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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23.12.26 건설 노동의 공기 1
  2. 2023.12.25 혼돈의 성탄
  3. 2023.12.11 고독

건설 노동의 공기

단상 Vorstelltung 2023. 12. 26. 05:2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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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전에 건설현장에서 함께 일한 동료와 짧게 안부를 주고 받았다. 오래 갈 줄 알았던 평택현장이 올해 초반부터 일감이 줄어들다 최근에 다시 회복되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렇지 않은가 보다. 사실 한 현장이 3년 이상 지속되기는 힘들다. 3년이 뭔가? 3개월, 3일도 안되서 현장일이 끊길 수도 있는 것이 건설현장이다. 그래도 반도체공장 건설은 공기가 다른 현장에 비해 안정적인 편이다. 심지어 발전소 보다도.

현실이 이렇다 보니 팀단위로 움직이는 이들은 수시로 현장을 옮겨 다녀야 한다. 개별적으로 한다 해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팀을 따라 움딕이는 것이 여러모로 덜 피곤한 일이지만, 동물도 서식처가 바뀌면 힘든 것 처럼 새로운 현장은 낯설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움직이며 팀 뿐만 아니라 현장도 옮기는 일에 이골이 난 사람도 있지만, 그런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할 뿐, 나이들고 이 현장 저 현장 돌아다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에 적합하고 민첩한 사람은 사실 팀장급의 사업주 외엔 드물 것이, 어차피 같은 노임을 받는다면 안정적인 공기의 동일현장이 임노동자에게 더 낫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돈에 흔들리는 사업자에겐 이런 일은 부수적일 뿐이다.

공기는 건설비용과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당사자 모두에게 민감한 일이지만, 옛날처럼 무리하게 공기를 단축하려다 사고가 나면 더 큰 문제이기에 건축주 입장에서는 더욱 신중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런 일은 반도체나 발전소, 대규모 아파트같은 대형 현장에 한한다. 한없이 늘어질 수 없는 것이 건설공기지만, 한 현장이 마무리될 때 까지 일하고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팀을 만나는 것도 운이다. 좀더 능력이 된다면 그런 팀을 만드는 것은 운을 만드는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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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성탄

단상 Vorstelltung 2023. 12. 25. 05:18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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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가 태어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짧게 언급되어 있다. 정적 안토니우스를 누르고 황제권을 확립한 아우구스투스의 칙령 아래 모든 로마 식민지에 호적이 강제됨에 따라 이스라엘에서도 타향에 있던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호적등재를 위해 고향으로 회귀해야 했다. 나사렛에 있던 요셉은 만삭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150 km 떨어진 조상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야했고, 결국 어렵게 도착한 그곳의 어느 사관에서 마리아는 아이를 출산했다. 베들레헴은 현재 팔레스타인의 도시로서 2만명 이상이 숨진 가지지구에서 70km 거리에 있다. 이 지역에서 비참과 혼돈의 강도가 2023년 전 보다 현재가 더 세지만 아무튼 예수는 혼돈의 시대, 혼돈의 장소에서 태어났다. 크리스마스 성극에서 '빈방 있습니다' 라는 토로로 유명한 여관 주인역을 맡은 한 아이의 상반된, 하지만 진실한 대사는 비참과 혼돈의 시대에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다.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크리스마스 이브 사설에서 종교가 폭력적인 세계사에 기여하는 것에 관해 비관적으로 말한다. https://m.faz.net/aktuell/politik/inland/kommentar-zur-weihnacht-gott-mit-uns-19403899.html 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갈등과 살상이 벌어지는 일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쾰른 대성당에는 이슬람테러 주의경보로 경찰의 통제 하에 신자들이 입장하고 있다. 저마다 자신의 신들의 이름으로 이교도를 탄압하는 것은 종교의 구시대성과 야만성을 보여주지만, 사실 종교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은 권력에 책임이 있다. 하마스 지도부와 네탄야후 처럼 말이다. 물론 종교가 이런 권력에 부역하는 일은 나치에 동원된 카톨릭처럼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종교로부터 세속화된 세계에서 어떤 주장이나 명제를 종교를 근거로 정당화하는 것은 더이상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물론 상식적인 윤리를 종교로부터 뒷받침 받는 것에 관해서는 굳이 비판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그 윤리라는 것은 종교로부터 계속적인 정당성을 끌어낼 수는 없다. 윤리의 기원이 종교일지는 모르지만, 종교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태양계로부터 벗어난 보이저호의 유영과 유사한 숙명이다. 왜? 영구불변한 진리라는 것은 그 말 자체가 허구적인 것이고, 그런 말 자체는 특정시대와 특정장소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리는 알프스 산맥을 넘지 못한다.

세속화를 넘어 정교분리가 상식적인 헌법질서인 사회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것은 야만을 넘어 불법이기도 하다. 종교의 이름으로, 혹은 유사종굥의 이름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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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단상 Vorstelltung 2023. 12. 11. 06:17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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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가기 전 겨울방학의 어느 추운 밤, 미닫이 식의 창호 문이 달린 허름한 자취방에서 글을 쓰며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이 밤에 이곳에서 담배만 있다면 어느 누구와 함께 있지 않더라도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몇 년이 지나고 이런 생각을 동기생에게 얘기했는데 그의 답변이 기억나지 않지만, 별로 수긍하지 않는 편이었다.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정신없는 일과를 보내는 생활 속에서 그런 자아도취적 고독감이 파고 들어갈 여지는 없다. 아니 여유가 없다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 아닐까? 포화 속에서 생명이 순간 순간 위협받는 상황에서 이런 말은 무의미하겠지만, 삶의 종점은 미뤄든 숙제처럼 저 편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잘 차려진 밥상에서 미식을 즐기며 죽음의 철학을 설파했다는 쇼펜하우어 못지 않게 사회의 결정적 구조는 개별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연동되어 있다. 예를 들어 보험산업은 병로와 죽음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다. 한국전쟁 후반기 지리한 휴전협상 속에서도 많은 인명을  앗아간 중부전선의 치열한 교전은 스탈린의 죽음으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아마도 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의 몰락 이후에나 끝날지 모른다. 개별체들의 죽음은 또 다른 세상을 여는 삶의 출구인 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대면은 죽음 직전에 있는 나를 바라보는  하나의 연습일 수도 있다. 그것이 언제 올지 모르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 더 나아가 나와 너,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될지 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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