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계절
지난 금요일 다소 심각한 회의 후 밥먹고 차를 타러 가면서 함께 가는 분과 잠깐 산 얘기가 나왔다. 당장 지리산까지는 아니더라도, 주말의 계속적인 궂은 날씨 탓으로 오르지 못했던 동네의 산을 이번 화창한 토요일 올랐다. 산정 너머의 크레인을 보고, 저 높은 곳에 무얼 짓는지 보고싶기도 해서 평소보다 좀더 긴 코스를 가고 싶은 열망도 생겼다. 오랜만의 산행에 힘들게 오르면서 마음 먹은 대로 체력이 버텨줄 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산마루길에 가까워 질수록 체력이 살아나는 것이 느껴져 충분히 크레인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제부터 무게가 실릴 때 이따금씩 통증이 일어나는 왼쪽 무릎이 걸렸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하산길은 길거나 가파라서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오를 때에는 가픈 숨에, 내려갈 때는 인적없는 숲속의 적막함을 삼키고 콸콸 흘러넘치는 산틈의 개울 소리에 이런저런 생각이 멈춰진다. 편도용 차량을 위해 깔아놓은 좁은 아스팔트 길을 걸어가면서 지나가는 계절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란 벼를 보았다. 벼 한단이면 밥 한그릇 정도는 나오니 들판이 거대한 밥상으로도 보였다.
톨스토이는 보르지노 전투를 묘사하면서, 안전한 후방에 있는 지휘부가 어떤 명령을 내리더라도 생사가 오고가는 전장 한복판에서 이 명령은 전선의 당사자에 의해 판단되어 진다고 말한다. 아무리 죽음이 유력한 험지에 군대를 몰아넣더라도 가미카제 특공대처럼 죽으라고 명령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과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주 다르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생각을 함몰시킬 열정의 대상, 열망의 수단을 얼마나 갖추었는지 가늠해 보는 시기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