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Vorstelltung
뛰는 아이들
산사람
2010. 3. 7.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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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품앗이 육아를 하는 이웃집 아이들과 함께 서종면에 다녀왔다. 운전하는 차에서 아이들이 지르는 괴성에 괜히 나왔다 싶었는데, 추운 날씨 속에서도 텅빈 운동장에서 맘껏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자 순간적으로 기쁨을 느꼈다. 요즘 보고 있는 한트케의 책은 한편의 진중한 육아일기다. 육아는 마치 들뤼즈가 말하는 리좀처럼, 관계망을 넓혀 가면서 전혀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는, 오래된 나무의 맨끝 생장점에서 뿌리까지 연결된 개체라기 보다는, 이 생장점에서 전혀 새로운 개체로 건너뛸 준비를 하고 있는, 그래서 초인의 비유로 나타나는 종족이 아닐까?
"아이는 놀고 그 남자는 작업을 하면서도 전처럼 힘닿는 대로 자리를 함께해 서로의 대화상대가 될 것인가? 그러면서도 <아이>는 아이답게 굴고 <어른>은 수준을 낮추지 않아도 될까? 그게 아니라면 <아이들>이란 우선 같은 또래들 사이에서 지내는 것이 옳고, 그래야만 고통과 부당함을 겪으면서 자의식을 갖게 되고 무엇인가가 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종족이었던가? 그래야만 비로서 그 <동족들>은 나름대로 동아리를 형성하고 어른은 잘해 봐야 단순한 보호자가 되는게 아니었을까?...한때는 자신도 단체 생활에 속할 능력도, 의지도 없이 개인 플레이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자기 같은 사람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완전히 자의에 의해, 작으나마 자신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페터 한트케, <아이 이야기>Kindergeschichte in 『소망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ück 윤용호 역(민음사, 2008), p.126.
"혼자 있거나 우연히 두어 명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는 아이가 아니라 이제는 정해진, 보다 큰 집단 속에 있는 아이를 보게 되자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아이들이 많은 집단에 속하게 되자 아이는 즉각 조용한 아이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공포에 떠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가엾은 아이로 변해갔다...ㅣ 게다가 많은 아이들이, 가장 어린 꼬마까지도 서로서로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악한 아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다 <순진무구한 건> 아니었다"
상동, 129-130.
"아이는 혼자 있었던 때보다 눈에 띄게 생기를 얻었고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몸의 관절과 머리칼을 움직였고 울리는 목소리를 냈다. 책임자인 그는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원래대로 내버려두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아이를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위해 <늘 곁에 있는 사람>으로 함께 있을 때 그들 모두를 끌어모으는 힘으로서, 이상적으로 투입된 에너지로서 효과를 냈다."
상동, 133.
페터 한트케, <아이 이야기>Kindergeschichte in 『소망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ück 윤용호 역(민음사, 2008), p.126.
"혼자 있거나 우연히 두어 명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는 아이가 아니라 이제는 정해진, 보다 큰 집단 속에 있는 아이를 보게 되자 의문이 생겼던 것이다. 아이들이 많은 집단에 속하게 되자 아이는 즉각 조용한 아이에서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공포에 떠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가엾은 아이로 변해갔다...ㅣ 게다가 많은 아이들이, 가장 어린 꼬마까지도 서로서로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악한 아이>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든 아이가 다 <순진무구한 건> 아니었다"
상동, 129-130.
"아이는 혼자 있었던 때보다 눈에 띄게 생기를 얻었고 다른 아이들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몸의 관절과 머리칼을 움직였고 울리는 목소리를 냈다. 책임자인 그는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원래대로 내버려두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아이를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위해 <늘 곁에 있는 사람>으로 함께 있을 때 그들 모두를 끌어모으는 힘으로서, 이상적으로 투입된 에너지로서 효과를 냈다."
상동,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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