술의 지름길 논리를 드러냄
(4) 아리스토텔레스 인용의 의미
“손은 도구 중의 도구이다.”
이 인용은 수상술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 아님. 오히려 이 단계에서는 수상술이 왜 일정한 철학적 그럴듯함을 갖는지 충분히 인정하고 있음. 손은 단순한 외부 물체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적 목적을 실행하는 기관이며,인간 자유의 확장임. 그래서 손을 근거로 내적 본질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점성술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어 보임
(4)그러나 결정적 문제
지금까지의 전개를 종합하면:
* 점성술: 외적인 것 ↔ 외적인 것 (완전한 임의성)
* 수상술: 내적인 활동과 깊이 연관된 기관을 통한 판단 (부분적 정당성)
하지만 이미 앞 단락에서 서술된 바처럼 기관은 오직 활동 그 자체일 뿐 고정된 기호가 아니며, 행위는 항상 소외되고 왜곡될 수 있음. 따라서 손 역시 활동의 매개이지, 고정된 본질의 정지된 표지가 될 수는 없음
이제 헤겔은 곧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그렇다면 활동하지 않는 가장 고정되고 단단하며 변형되지 않는 것, 👉 뼈(두개골)가 문제로 등장
그리고 그 순간, 이 논의는 가장 유명한 대목, “정신은 뼈이다 (Der Geist ist ein Knochen)”라는 통렬한 장면으로 이어지게 됨. 여기까지가 지금 단락의 철학적 위치이며, 이제 거의 정점에 다다름]
상동 270
Sie ist der beseelte Werk-ㅣmeister seines Glücks; man kann von ihr sagen, sie
"ist' das, was der Mensch 'tut', denn an ihr als dem tätigen Organe seines Sichselbstvollbringens ist er als Beseelender gegenwärtig und indem er ursprünglich sein eigenes Schicksal ist, wird sie also dieses Ansich ausdrücken.
Aus dieser Bestimmung, dass das Organ der Tätigkeit ebensowohl ein Sein als das Tun in ihm ist, oder dass das innere Ansichsein selbst an ihm gegenwärtig und ein Sein für Andere hat, ergiebt sich eine andere Ansicht desselben als die vorherige. Wenn nämlich die Organe überhaupt darum nicht als Ausdrücke des Inneren genommen werden zu können sich zeigten, weil in ihnen das Tun als Tun gegenwärtig, das Tun als Tat aber nur Ausseres ist, und Inneres und Ausseres auf diese Weise auseinanderfallen und fremd gegen einander sind oder sein können, so muss nach der betrachteten Bestimmung das Organ auch wieder als 'Mitte' beider genommen werden 1), indem eben dies, dass das Tun an ihm gegenwärtig ist, zugleich eine Æusserlichkeit desselben ausmacht und zwar eine andere als die Tat ist; jene nämlich bleibt dem Indı-viduum und an ihm.
1) Als Mitte zwischen Welt und Individuum sind die Organe nicht bloss nach der Seite der Tat, sondern auch nach der der Erfahrung zu betrachten; zunächst vermitteln die Sinne zwischen dem Ganzen und dem Einzelnen, indem sie ersteres empfinden, wahrnehmen und vernehmen lassen. Sie verhalten sich dabei wie der Inhalt der Erfahrung selbst; der Begriff unserer Sinne ist der Begriff unserer Erfahrung. (B.)
손은 자신의 행복의 살아 있는 장인이다. 손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손은 인간이 ‘행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손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완수하는 활동적 기관으로서, 그 안에서 인간은 생명을 불어넣는 자로 있기 때문이고 인간이 본래적으로 자신의 운명인 한에서, 손은 이 즉자적 본질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규정, 곧 활동의 기관 그 안에 있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의 존재이기도 하며, 또는 내적인 즉자적 존재가 그 안에 현존하고 타자에게 존재를 갖는다는 규정으로부터 우리는 그 기관에 대한 또 하나의 견해에 이르게 된다. 즉, 만약 기관들이 일반적으로 그 안에 행위가 행위로서 현존하기 때문에 내적인 것의 표현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이 드러났다면, 행위는 행위로서는 단지 외적인 것이며, 이로써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분리되어 서로 낯설게 되거나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이제 고려된 이 규정에 따르면 기관은 다시 양자의 ‘매개(Mitte)’로 간주되어야 한다.1) 왜냐하면 바로 행위가 기관 안에 현존한다는 사실이 동시에 그것의 하나의 외면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외면성은 행위와는 다른 것이다. 즉 그것은 개인에게 남아 있고, 개인 안에 머무는 외면성이다.
1."세계와 개인 사이의 매개로서 기관들은 단지 행위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경험의 측면에서도 고찰되어야 한다. 우선 감각들은 전체와 개별자 사이를 매개하는데전자로 하여금 후자에 의해 감지되고, 지각되며, 인식되도록 한다. 이때 감각들은 경험의 내용 자체처럼 작용한다. 우리의 감각 개념은 곧 우리의 경험 개념이다. (B.)
[이제 논의가 매우 미묘한 지점으로 들어가는데, 수상술을 단순히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가 왜 다시 살아나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여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대목
(1) 손은 왜 특별한가?
앞 단락에서 손은 언어 다음으로 인간의 자기실현을 수행하는 기관이며 운명을 매개하는 핵심 기관처럼 보였음. 여기서 헤겔은 그 생각을 더 밀어붙임 : 인간은 본래적으로 자신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그 운명을 실현하는 기관인 손은 그 즉자적 본질을 표현해야 하지 않는가?
이 논리는 상당히 설득력 있음
(2) 새로운 관점의 도입: 기관은 ‘중간자’
앞에서 기관은 실패했음
* 기관 안에 있는 것은 활동 그 자체이고,
* 결과(행적)는 외적 세계로 분리되며,
* 내면과 외면은 갈라졌음
그러나 이제 다른 각도에서 보면 기관은 단순한 통로가 아니라:
* 내적인 활동이 현존하는 자리이면서
* 동시에 외적인 존재(Sein)이기도 함
따라서 기관은 내면과 외면을 잇는 ‘매개(Mitte)’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지금 도입되는 새로운 가능성임
(3) 중요한 구별: 행적과 다른 외면성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구분이 등장하는데, 행위에는 두 종류의 외면성이 있음
-행적(Tat)
* 세계 속으로 분리되어 나간 결과
* 타자에 의해 변형·왜곡될 수 있음
* 개인으로부터 떨어져 나감
-기관 자체의 외면성
* 활동이 현존하는 자리
* 개인에게 남아 있음
* 분리되지 않음
헤겔은 지금 이 두 번째 가능성을 시험함 :혹시 기관 자체의 외면성이 안정적인 ‘표현’의 자리일 수는 없는가?(4)철학적 긴장
이 대목의 핵심
* 기관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 행적과 달리, 기관은 개인에게 남아 있다.
* 따라서 기관은 내면과 외면을 잇는 중간항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앞에서 드러나듯 기관 안의 활동은 여전히 유동적이고 과정적이며 고정된 표지가 아님. 따라서 ‘법칙’을 세울 수 있는 정태적 구조가 아님. 따라서 기관을 매개로 삼으려는 시도 역시 곧 한계에 부딪히게 됨
(5)지금 논의의 위치
점성술: 완전한 외재적 결합 → 기각
수상술: 활동 기관을 통한 추론 → 부분적 정당성 인정
기관을 매개로 보는 시도 → 마지막 가능성 시험
그리고 곧 다음 단계에서, 관찰하는 이성은
👉 활동적 기관이 아니라
👉 가장 고정되고, 변화하지 않으며,
👉 타자에 의해 변형되지 않는 것
즉 두개골과 뼈로 이동. 거기서 헤겔은 관찰하는 이성의 자기모순을 극적으로 폭로
(6)주석해설이 주석은 본문에서 말한 “기관은 내면과 외면의 ‘중간(Mitte)’이다”라는 규정을 확장함
a.기관은 이중적 매개자이다
기관은 두 방향에서 매개하는데, 행위의 측면에서 손, 입 등은 개인의 내면을 세계 속으로 실현. 경험의 측면에서 감각 기관(눈, 귀 등)은 세계를 개인 안으로 들여옴. 즉 기관은 내면 → 외면, 외면 → 내면의 양방향의 통로임
b.중요한 철학적 암시
“감각의 개념 = 경험의 개념”이라는 문장은 의미심장. 여기서는 감각은 단순한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세계가 개인에게 ‘경험’이 되는 방식 그 자체임. 따라서 기관은 단순한 기계적 부위가 아니라, 세계와 개인이 서로를 구성하는 자리임. 즉 기관은 단순한 물리적 통로도 아니고 단순한 기호도 아니며 세계와 주체의 상호 구성적 접점임. 이 주석은 앞으로 전개될 비판의 강도를 더 높이는데, 왜냐하면 이렇게까지 중대한 역할을 하는 기관조차 안정적인 ‘표현 법칙’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더 고정된 물질(뼈)로 후퇴하는 것은 더욱 자기모순적이 되기 때문]
상동 270-271
Diese Mitte und Einheit des Inneren und Æusseren ist nun fürs erste selbst auch äusserlich; alsdann aber ist diese Æusserlichkeit zugleich in das Innere aufgenommen: sie steht als
'einfache' Æusserlichkeit der zerstreuten entgegen, welche entweder nur ein 'einzelnes' für die ganze Individualität zufälliges Werk oder Zustand, oder aber als 'ganze' Æusserlichkeit das in eine Vielheit vonㅣWerken und Zuständen zersplitterte Schicksal ist. Die einfachen Züge der Hand also, ebenso Klang und Umfang der Stimme, als die individuelle Bestimmtheit der Sprache, — auch dieselbe wieder, wie sie durch die Hand eine festere Existenz als durch die Stimme bekommt, die Schrift, und zwar in ihrer Besonderheit als Handschrift — alles dieses ist 'Ausdruck' des Inneren, so dass er als die einfache Ausserlichkeit sich wieder gegen die 'vielfache Æusserlichkeit' des Handelns und des Schicksals, sich als 'Inneres' gegen diese verhält.
이 매개, 그리고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통일은 우선은 그 자체로 또한 하나의 외적인 것이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 외면성은 동시에 내면 속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단순한’ 외면성으로서, 흩어져 있는 외면성에 맞서 서 있다. 그 흩어진 외면성은, 한편으로는 전체 개별성에 대해 우연적인 ‘하나의’ 개별적 작품이나 상태일 뿐이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작품들과 상태들로 산산이 흩어진 ‘전체로서의’ 외면성, 곧 운명이다. 따라서 손의 단순한 선들, 마찬가지로 목소리의 음색과 음역, 언어의 개별적 특징, 더 나아가 그것이 목소리를 통해서보다 손을 통해 더 견고한 현존을 얻는 형태인 글쓰기, 특히 필적(손글씨) —이 모든 것은 내적인 것의 ‘표현’이다. 이 표현은 단순한 외면성으로서, 행위와 운명의 ‘다중적 외면성’에 대립하며, 그에 대해 마치 ‘내적인 것’처럼 관계한다.
[이 단락은 논의가 거의 정점에 도달한 지점. 여기서는 기관이 ‘매개(Mitte)’로서 가지는 의미가 한 번 더 정교하게 재규정됨]
(1) 매개는 처음에는 외적이다
기관은 내면과 외면을 매개하지만, 우선은 하나의 외적 존재임.즉 손, 목소리, 글씨는 모두 감각 가능한 외적 현상임
(2) 그러나 이 외면성은 “내면화된 외면성”이다
여기서 미묘한 전환이 일어남. 기관의 외면성은 단순히 세계로 분리되어 나간 행적(Tat)이 아니라, 개인 안에 남아 있으면서 활동을 담고 있는 외면성임. 즉 이것은
외적이지만 내면에 속한 외적임
(3) “단순한 외면성” vs “다중적 외면성”
헤겔은 외면성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① 다중적 외면성 : 행위들, 사건들, 운명의 전개, 수많은 작품·상태들→ 흩어져 있고 변화하며 우연적임
② 단순한 외면성 : 손의 선, 목소리의 음색, 말투, 필적
→ 하나의 통일된 형식적 표현임
이 단순성 때문에, 그것은 다중적 행위보다 오히려 더 “내적인 것”처럼 보임
(4) 필적의 흥미로운 위치
헤겔이 특히 글쓰기와 손글씨를 언급하는 것은 의미심장함. 목소리는 사라지지만 글씨는 남음. 그리고 손글씨는 기계적 인쇄와 달리 개인적 형태를 보존함. 따라서 손글씨는 활동이 남긴 흔적이면서 개인에게 여전히 속해 있는 외면성이라는 점에서 관상학·수상술보다 한 단계 더 설득력 있어 보임
(5)철학적 의미
이 단락은 다음을 말하고 있음 : 행위와 운명은 너무 흩어져 있고 우연적이지만 손의 선, 목소리의 음색, 필적 같은 것은 단순하고 통일된 외면성임. 그래서 그것은
행위보다 오히려 ‘내면에 가까운 외면’처럼 보임
이것이 바로 관상학, 수상술, 필적학 등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철학적 이유임
(6)그러나 결정적 긴장
그러나 단순하다는 것이 곧 필연적이라는 뜻은 아니며 통일되어 보인다는 것이 곧 개념적 매개라는 뜻은 아님. 이제 거의 마지막 단계가 남음.
다음 전개에서는 과연 이 ‘단순한 외면성’이 진짜로 법칙적 표현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결국 우연적 기호로 붕괴하는가?가 명확히 드러남]
상동 271-272
- Wenn also zuerst die bestimmte Natur und angeborene Eigentümlichkeit des Individuums zusammen mit dem, was sie durch die Bildung geworden, als das Innere, als das Wesen des Handelns und des Schicksals genommen wird, so hat es seine Erscheinung und Æusserlichkeit zuerst an seinem Munde, seiner Hand, Stimme, Handschrift, so wie an den übrigen Organen und deren bleibenden Bestimmtheiten, und alsdann erst drückt es sich weiter hinaus nach aussen an seiner Wirklichkeit in der Welt aus.
— 그러므로 만약 우선 개인의 규정된 본성과 타고난 고유한 특성이, 그리고 그것이 교육을 통해 되어온 것과 함께 행위와 운명의 본질로서, 곧 내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현현과 외면성을 먼저 입, 손, 목소리, 필적과 같은 것들에서, 그리고 다른 기관들과 그 지속적인 규정들에서 갖게 되며,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현실 속에서 더욱 바깥으로 표현된다.
[이 문장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한 번 정리하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연결 지점
(1) “내적인 것”의 구성
헤겔은 여기서 내적인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함. 내적인 것 = 타고난 본성, 개인적 고유성, 교육을 통해 형성된 것, 행위와 운명의 본질
즉, 자연 + 형성 + 역사 = 개별자의 본질
(2) 표현의 단계적 구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표현의 순서”임
1단계: 가까운 외면성으로서 손, 목소리, 필적, 기관의 지속적 특징. 이것이 첫 번째 현현임. 즉, 내면은 먼저
‘개인에게 남아 있는 외면성’에서 드러남
2단계: 멀리 나간 외면성. 그 다음에야 내면은 행위, 작품, 사회적 효과, 세계 속 현실로 “더 밖으로” 나감. 이것이 운명의 전개임
(3)왜 이 구분이 중요한가?
이 문장은 다음을 정리함 :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다중적 사건들은 이미 한 단계 더 나간 표현임. 그보다 더 직접적이고 본질에 가까운 표현은 기관의 지속적 형식적 특징들인데, 바로 이것이 관상학·수상학·필적학이 설 자리를 얻는 논리임
(4)그러나 미묘한 아이러니
헤겔은 여기서 아직 비판을 노골적으로 하지 않음. 그러나 문장 구조 자체가 이미 암시적임 : “먼저 …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
이 구조는 곧 다음 질문을 낳음 : ‘먼저’ 드러난 것이
과연 더 본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단지 더 직접적으로 보일 뿐인가?
지금까지의 논의를 기억하면, 기관은 활동의 자리이며,
활동은 고정되지 않고, 표현은 필연적으로 이중적이며,
행위는 왜곡될 수 있음. 따라서 문제는 다시 제기됨.
이 ‘가까운 외면성’이 과연 법칙적 표현의 자리인가?
곧 이어지는 전개에서 헤겔은 이 마지막 가능성마저 정면으로 시험함
상동 272
Weil nun diese Mitte sich als die Æusserung be-stimmt, welche zugleich ins Innere zurückgenommen ist, ist ihr Dasein nicht auf das unmittelbare Organ des Tuns eingeschränkt; sie ist vielmehr die nichts vollbringende Bewegung und Form des Gesichts und der Gestaltung überhaupt. Diese Züge und ihre Bewegung sind nach diesem Begriffe das zurückgehaltene an dem Individuum bleibende Tun, und nach seiner Beziehung auf das wirkliche Tun das eigene Beaut-sichtigen und Beobachten desselben, - Ausserung als Reflexion über die wirkliche Æusserung. Das Individuum ist zu und bei seinem äusseren Tun darum nicht stumm, weil es dabei zugleich in sich reflectiert ist, und es äussert dieses Insichreflectiertsein; diesesㅣtheoretische Tun oder die Sprache des Individuums mit sich selbst darüber ist auch vernehmlich fur andere, denn sie ist selbst eine Æusserung.
이제 이 매개가 동시에 내면 속으로 되돌아간 외화로 규정되는 한에서, 그 현존은 즉각적인 행위의 기관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은 얼굴과 일반적인 형상의 움직임과 형식이다. 이러한 특징들과 그것들의 움직임은 이 개념에 따르면 개인 안에 남아 있는, 억제된 행위이며, 그리고 실제적인 행위에 대한 관계에서는 그 행위를 스스로 감독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즉 현실적 외화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외화이다. 개인은 자신의 외적 행위에 있어서 단지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와 동시에 자기 안에서 반성하고 있고, 그리고 이 자기-반성함을 또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 이론적 행위, 곧 개인이 자기 자신과 더불어 하는 언어는 다른 이들에게도 감지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 또한 하나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단락은 논의가 결정적으로 미묘해지는 지점. 기관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반성(Reflexion)의 자리로 등장
(1) 매개의 확장
이전까지는 손, 목소리, 필적
이제 추가되는 것은 얼굴 표정, 몸짓의 형식, 움직임
중요한 점: 이것들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않는” 운동임. 즉,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 행위는 아니지만 완전히 비어 있는 것도 아님. 이것은 행위 직전, 행위 중, 행위 이후의 반성적 움직임
(2) “억제된 행위”라는 규정
헤겔의 표현: zurückgehaltene Tat (되돌려진/억제된 행위). 이것은 대단히 중요함.
얼굴 표정과 몸짓은 세계를 바꾸지 않으며 사물을 생산하지 않지만 전혀 무의미하지도 않음. 그것은 실제 행위에 대한 주체의 감시, 자기-관찰, 자기-관계임. 즉 행위 그 자체, 행위에 대한 의식이자 그 의식의 표현임. 여기서 표현의 2차 구조가 등장
(3) 표현에 대한 표현
핵심 문장: 현실적 표현에 대한 반성으로서의 표현
구조는 다음과 같음
a.실제 행위 (Tat)
b. 그 행위에 대한 자기 반성
c. 그 반성의 외적 표현
이것이 얼굴의 미묘한 움직임, 제스처, 표정, 즉각적 반응임
(4)가장 중요한 문장
개인은 자신의 외적 행위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동시에 자기 안으로 되돌아가 있고 그 반성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단순히 행위하는 존재가 아니라 행위를 의식하며, 행위를 의식한다는 것을 다시 표현하는 존재. 이것이 바로 이성 장의 인간 이해임
(5)“이론적 행위”라는 개념
헤겔은 놀랍게도 이것을 theoretisches Tun (이론적 행위)라고 부름. 왜 이것이 “행위”인가? 왜냐하면 반성도 소극적 침묵이 아니라 하나의 능동적 활동이기 때문임. 그리고 이것은 개인이 자기 자신과 더불어 나누는 언어임. 그러나 놀라운 점은 그것이 타인에게도 들린다는 것. 즉, 내면의 자기 반성은 완전히 폐쇄적이지 않고 표정과 몸짓을 통해 외면화됨
(6)철학적 의미
이 단락은 관상학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 중 하나임. 이제 문제는 단순히 얼굴이 성격을 보여주는가?가 아니라, 얼굴과 몸짓은 내적 반성의 표현인가?라는 수준으로 이동. 즉, 표정은 단순한 자연적 표지가 아니라
반성의 흔적, 자기-관계의 외화, 행위에 대한 의식의 표현임. 이렇게 되면 관상학은 단순한 자연적 상징이 아니라 “반성의 가시적 현상학”처럼 보이게 됨
(7)긴장
그러나 바로 여기서 다시 문제가 생김. 반성이 표현된다 그것은 의도적일 수 있음. 즉 조절될 수 있거나 위장될 수 있음. 즉, 표현은 자연 필연적 기호가 아니라 자유의 영역으로 들어감. 여기서 관상학은 다시 위험해짐.
지금 정말로 마지막 폭로 직전에 와 있습니다.
다음 문단에서 헤겔은 이 모든 가능성을 하나씩 해체]
상동 272-273
An diesem Inneren, welches in seiner Ausserung Inneres bleibt, wird also das Reflectiertsein des Individuums aus seiner Wirklichkeit beobachtet und es ist zu sehen, welche Bewandtnis es mit dieser Notwendigkeit hat, die in dieser Einheit gesetzt ist. --Dieses Reflectiertsein ist zuerst verschieden von der Tat selbst, und kann also etwas 'Anderes' sein und für etwas Anderes genommen werden, als sie ist; man sieht es einem am Gesicht an, ob es ihm Ernst mit dem ist, was er sagt oder tut. Umgekehrt aber ist dieses, was Ausdruck des Inneren sein soll, zugleich 'seiender' Ausdruck und fällt hiermit selbst in die Bestimmung des 'Seins' herunter, das absolüt zufällig für das selbstbewusste Wesen ist. Es ist daher wohl Ausdruck, aber zugleich auch nur wie ein "Zeichen', so dass dem ausgedrückten Inhalte die Beschaffenheit dessen, wodurch es ausgedrückt wird, vollkommen gleichgültig ist.
이처럼 자신의 외화 속에서도 여전히 내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이 내면에서, 개인이 자신의 현실로부터 반성하고 있음이 관찰된다. 그리고 이 통일 속에 설정되어 있는 이 필연성이 과연 어떤 사정에 놓여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 이 반성됨은 먼저 행위 자체와는 구별된다. 따라서 그것은 행위와 다른 어떤 것일 수 있으며, 행위와는 다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이 그에게 진지한지 아닌지를 그의 얼굴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 내면의 표현이어야 할 것은 동시에 ‘존재하는’ 표현이기도 해서 그것은 자기의식적 본질에 대해 절대적으로 우연적인 [단순한] ‘존재’의 규정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물론 표현이지만, 동시에 단지 하나의 ‘기호’일 뿐이다. 따라서 표현된 내용에게는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의 성질이 완전히 무관하다.
[이제 관상학 비판의 핵심 논증이 명시적으로 드러남. 이 단락은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세워 온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무너뜨리는 결정적 단계
(1) 출발점 — 반성의 표현
표정은 행위에 대한 반성의 표현이며 우리는 얼굴에서 “진지함”을 읽어낼 수 있음. 여기까지는 관상학에 유리한 논증
(2) 첫 번째 균열 — 반성 ≠ 행위
헤겔은 즉시 문제를 제기 : 반성은 행위 그 자체와 다르다. 즉, 내가 진지해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거짓일 수 있고 반대로 무표정해도 진지할 수 있음.
반성의 표현은 행위와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음. 이미 여기서 필연성이 흔들림
(3) 결정타 — 표현은 ‘존재’로 떨어진다
이제 훨씬 급진적인 비판이 나옴 : 표정은 하나의 외적 존재(Sein)이자 감각적 현실임. 그런데 자기의식의 본질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자유, 자기-관계, 개념적 통일임. 따라서 감각적 존재는 자기의식의 본질에 대해
절대적으로 우연적임. 이것이 핵심 문장임
(4) “표현”에서 “기호”로의 추락
결론은 냉혹함 : 표정은 표현일 수는 있지만 필연적 표현은 아니라 단지 기호(Zeichen)일 뿐임. 그리고 “기호”란 내용과 표현 방식 본질적으로 무관한 것. 예: “나무”라는 말과 실제 나무는 필연적 연결이 없음. 그것은 관습적 기호일 뿐임. 마찬가지로, 표정과 내면 사이에도 필연적 연결이 없음
(5)철학적 의미
이 단락에서 관상학은 논리적으로 붕괴함. 왜냐하면 관상학은 외적 형상과 내적 본질 사이에는 필연적 대응이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
그러나 헤겔이 논증하는 것은, 반성은 행위와 다를 수 있다, 표현은 감각적 존재다, 감각적 존재는 우연적이다, 따라서 표현은 단지 기호일 뿐 이라는 것. 즉, 얼굴은 영혼의 필연적 현현이 아님
(6)더 깊은 의미
이 비판은 단지 관상학을 겨냥하는 것이 아님. 헤겔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자기의식의 본질은 감각적 존재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자유로운 주체는 얼굴의 형상, 두개골의 구조, 필적의 곡선으로 환원되지 않음. 왜냐하면 자유는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관계이며 개념이기 때문
(7)지금까지의 전개 요약
a.기관은 매개다.
b.표정은 반성의 표현이다.
c.그러나 반성은 행위와 다를 수 있다.
d.표현은 감각적 존재다.
e.감각적 존재는 자기의식에 대해 우연적이다.
f.따라서 그것은 단지 기호일 뿐이다.
관상학의 철학적 붕괴가 완성되었음. 이제 이 논증이 급진적으로 확장되어 두개골학(골상학)까지 철저히 해체됨]
상동 273
Das Innere ist in dieser Erscheinung wohl 'sichtbares' Unsichtbares, aber ohne an sie geknüpft zu sein; es kann ebensowohl in einer anderen Erscheinung sein, als ein anderes Inneres in derselben Erscheinung sein kann. Lichtenberg sagt daher mit Recht: „Gesetzt der Physiognom haschte den Menschen „einmal, so käme es nur auf einen braven Entschluss »an, sich wieder auf Jahrtausende unbegreiflich zu „machen." 1) - Wie in dem vorhergehenden Verhält-ㅣnisse die vorliegenden Umstände ein Seiendes waren, woraus die Individualität sich das nahm, was sie vermochte und wollte, entweder sich ihm ergebend oder es verkehrend, aus welchem Grunde es die Notwen-digkeit und das Wesen der Individualität nicht enthielt, ebenso ist hier das erscheinende unmittelbare Sein der Individualität ein solches, das entweder ihr Re-flectiertsein aus der Wirklichkeit und ihr Insichsein ausdrückt, oder für sie nur ein Zeichen ist, das gleichgültig gegen das Bezeichnete und darum in Wahrheit nichts bezeichnet; es ist ihr ebensowohl ihr Gesicht als ihre Maske, die sie ablegen kann. Sie durchdringt ihre Gestalt, bewegt sich, spricht in ihr; aber dieses ganze Dasein tritt ebenso als ein gleichgültiges Sein gegen den Willen und die Handlung über; sie tilgt an ihm die Bedeutung, die es vorhin hatte, ihr Re-flectiertsein in sich oder ihr wahres Wesen an ihm zu haben und legt es umgekehrt vielmehr in den Willen und in die Tat.
1) J. C. Lavater hatte in seinen 1775—1778 erschienenen 'Physiognomischen Frag-menten' die Physiognomik als den Weg genialer und untrüglicher Menschenkenntnis gepriesen; der Physiker G. Chr. Lichtenberg hatte sich demgegenüber in einem witzigen, 1778 veröffentlichten, Aufsatz 'über Physiognomik wider die Physiognomen’ auf die Macht des menschlichen Selbstbewusstseins und der menschlichen Freiheit berufen. Vgl. hier zunächst etwa den neunten der Psychologischen Briefe' (1851) Joh. Ed. Erdmanns. (B.)
이 내면은 이 현상 속에서 분명 ‘보이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에 결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현상 속에서 다른 내면일 수도 있는 바와 같이 또한 동일한 내면이 전혀 다른 현상 속에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리히텐베르크는 정당하게 이렇게 말한다. “설사 관상학자가 언젠가 인간을 낚아챈다고 하더라도, 다시 수천 년 동안 파악 불가능해지는 것은
결단 하나에 달려 있다.”1) — 앞선 관계에서 주어진 외적 상황이 하나의 존재였고, 거기서 개체성은 자신이 할 수 있고 의지하는 것을 취했으며, 그것에 자신을 내맡기기도 하고 뒤틀기도 하였던 것처럼, 그래서 그 상황은 개체성의 본질과 필연성을 담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개체성에 나타난 직접적 존재는 그 현실로부터의 자기-반성과 자기-내적 존재를 표현할 수도 있고, 혹은 단지 하나의 기호일 수도 있다. 그 기호는 기표된 것에 대해 무관하며, 따라서 진정으로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체성의 얼굴이기도 하고, 또한 개체성이 벗어버릴 수 있는 가면이기도 하다. 개체성은 자신의 형상을 관통하고, 그 안에서 움직이며, 말한다. 그러나 이 전체 현존은 의지와 행위에 대해 무관한 존재로 넘어간다. 개체성은 이전에 그 현존이 지니고 있던 의미, 곧 그 속에 자신의 반성 혹은 참된 본질을 두고 있다는 의미를 지워버리며,
> 오히려 그것[반성 또는 참된 본질 또는 현존]을 의지와 행위 속에 놓는다.
1)요한 카스파르 라바터는 1775년부터 1778년 사이에 출판된 『관상학 단편들』에서 관상학을 천재적이며 오류 없는 인간 인식의 길로 찬양하였다. 이에 대해 물리학자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리히텐베르크는 1778년에 발표한 재치 있는 논문 「관상학에 대하여 — 관상학자들을 반박하며」에서 인간의 자기의식과 자유의 힘을 내세워 이에 맞섰다. 이에 관해서는 우선 요한 에두아르트 에르트만의 『심리학 서한』(1851) 가운데 제9서를 참조하라.
[이 대목은 관상학에 대한 헤겔의 비판이 가장 노골적으로 자유의 문제로 전환되는 곳. 특히 Georg Christoph Lichtenberg을 소환하는 부분이 인상적임
(1) “보이는 보이지 않는 것”
표정은 내면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과 필연적으로 묶여 있지는 않음. 즉, 동일한 얼굴에 서로 다른 영혼이 있을 수 있고 동일한 영혼이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질 수 있음. 즉 내면과 외면의 결합은 비필연적임
(2) 리히텐베르크 인용의 의미
Georg Christoph Lichtenberg은
당대 관상학을 체계화한 Johann Kaspar Lavater를 비판했음. 라바터는 얼굴은 성격의 천재적 표현이라고 주장했음.하지만 리히텐베르크는 인간은 의식적 결단 하나로 자신을 읽을 수 없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 헤겔은 명확히 리히텐베르크 편에 섬. 왜냐하면 자유가 존재하는 한 얼굴은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없기 때문
(3) 가장 중요한 표현: “얼굴이자 가면”
이 문장은 철학적으로 폭발적임. "그것은 그의 얼굴이며 동시에 그가 벗을 수 있는 가면이다."
무엇을 뜻하는가?
* 인간은 자신의 형상 속에 갇혀 있지 않음
* 그는 그것을 통과함
* 그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음
* 심지어 그것의 의미를 제거할 수 있음
즉, 외적 형상은 자기의식의 본질적 자리가 아님
(4)자유 개념의 등장
이 단락의 진짜 주인공은 자유임. 개체성은 상황을 변형할 수 있었고 형상을 관통할 수 있으며 얼굴의 의미를 제거할 수 있고 가면을 벗을 수 있음.
그리고 결정적인 문장: 그는 자신의 참된 본질을 형상이 아니라 의지와 행위 속에 둔다.
이것은 헤겔의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 줌
(5)관상학의 최종 붕괴
관상학은 다음을 전제했음: 얼굴은 성격의 필연적 현현이다.
헤겔의 결론: 얼굴은 표현일 수 있지만 필연적 표현은 아니라 가면이 될 수 있음. 자유가 그것을 중단시킬 수 있고 따라서 그것은 본질을 담고 있지 않음.
최종결론: 자기의식의 본질은 감각적 형상 속에 있지 않고 의지와 행위 속에 있음
(6)헤겔 『정신현상학』 맥락 속 의미
선생님께서 연구하시는 『정신현상학』 “이성” 장의 전개 전체를 놓고 보면,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함
관찰하는 이성은:
* 내면을 외적 현상에서 읽으려 함
* 자연 속에서 법칙을 찾듯 인간을 읽으려 함
그러나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자기의식은 자연적 사물이 아니라는 것. 자유는 자연적 표식으로 고정될 수 없음. 따라서 이성은 인간을 자연적 대상처럼 다루는 데 실패함. 이제 다음 단계는 더욱 급진적임. 헤겔은 두개골학(골상학)을 통해 정신 = 두개골 구조라는 주장까지 밀어붙인 뒤 그것을 철저히 붕괴시킴]
상동 273-274
Die Individualität giebt dasjenige Insichreflectiertsein auf, welches in den Zügen' ausgedrückt ist, und 'legt ihr Wesen in das Werk'. Hierin widerspricht sie dem Verhältnisse, welches von dem Vernunftinstincte, der sich auf das Beobachten der selbstbewussten Individualität legt, in Ansehung dessen, was ihr Inneres und Æusseres sein soll, festgesetzt wird. Dieser Gesichtspunkt führt uns auf den eigentlichen Gedanken, der der physiognomischen - wenn man so will -
'Wissenschaft' zu Grunde liegt. Der Gegensatz, aut welchen dieses Beobachten geraten, ist der Form nach der Gegensatz von Praktischem und Theoretischem, beides nämlich innerhalb des Praktischen selbst ge-setzt, — von der sich im Handeln (dies im allgemeinsten Sinne genommen) verwirklichenden Indivi-ㅣdualität - und derselben, wie sie in diesem Handeln zugleich daraus heraus, in sich reflectiert und es ihr Gegenstand ist.
개체성은 그 ‘선들(특징들)’ 속에 표현되어 있는 자기-내적 반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본질을 ‘작품(행위)’ 속에 둔다. 이 점에서 개체성은, 자기의식적 개체성을 관찰하려는 이성의 본능이 무엇을 그 내면과 외면으로 설정해야 하는가에 관하여 규정해 놓은 관계와 모순된다.
이러한 관점은, 소위 말하는 관상학적 ‘학문’의 기초에 놓여 있는 본래의 사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관찰이 빠져드는 대립은 형식상 실천적인 것과 이론적인 것의 대립이다. 그런데 이 둘은 모두 실천적인 것 내부에서 설정된 것이다 — 곧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해된) 행위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개체성과, 동일한 개체성이 그 행위 속에서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나 자기 안으로 반성하여 그것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 한에서의 개체성 사이의 대립이다.
[이 단락은 관상학 비판의 핵심 논리를 개념적으로 정식화하는 지점
1. “본질을 작품 속에 둔다” — 결정적 전환
헤겔의 첫 문장은 매우 중요 :개체성은 얼굴의 ‘선들’ 속에 표현되어 있는 자기-반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본질을 작품(행위) 속에 둔다.
이전까지의 논의에서 표정, 얼굴의 특징, 움직임 등은 내면의 표현일 수 있는 가능성으로 탐구되었음. 그러나 여기서 헤겔은 말함 : 개체성은 자신의 본질을 그런 고정된 특징 속에 두지 않는다.
대신 어디에 두는가? 행위, 작품, 의지의 실현 속에 둠. 이것이 관상학과의 근본적 충돌임
2. 이성의 본능과의 모순
헤겔은 “이성의 본능(Vernunftinstinct)”이라는 표현을 흠. 이성은 자연을 관찰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면 = 본질, 외면 = 그 표현이라는 안정된 대응 구조를 찾으려 함. 그래서 관상학은 내면은 얼굴에 드러나고 고정된 형상은 성격의 필연적 지표라고 말함. 그러나 개체성은 이것을 스스로 깨뜨림.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본질을 고정된 존재(Sein)가 아니라 행위 속에서 스스로 실현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성은 본질을 “존재” 안에서 찾으려 하고 개체성은 본질을 “행위” 안에 둠
3. 관상학의 근본 사상
헤겔은 여기서 매우 공정. 그는 관상학이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사유 구조에 근거한다고 봄. 그 근본 사상은 다음과 같음 : 실천적 개체성은 자신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것을 의식하는 이론적 측면을 가짐. 즉 인간은 행위하는 존재이며 그 행위에 대해 반성하는 존재임. 관상학은 이 반성의 흔적을 얼굴에서 찾으려 함
4. 실천적 것과 이론적 것의 대립
헤겔이 제시하는 구조는 섬세함. 대립은:
실천적 것 vs 이론적 것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둘 다 실천적 영역 내부에 있음
설명하면:
① 실천적 개체성
* 행위 속에서 자신을 실현하는 주체
*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능동성
② 이론적 순간
* 그 행위를 동시에 의식하는 주체
*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반성
인간은 항상 이 두 차원을 동시에 가짐
5. 관상학이 여기서 실패하는 이유
관상학은 다음을 전제 :이론적 순간(반성된 개체성)은얼굴의 고정된 형상 속에 남아 있음
그러나 헤겔의 논증은 이미 밝혔음 : 개체성은 그 반성을 형상 속에 고정하지 않고 그것을 다시 행위 속으로 옮김. 자기 본질을 의지와 행위에 둠
따라서 고정된 형상은 자기의식의 참된 자리일 수 없음
6. 이 단락의 철학적 의의
이 부분은 『정신현상학』 “이성” 장 전체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 관찰하는 이성은 다음을 시도함
* 인간을 자연적 대상으로 읽어내기
* 인간을 법칙화하기
* 형상과 본질의 대응을 확정하기
그러나 자기의식은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면서도 그 대상화를 다시 넘어서는 자유로운 구조를 가짐
따라서 인간은 자연적 사물처럼 관찰될 수 없음
7. 전체 흐름 속 위치
지금까지의 전개는 다음과 같음
a.내면은 외면에 표현된다.
b.표정은 반성의 표현일 수 있다.
c.그러나 표현은 우연적 존재다.
d.개체성은 그 의미를 철회할 수 있다.
e.본질은 형상이 아니라 행위 속에 있다.
f.관상학은 내면·외면 대응을 고정하려 하지만 실패한다.이제 다음 단계에서는 이 구조가 더욱 급진화되어
“정신 = 두개골”이라는 주장까지 등장. 지금 이 부분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실천성과 반성의 이중 구조가 헤겔에게서 어떻게 통일되는가일 것. 이 대목은 정신 장이나 자유 개념과 연결됨]
상동 274-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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