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위의 궁전

책들 Bücher 2007. 6. 14. 15:20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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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솔로몬의 노래』, 김선형 옮김

이 책은 노벨 문학상을 탄 '최초의 흑인 여성 작가'라는 빛바랜 찬사에 부족함이 없는 서사적 감동을 제시하는 면에서 오에 겐자부로를 연상시킨다. 짧지만은 않은 긴 호흡을 요구하는 분량의 소설이지만 감각적인 문장들이 정신을 번쩍들게 하는 묘한 마력도 있다. 그러나 시적 감수성과 감각적 표현력의 배후에서는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안겨준 고통의 흔적들이 역사가 되어 모리슨의 작품에 장중히 흘러오고 있다. 그것은 고통의 기억을 떠안은 흑인들의 삶을 끌어안으면서 이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재현하고 절규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주인공인 밀크맨은 솔로몬의 증손이다. 솔로몬의 아들인 메이컨 데드1세는 해방노예로서  땅을 임대해서 놀랄만한 노력과 재능으로 자기 땅을 사고 농지를 확장해 갔지만 백인들에게 린치를 당해 죽는다. 그들 앞에서 흑인 주제에 제 농장을 경영한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이 살인에 대한 재판이란 것도 없었고 시체는 강물로 그대로 유기된다. 그의 아들인 메이컨 데드 2세와 산고의 고통으로 죽어버린 어머니의 자궁을 헤치고 나온 여동생 파일러트는 백인들의 폭력을 피해 떠나 버린다. 세월이 흘러 메이컨 데드는 부동산 임대업자로 자수성가하고 파일러트는 미 전역을 떠돌다가 당시로선 금지된 사설 밀주업을 하며 오빠와 같은 버지니아의 한 동네에서 정착하게 되지만 원수처럼 서로 적대시한다. 이들이 사는 도시의 낫닥터 스트리트란 곳에서 유일한 흑인의사의 딸로 태어나 메이컨 데드와 결혼한 루스는 아이 둘을 낳은 이후  남편과 쌓인 오해로 오랜 세월동안 독수공방하다가 파일러트의 계략으로 밀크맨을 임신하게 된다. 이렇게 뭔가 정상적일 수 없는, 그러면서도 흑인으로서는 부족할 바 없는 환경에서 성장한 밀크맨은 이와같이 비틀린 성난 격정에 휩싸인 현재의 가족을 있게 한 과거로 추적해 들어간다. 그곳에는 가족이 뿌리채 뽑혀질 정도로 재난을 당한 가족사가 있으며 그 너머에는 이미 신대륙에서 벌어진 원초적 살육에 희생된 인디언의 전설이 있었다. 밀크맨이 할아버지가 살던 땅을 밟아보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본 가을빛 풍경들은 핏빛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오하이오, 인디애나, 미시건,,북아메리카의 지명뒤에는 수많은 인디언 전사들의 죽음이 묻혀 있는 것이다.

글자를 모르는 증조부에게 연방군의 술주정이 양키가 생각없이 끄적거린 메이컨 데드란 황당한 이름을 데드(dead) 일가가 지키며 그들의 삶을 개척해 가는 모습은 핍박받는 비탄의 삶을 기이하면서도 숭고하게 승화시키는 의지의 과정이다. 그리고 끝나지 않는 이들의 고통은 노래되면서 망각의 안온함을 조용히 흔들어 깨울 것이다.

200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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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책들 Bücher 2007. 6. 12. 10:1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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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 루이스 세풀베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정창 옮김

이소설은 놀라운 흡입력으로 짧은 시간에 독자를 끌어 들여 길지 않은 분량의 소설읽기가 너무 빨리 끝나버리는게 아쉬워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종반부를 며칠 동안 보지 않고 내버려 두게 한다. 암삵쾡이와의 사활을 걸고 벌이는 대결은 마치『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킨다. 괴범한 크기의 참치를 놓고 상어떼와 일전을 벌이는 노인에게 이 물고기들은 잔뼈굵은 바다 사람인 노인의 빈곤한 상상을 넘어서지 못한다. 광막한 바다라는 또다른 생존조건에서 건져올린 먹이를 지켜내기 위한 노인의 처절한 의지만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저 바다 노인 보다는 섬세하게 동물을 본다. 인간 못지 않게 영리하면서도 영묘하다는 투사를 동물에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연애소설을 많이 읽은 탓인가 보다.

똑같은 자료를 가지고서도 원시사회를 상이하게 보는 시각 하나가 있다. 프로이트, 레비 스트로스로부터 연원하는 원시인에 대한 주도적 시각은 원시사회가 결핍사회라는 것이다. 결핍의 내용은  문명사회의 근간으로 이해되는 생산 잉여와 국가기구이다. 이 지점을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다르게 읽는다. 그것은 마치 원시인들이 생산 잉여를 내기위한 축적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로인해 권력이 생길 수 없으며, 권력 자체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생존 이상을 넘어서는 비균등 생산활동을 기피했다는 것이다. 과연 원시인들에게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인간, 그중에서도 서구인에게로 전유된 사유체계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클라스트르는 원시인에게 과도한 투사를 덧씌운 것인가?

세풀베다가 그려내는 노인은 적어도 근거없어 동물에게 인간의 감정을 덧씌운 것으로 읽혀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라는 이름의 이 노인이 이름만 한 30자가 넘는  그의 아내를 잃어 버리고 아마존 밀림에서 수렵생활을 하는 수아족과 함께 사는 동안 느낀 것은, 사람은 밀림이라는 이 먹이구조에서 제일 정상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이다. 개미에게 아직 살아있는 살덩어리를 내어던지며 죽음을 맞이 하는 독특한 의식은 이 자각의 한 실례일 뿐이다.

자연을 이용하면서도 공생할 줄 아는 아마존 원주민과 헤어지고 마을로 내려운 노인이 나머지 여생의 은밀하면서도 진중한 위안거리로 삼은 것이 바로 연애소설 읽기이다. 직업의 굴레에 묶여 웬종일 노동하며 지내는 생활을 조롱하면서 자원을 모으진 않아도 자연과 더불어 풍족하게 살아갈 줄 아는 원주민에게 배운 생활습관대로 노인이 하루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따로 틀에 박힌 일은 필요없다. 징그러울 정도로 비가 그치지 않는 우기에도 물이 세지 않도록 지은 오두막에 기거하면서 배가 고프면 강에 나가 새우를 잡아와 튀기거나 삶아 먹고, 필요한 소금이나 술은 밀림에서 잡은 원숭이나 앵무새로 맞교환하면 된다. 밀림은 생계의 터전이자 극도로 여유로운 게으름의 근원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연애소설을 읽는 '특권'(?)이 생긴다. 그러나 문제는 일어난다. 노인도 그런 경우였지만, 밀림을 개간해 농지로 전환하도록 촉구하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밀려오는 이주민과 함께 밀림의 희귀물을 긁어 모으려고 오는 노다지꾼들,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도록 중앙에서 파견된 행정관이 밀림을 갉아 먹으면서 노인의 연애소설 읽기는 곤경에 처한다.

참고 문헌 : 장 프랑수와 스키립차크,『오늘을 위한 프랑스 사상가들』, 이상률 옮김


2004.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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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역사철학

헤겔 Hegel 2007. 5. 30. 17:56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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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유산

칸트는 그의 역사철학 관련 글 중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에서 계몽을 이성을 사용할 용기로 보고, 국민이 자발적으로 시민적 자유를 구가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일정한 제한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입법적 권위와 함께 계몽 군주에게 부여한다. 여기서 이성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이 이성을 역사적 자료를 동원해 실증적으로 설명하는 헤르더의 시도를 비판한다. 헤르더의 ‘인류역사의 철학에 대한 이념들’에서 칸트는 헤르더가 이성을 비롯해 인간이 가진 고귀한 가치가 혁명적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의 상태를 자연의 저차원과 고차원의 연결고리로 본 점을 비판한다. 또한 칸트는 헤르더가 불가지한 정신을 설명하기 위해, 더욱 모르는 ‘물질적 작용에 의한 정신의 발생’으로 설명하는 작업을 비판한다. 그러나 불가지한 정신을 놓고 벌이는 이러한 비판은 타당한가? 현대의 심리철학이나 진화심리학에서 하고 있는 일들은 이와 같은 헤르더의 작업을 충실히 계승한 것이다.


  헤겔의 역사철학에는 칸트가 남긴 유산들이 산재해 있지만 우선 헤겔은 이성을 주관 밖의 현실에서 자기 실현을 향해 나아가는 총체적 이성으로 확장시키는 면에서 칸트의 이성을 넘어선다. 즉 이성은 모든 실재의 근거이면서도 관념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자신을 실현시키는 것이며, 세계역사는 바로 이성이 활개하는 장이다. 특히 헤겔은 이성을 외부세계의 원인으로서의 이성에 국한하지 않고 개체적 의미로서의 이성으로까지 진입시키며, 이성에 섭리성을 부가하여 보편적 원리인 이성이 인간사의 총체적 현상에 적용될 수 있도록 무한한 힘을 행사하도록 한다. 여기서 이성(Vernunft)은 정신(Geist)으로 해석되는데, 이성의 정화된 형식자체는 논리학이 다룰 문제인 반면 현실세계에서의 이성은 정신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물질과는 달리 대립물의 통합과 폐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존적인 것이고 그것의 본질은 자유이다. 세계역사는 이러한 정신이 자기 본성에게로 향하는 것, 즉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는 자유의식의 진보과정이다. 언뜻 동일성의 반복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무참한 희생이 치러진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정신이 자기 실현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결국엔 정신의 자기실현이라는 목적을 위한 발판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사후적 해석은 섭리설과 별차이가 없다. 이에 대한 헤겔의 설명을 보면, 정신의 본질인 자유 자체는 내재적 이념(즉자적 상태)이고 이것의 수단은 외재적 현상이다. 그런데 후자는 정열에 의한 일반적인 인간활동으로서 정신이 아직 발현되지는 않은 가능성 상태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정열적 활동은 자신들의 타산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기 만족적인 활동으로 보이나, 세계이성의 관점에서 볼 때는 보편적인 이성이 자신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여기서 개체적 자기의식(Ego)은 절대이성의 대립물이다. 이러한 대립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정신의 운동이 진행된다. 즉 절대정신은 나폴레옹과 같은 정열적 인간을 끌어들여 자기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열적인 위인의 활동이 진정으로 절대이성의 실현수단으로 증명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후의 역사적 평가에서나 가능하므로 결과의 유용성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실용주의와 다를바 없다. 그러므로 현재 벌어지는 일이 미래에 가서는 진보의 수단일 것이라고 지금 증명하기에는 이성이란 기준이 불확정적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성에 대한 헤겔의 형이상학적 설명은 규범성을 벗어나서 유용할 수 없어 보인다. 이성의 유용성을 떠나서 이성을 적합하게 정의할 것이 있을까?
 
헤겔에게 이성의 유용성이란 부수적인 문제일 것이다. 왜냐하면 보편적 내용의 실현은 한정적인 관습과 법의 형태를 취하지만 보편적 내용 자체는 윤리적 공동체로부터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은 유용성이 아닌, 그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지만 헤겔은 실현수단이 결여된 이념을 공허하게 본다. 이것은 이념의 본질에도 어긋나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념의 목적은 즉대자적인 자기실현이기 때문이다(윤리적 공동체를 유용성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그러한 공동체가 필연성을 담지할 정도의 근거를 갖춘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인간유의 지속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그것의 본래적 정당성을 증명하는데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유용하다).


자유의 가능성과 세계사의 발전 척도


  헤겔은 국가를 주체의 의지와 이성의 의지가 결합하여 내재적 이념을 실현시킨, 외화된 도덕생활의 상태로 본다. 여기에서 개인은 보편성에 위배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의 자유를 누린다. 이러한 맥락에 놓인 국가의 상태가 자유의 충족인 것은 개인보다는 전적으로 국가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분명히 개인의 자유에는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긍정적인 현실성이라는 헤겔의 견해는 현실의 지배질서를 공고화함으로써 개인의 육욕적이고 변덕적인 특수의지를 짓누르는 권력의 작용을 정당화시키는 면이 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헤겔은 잠재태적인 이념의 상태보다 이념의 실현(실천)을 더 중시한 것으로도 보는 해석도 있다. 바로 이 실천의 폭, 인간 자유의 폭을 어느 정도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헤겔이 거대한 힘을 지닌 사유체계의 궁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메를로 퐁티는 ‘정신현상학’에 나타난 헤겔 철학의 실존성은 태초로부터 완성된 의식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과정에 있음을 말한다(Merleau-Ponty, p.65). 그러나 헤겔의 총체적 이성에서 벗어난 자유 내지 실천은 본래적인 헤겔의 의도와는 상충될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헤겔이 국가에 부여한 합리성이 인간의 현실적 행동에 대항해 우세하도록 자신을 드러내는 권위는 칸트가 시민사회의 계몽을 위해 군주에게 부여한 입법적 권위와 물리적 강제력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지금까지 얘기된 것이 정신이 역사에 행사되는 기제를 밝혔다면 이제는 그 기제가 현실에서 드러난 모습과 그 척도를 말할 차례이다. 완성된 국가의 결정체는 헌법이다. 법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헤겔은 자연상태에 대한 규정 문제를 논한다. 헤겔은 자연상태를 홉스 식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란 설명을 역사적 사료의 빈곤을 들어 거부한다. 또한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정의 수정인 대의정이 인민층과 통치층을 분리한다는 생각도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발상에는 홉스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주관적 의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며, 집단적 방식으로 강제된 법률이 소수의 의지를 무시하는한 그것이 만장일치로 결의된 것이라해도 거부된다. 한편 모든 동의가 충족된다면 국가는 투표기구로만 한정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의 국가가 그렇게 나약하지 않은 것은, 국가 원리인 헌법이 신적인 본성 자체인 보편적 의지를 주관적 의지를 지닌 개인들에게 실현-정신이 자기 자신 안의 대립물을 극복하면서-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실적 존재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나아가는 진보의 과정에 있다.


  헤겔에게 역사적 대상으로서 철학적 고찰이 될만한 것은 의식과 의지, 행위 안에 합리성이 드러난 것으로서 그것의 형태는 법이다. 이러한 합리성이 전무한 상태, 즉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는 임시적인 주관적 통치명령이 보편타당한 법을 대체하고, 영속적인 사건의 기록(과거의식)이 전무해 현재의 불완전성을 초래한다. 덧붙여서 예술이나 교양의 발전도 국가(법의 상태)와 병행해서 발전하는데 왜냐하면 구체적 실현수단으로서의 공동생활을 위한 법, 제도와 마찬가지로 공동생활을 위한 외재적 실현수단으로서의 교양-예를 들어 조형미술-만이 보편성의 최성기를 달성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칸트. 이한구 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1992.

헤겔. 김종호 역 『역사철학 강의』. 삼성출판사 1993.

 G. Hegel,  The Reasons in History. tran. by R.S.Hartman. Bobbs-Merrill. 1953.

 M. Merleau-Ponty, Sense and Nonsense. tran. by H.L.Dreyfus & al. 
                                   Northwestern Univ. Press. 1964.


*십몇년전 쓴 레포트를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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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군왕주의

주장 Behauptung 2007. 5. 18. 09:19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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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의 왕릉에서 문화재청장이 지역 유지들과 부탄가스로 고기를 구워 먹은 일이 논란이다. 어제 MBC 9시 뉴스는 이런 행태를 몇년전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창경궁의 저녁 만찬 파티와 마찬가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해석을 가한다. 종묘에 어린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못들어가게 하는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이런 일들은 분명 형평성에 어긋난다. 왕릉이나 왕궁, 종묘는 어떠한 곳이길래 거기서 고기를 구워 먹어서는 안되며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들어가서는 안되나? 나는 이런 금지의 원칙이 고유한 문화유산에 대한 보호라는 측면에서 제기된다면 마땅히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괴테의 생가 앞마당에서 관람객들이 프랑크소세지를 구워 먹는 일을 상상하기 힘든 맥락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논란에서 비판의 준거로 작용하는 일말의 사고에는 아직도 조선왕조의 유산을 성역화시키려는 심리적 군왕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을까? 2차세계대전의 A급 전범들이 봉양된 일본의 신사 참배를 미디어에서 즐겨 비난하는 이면에는 우리에게도 성역화시킬 무엇이 필요하다는 절규에 가깝다.

고궁이나 왕릉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일은 문화유산에 대한 모독이지 결코 성역화된 왕조의 잔재를 침범하는 일은 아니다. 심리적 군왕주의야말로 공화주의에 대한 심리적 반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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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도1 들여다 보기

영화 Film 2007. 5. 16. 17:43 Posted by 산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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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랍다. 중국 대륙영화를 제외하곤 홍콩 영화란 주윤발 시대의 홍콩 느와르나 액션 코메디가 전부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시나리오도 탄탄하고 재미도 있으면서 무게감있는 갱영화일 줄은 몰랐다. 최근 개봉되는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가 '무간도'의 리메이크란 점이 이 영화의 무게를 반증한다.

무간도는 열반경에 나오는 18번째 지옥을 말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한 스파이의 내면 상태를 암시한다.  

유덕화, 양조위의 주연도 돋보이지만 황추생(황국장), 증지위(한침)의 조연도 볼만하다.

영화 종반부에서 다른 삶(선한  삶)을 살고 싶다는 경찰 간부직 스파이 유건명(유덕화)에게, 경찰신분을 숨긴채 갱스파이로 젊음을 소진한 진영인(양조위)이 코웃음친다. 그러자 유건명은 진영인에게 자신을 죽일 거냐고 묻자 진영인은 다시 코웃음치며 자신은 경찰이라고 한다. 이때 유건명의 이 한마디가 카메라 원격조정으로 화면을 급변시키면서 그대로 진영인이 유건명의 이마에 총구를 들이대게 한다.

                                                 "그걸 누가 아는데?"

경찰 후보생 시절에 갱스파이 임무를 위해 특채로 뽑힌 진영인이 경찰학교에서 추방되는 형식으로 나갈 때 그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단 두 사람, 면접관과 황국장 뿐이었다. 이 영화는 초반부에 이 면접관의 장례행렬을 보여 주면서 본래 경찰 신분인 진영인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지탱하던 한 축이 붕괴되는 것을 보여준다. 한침을 올가미를 만들어 합법적으로 구속하기 위해 진영인과 접선을 했던 황국장이 갱들에게 무참하게 죽임을 당해 남았던 한 축 마져 무너진 후,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진영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유건명 한사람으로 전도된다. 즉 진영인은 자신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고 이 신분을 증명할 데이타를 이미 삭제해 버린 사람을 놓고 총을 겨누는 것이다.  

진영인으로서는 유건명을 죽여서는 안된다. 죽이면 자신의 신분을 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살인범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유건명은? 경찰 고위직으로 승승장구하는 자신의 입신을 위해 그는 자신 외에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정리되는 것을 지켜본다. 영화상으로 유건명이 진영인과 진정으로 '합작'을 바란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살려준 경찰 내부의 또다른 부하 스파이를 여지없이 살해하는 것을 보면, 그가 믿는 것은 그 자신 밖에 없다고 보는 편이 유력하다. 단지 진공 엠프로 음악듣기를 좋아하는 취미의 공통성이 '합작'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이제 자신 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법칙과 규율이 없는 곳으로 '나도 나가고 싶다'라는 유건명의 말은 승자의 반성일 뿐이다. 그래서 도덕은 강자를 위한 것인가?

*영화 시작부에 대여섯명의 청년들이 한침의 설교를 듣고 경찰학교에 입사하는 것을 보면, 경찰 내부에 유건명의 정체를 아는 스파이가 또 있을 수 있고, 진영인이 죽은지 6개월 후 그의 신분이 회복되는 점은 이런 이야기 구도를 희석시킬 소지가 있으나, 정체성이라는 주제의 골격을 드러내는데 의의가 있을 뿐이다.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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