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Vorstelltung

사드와 대중국 외교

산사람 2016. 7. 26.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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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이어  <삼국유사> 기이편을 보면서 성주 사드 배치 결정을 둘러싼 갈등양상을 역사적 관점에서 비춰 본다. 삼국시대는 물론이고 현대사에서도 한반도의 정세는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동북아의 대전으로는 원의 침탈, 왜란에 따른 명의 군사원조, 청의 침탈, 한국전쟁).  고대사에서도 물론 중국의 영향력이 보이는데, 고조선에 유입된 중국 출신의 위만과 한사군을 들 수 있다. 오히려 삼국이 각축을 벌이는 시기야말로 상대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이 약화된 시기였다. 더군다나 삼국시대에 오히려 중국은 혼란을 겪어 왕조의 부침이 잦았다(후한-삼국-서동진-16국-북남조-수-당. 어쩌면 하나의 중국이란 것은 오래된 집착의 산물). 삼국은 내부적 경쟁구도를 유지하면서 외세(중국, 왜)를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다. 때로는 침략까지 하면서.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남국 신라의 제한된 통일은 중국의 직접적 영향력을 그대로 흡수한 시발점이 되었고, 조공은 국가존립을 위한 제 1의 외교정책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중국으로서도 언제까지나 나약한 왕국을 보호할 수 없었다. 청년들이 세속 불교에 흡수되면서 군사력 동원은 끊겼고 포석정에서 즐기던 경애왕은 코앞에 적군이 온 사실 조차 모를 정도로 방비체계는 무너졌다. 견휜에게 신라왕궁이 뒤집혀진 후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 받침으로써 신라 왕조는 고려 왕조에 흡수된다. 왕건은 경주 식읍을 그대로 유지해 주면서 경순왕을 사위로 받아들이고 신라 왕족의 딸을 빈으로 맞이함으로써, 현종 시대 부터 고려 왕조는 신라 왕족의 혈통과 융합하게 된다. 고려왕조에 항복해 가문만 지킨 것이 아니라 왕통도 나눈 셈이다.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 직접적으로 끌어들이는데 공을 세운 김춘추(무열왕)와 그의 친구 김유신의 행적은 어쩌면 현재 미국으로 쏠려 있는 외교의 한 장면과 겹쳐진다. 외교는 의존이 아니라 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교과서적이다. 북조선 문제를 미국에, 중국에 온전히 내맡기는 사태의 결과가 성주 사드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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